홍건적난 피해 안동몽진한 공민왕
안동부민 환대로부터 위기극복
홍건적난 피해 안동몽진한 공민왕
안동부민 환대로부터 위기극복
  • 권두현
  • 승인 2009.04.03 15: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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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다리밟기에 얽힌 수수께끼

안동지역의 대동놀이를 대표하는 차전놀이와 놋다리밟기는 고려의 건국자 왕건과 고려의 실질적 마지막 왕이라고 할 수 있는 공민왕과 관련이 있어 흥미롭다.

전설에 의하면 차전놀이는 왕건이 후백제의 왕 견훤을 맞이하여 벌인 병산전투에서 대승하여 고려를 건국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잡은 것을 기념하는 놀이이며, 놋다리밟기는 공민왕의 안동 몽진과 관련된 전설이 다수 남아있기 때문이다.

놋다리밟기 유래 전설

전설은 공민왕과 놋다리밟기의 관계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하여 왔을 때는 겨울이었는데 내(개울)를 건너게 되었다. 안동부민들은 왕이(혹은 노국공주가) 내를 그냥 건너는 것을 보고 그냥 있을 수 없어(왕이 어떻게 찬물 혹은 얼음판에 발을 적시면서 개울을 건널 수 있는가) 사람들이 허리를 굽혀 인교(人橋-사람 다리)를 만들어 사람들 등 위로 왕(노국공주)을 지나가게 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놋다리밟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전설은 구체적으로 어떤 개울, 혹은 강을 건널 이러한 사례가 있었는지, 왕이 여기에 어떻게 응하였는지, 혹은 부민들이 어떻게 모여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왕의 개울 건너기에 안동부민이 이렇게 성의를 다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안동에서 이 이야기는 흔히 회자된다. 필자가 태어난 곳은 안동시 도산면인데 어릴 적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당시 전설을 이야기 하던 어른은 공민왕이 청량산 아래 낙동강을 건널 때 안동부민이 이렇게 사람다리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실제 청량산 부근에는 공민왕과 관련된 많은 동신당과 산성 그리고 전설이 남아있어 이러한 이야기에 근거를 제시한다.

안동시의 어떤 사람은 지금 풍산가는 길에 있는 솔밤다리를 건널 때 이렇게 사람다리를 만들어서 공민왕을 환대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공민왕의 안동몽진길은 예천으로 내려왔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안동입구에 있는 솔밤다리를 지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이 같은 내용은 확인할 길이 없다. 또한 확인할 수 있다하여도 그 자체가 놋다리밟기 전설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는 것도 크지 않다. 이 전설은 공민왕에 대한 안동부민들의 인식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놋다리밟기 놀이

조사보고된 임하면 금소리, 안동시내에서 이루어진 놋다리밟기를 통하여 놀이의 개략적인 면을 살펴보면 놋다리밟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여성들이다. 장성한 처녀에서 갓 시집 온 새색시 그리고 장성한 어른에 이르기까지 혈기왕성한 여성들은 모두 참여한다. 시기는 정월보름 밤에 이루어진다. 차전놀이가 정월대보름 낮에 이루어지는 것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놋다리밟기는 편싸움 놀이이며, 대동놀이다. 안동시내에서 이루어진 놀이를 보면 목성교 다리를 중심으로 양편으로 갈라서 그 다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격렬하게 다투었다. 금소동의 경우에도 “구무다리”를 중심으로 동서부로 나누어서 구무다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정월 대보름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매우 험악하게 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놋다리 진을 짜서 다리위에서서 양편이 만나면 서로 다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엉켜서 힘싸움을 하는데 힘에 밀리면 다리 밑으로 떨어진다. 그러면 추운 겨울 얼음이 깨지고 물에 빠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남자들은 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자신의 부인이 물에 빠지면 열기가 올라 자신이 여자복장을 하고 놋다리밟기에 참여하여 힘을 겨루는데 여성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다리에서 떨어졌다는 일화를 필자는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안동의 놋다리밟기는 의성의 지애밟기와 매우 흡사한 놀이이다. 말하자면 놋다리밟기는 안동지역만의 놀이가 아닌 것이다. 민속학 연구자들은 영덕의 월월이청청, 그리고 전라도에서 왕성하게 전승되고 있는 강강술래와 같은 맥락의 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놋다리밟기는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한 1361년에 만들어진 놀이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훨씬 오랜 연원을 가진 여성들의 놀이일 것이다. 춤 인류학은 여성들이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면서 노는 놀이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이며 그 기원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에 주목하는가

놋다리밟기가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 온 것을 계기로 만들어진 놀이가 아니라는 것은 문화적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놋다리밟기와 공민왕이 연결된 이 전설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놋다리밟기가 행해지던 시기가 정월이기 때문에 공민왕일행이 안동에서 놋다리밟기 행사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이다. 놋다리밟기가 이미 오래 연원을 가지는 행사이고 보면, 그리고 안동에서 활발히 전승된 놀이라는 점에서 공민왕일행, 특히 노국공주가 이 놀이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사건을 추적하기 보다는 놋다리밟기 전설이 가지는 함축적 의미에 보다 주목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가장 추운 시절인 음력 11월에 서울인 개성을 출발하여 20여일의 길을 걸어 안동에 도착한다. 공민왕이 안동으로 오는 도중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는 것은 이미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 보인다.

권두현 사무국장
그런데 왕이 안동에 도착하였을 때부터 안동부민들은 공민왕을 성의를 다해 환대하였으며 동시에 홍건적과의 전투에서도 승전보가 속속 들어왔다. 말하자면 공민왕이 안동에 머무는 동안 고려는 홍건적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공민왕 개인적으로는 마음의 평안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놋다리밟기에 어린 공민왕의 전설은 어쩌면 이러한 안동부민들의 환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놋다리밟기는 강강술래, 월월이청청 등과 함께 여성원무형 놀이로 매울 역동적인 편싸움 놀이이지만, 공민왕의 안동몽진이 던져준 충격과 공민왕을 따스하게 환대하는 안동부민의 열정은 결국 놋다리밟기 유래담에 연결시킴으로써 더욱 비중 있고, 역사성을 담아내고자 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놋다리밟기는 공민왕의 전설과 더불어 더욱 의미 있는 대동놀이로 이를 향유하고 있는 안동지역민들에게 자긍심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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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2009-04-15 20:12:56
나는 너가 어제 무슨일을 했는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