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살리려는 할머니 따라 제비원 오고가
제비원 가는 길이 구원의 길 될줄이야
동생 살리려는 할머니 따라 제비원 오고가
제비원 가는 길이 구원의 길 될줄이야
  • 송옥순 읊고/최성달 쓰다
  • 승인 2014.12.08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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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안동제비원성주풀이에 얽힌 나의 인생’ 別曲> (1)
[읊은이 / 송옥순, 글쓴이 / 최성달]

성주굿을 할 때, ‘성주의 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 이라는 성주풀이를 노래한다. 이렇듯 예로부터 안동 제비원은 민족신앙의 본향으로 일컬어져 왔다. 최근 사단법인 안동제비원성주풀이 보존회 송옥순 회장은 2012년 안동제비원성주풀이를 전국최초로 완창하는 공연을 성공시켰다. 성주신앙의 체계적인 보존과 계승은 물론이고 현대인에게 보다 쉽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송옥순 여사. 전통문화 유산을 온몸으로 계승·체현하고 있는 인간 송옥순의 삶의 이력을 경북문화콘텐츠진흥원의 기획으로 최성달 작가가 구술 받고 정리해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 송옥순 여사(사단법인 안동제비원성주풀이 보존회장)


1. 할머니와 내 동생 옥희

나는 1954년도에 경북 안동시 송천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추, 고구마, 산나물을 비롯한 농산물을 수레에 싣고 행상을 했으며 어머니는 남의 집 밭일이나 허드렛일을 하면서 집안 살림을 이끌어 갔다. 집안에는 할머니와 삼촌이 함께 살았는데 부모님은 결혼하고 5년 만에 나를 낳으셨다. 그리고도 부모님은 내 밑으로 동생을 6섯 명이나 더 낳으셨는데 내가 15살 되던 해 막내인 아들을 생산하고서야 출산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셨다. 가난한 살림에 식구가 늘어가는 것을 걱정하면서도 줄기차게 출산을 하신 것은 아들에 대한 간절한 욕구 때문이었다.

어릴 때 나는 주로 할머니와 생활했다. 잠도 같이 자고 나들이도 같이 했다. 할머니는 막내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정말 나를 귀여워해 주셨다. 먹고 입는 것은 물론 좋은 것은 무조건 나를 위해 챙기셨다.

어릴 적 기억에 할머니는 조금 특이한 분으로 남아 있다. 잠시 몸을 움직여 집안일을 하시거나 이곳저곳을 다니실 때며 어김없이 그때마다 입으로 중얼거리거나 흥얼거리면서 소리를 하셨다. 가령 방안 마루 대청에 모셔두었던 성주신에게 빌거나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놓고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릴 때도 무슨 주문 같은 것을 외우다가 곧잘 소리를 하셨다.

“어라 지신이여 지신지신 누르자
마루에는 용호장군 용호장군 지신이여
고방에는 고방장군 고방장군 지신이여
부엌에는 조왕장군 조왕장군 지신이여

우물에는 용신장군 용신장군 지신이여
마당에는 마당장군 마당장군 지신이여
측간에는 직신장군 직신장군 지신이여
장독에는 장독장군 장독장군 지신이여
마구에는 마구장군 마구장군 지신이여
삽짝에는 삼짝장군 삽짝장군 지신이여
십왕 재장신 왕래하여 이 터에 오실 적에
오시는 길에 복을 주고
오방토주를 눌러놓고 가시는 길에 명을 주소
어라 지신이야 지신지신 누르자
어라 지신이야 지신지신 누르자”

나는 할머니가 외우던 五方地神呪(오방지신주)를 안동제비원성주지신밟기를 하기 전에 먼저 주문으로 외우고 시작한다.

“금을 준들 너를 주랴 은을 준들 너를 주랴.”라는 소리도 할머니가 어린 나를 무릎에 눕히고 바느질을 하실 때 부르는 노래였다. 몸이 고단하시면 구슬픈 노래도 곧잘 부르셨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은 할머니가 부르시던 이 노래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3년 만에/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애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시었으니/ 진주남강 빨래가라/ 진주남강 빨래가서/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는 검게 빨아..........”

대개가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소리가 주술무가나 내방가사로 추정되는데 흘러 듣기만 하고 채록을 해놓지 않아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 성주신앙의 본향 '안동 제비원'

할머니의 정식 기도 장소는 제비원이었다.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식구 중에 근심만 생겨도 제비원 미륵불 앞에 가서 빌었다. 나는 그때마다 할머니를 따라서 제비원으로 갔다. 그 수많은 발걸음 중에 지금도 기억이 선명한 것은 할머니가 생명이 가물가물한 셋째 동생을 위해서 기도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할머니는 영 가망이 없다는 판단을 하셨는지 그 먼 길을 동생을 업고 걸어서 제비원으로 갔다. 가면서도 기도하시던 할머니는 제비원에 도착해서는 담요로 싼 동생을 미륵부처님 앞에 봉헌하고는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의원이 이미 가망 없다고 사망신고를 내렸는데도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천지신명께 빌고 미륵부처님께 매달리고 성주님께 애걸복걸 하셨다. 그 영험 덕분이었는지 며칠째 혼수상태에 있던 동생이 겨우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앞에서 눈물이 범벅이 되어 기도하고 있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오른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입을 달싹거렸다. 나는 동생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할머니는 알아들으시고 대답을 하셨다.

“저 어린 것이 도리어 할미 걱정 말란다. 지는 선녀가 될 것이라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동생은 들리지 않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뱉어 내고는 숨을 거두었다.

이 광경은 어린 나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 죽음을 넋 잃고 애닮게 바라보는 동안 내 가슴에는 무언가가 묵직한 것이 쾅 때리며 들어왔는데 돌이켜 보면 나는 이때 벌써 지금과 같은 무당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점지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할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내가 시집가는 것 보고 죽는다고 하셨는데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시고 내가 스무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내가 시집가기 3년 전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제비원 혼은 장손녀인 내가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어릴 적 할머니를 따라나선 제비원 가는 길은 지금은 나에게 구원의 길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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