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되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빌었건만
사람 앞날 자꾸 보이니 성주신 모셔
무당되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빌었건만
사람 앞날 자꾸 보이니 성주신 모셔
  • 읊은이/송옥순,글쓴이/최성달
  • 승인 2014.12.10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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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안동제비원성주풀이에 얽힌 나의 인생' 別曲> (2)
[읊은이:송옥순/글쓴이:최성달]

성주굿을 할 때, ‘성주의 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 이라는 성주풀이를 노래한다. 이렇듯 예로부터 안동 제비원은 민족신앙의 본향으로 일컬어져 왔다. 최근 사단법인 안동제비원성주풀이 보존회 송옥순 회장은 2012년 안동제비원성주풀이를 전국최초로 완창하는 공연을 성공시켰다. 성주신앙의 체계적인 보존과 계승은 물론이고 현대인에게 보다 쉽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송옥순 여사. 전통문화 유산을 온몸으로 계승·체현하고 있는 인간 송옥순의 삶의 이력을 경북문화콘텐츠진흥원의 기획으로 최성달 작가가 구술 받고 정리해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2. 결혼

나는 22살에 우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을 했다. 당시에는 드문 연애결혼이었는데 2년을 만나 본 후 서로 이 사람이다 싶어 결혼을 서둘렀다. 남편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산이었다. 남편 집안은 윗대로 자손이 귀한 집안이었다. 손이 귀한 탓에 시어른은 부모님이 바위에 향을 사르고 촛불을 피워놓고 치성을 드린 끝에 겨우 얻은 3대독자였다.

시댁에서 자손 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등장하는 이야기가 시할아버님 사연이다. 6.25때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가며 마을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시할아버님이 죽임을 당하셨다. 마을 사람들이 산 속에 숨어 있는 시아버님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를 때 시할아버님께서 끝까지 자식 있는 곳에 대해 입을 다물어 아들의 목숨을 살리셨다. 그 바람에 자신이 마을 사람들 죽창에 찔려 세상을 등지는 불행을 당하셨다.

남편은 풍파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 때문이지 연애할 때 그렇게 잘 어울리던 남편과의 사이가 결혼하고 나서는 만사가 잘 맞지를 않았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부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결혼해서 일주일 만이었다. 남편은 소리사를 운영하고 나는 화장품 판매와 계모임을 주선했다. 둘 다 바깥일은 잘 되었다.

특히 당시 소리사는 휴대폰 대리점이 초기에 성황을 누리던 것처럼 불황 없이 장사가 매우 잘되었다. 나 또한 20곳이 넘은 계를 운영하는 계주로서 돈벌이가 꽤나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유독 부부생활 만은 순탄치가 못했다. 어디 가서 물으면 열에 열군데 모두 한 결 같이 나더러 무당 될 팔자라고 했다. 어딜 가나 그 말을 했기에 두려웠지만 무당 되는 것만은 죽기보다 싫었다. 더 더욱 남편은 “우리 집안이 대대로 불 줄은 강해도 무당은 없었다.”며 펄쩍 뛰며 노발대발했다.


나는 무당이 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굿을 하라고 하면 굿을 했고, 시주하라고 하면 시주를 했으며, 방편을 쓰라고 하면 방편을 썼다. 번 돈을 다 날리더라도 무당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때부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잠시 멈추었던 연미사 제비원 미륵전에 대한 기도를 다시 시작했다. 그곳에 가서 미륵전에 빌고 할머니께 빌고 먼저 하늘나라로 가서 선녀가 된 동생에게 제발 무당만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기도는 매일같이 제비원에 들렀다가 석수암과 법룡사를 거쳐서 마무리가 되었고 어떤 때는 안동댐 용궁과 서낭기도까지 곁들여 가며 기도생활을 이어갔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면 운명과 숙명마저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시집가고 스물세 살에 다시 시작한 기도를 그렇게 목숨 걸고 스물여덟까지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무속을 넘어선 세계 즉, 위대한 인간이 걸어가고 이룩한 찬란한 대의가 환상이 아니라 실재라는 것을 철석같기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한 인간에게 내려진 징벌 같은 괴로움을 벗어날 방책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수많은 인간이 이런저런 번뇌로 고통 받고 있는 현실에서 많은 이들이 현자가 이룩한 경험과 책으로 설파한 내용을 읽고 치유를 하기도 하고 종교에 귀의해서도 평안을 얻는 것이다. 병이 있으면 치료법이 있는 것이고 고통이 있으면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보면, 인간이 발견할 수 없을 뿐이지 치유책은 분명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사랑으로 인한 아픔이 더 큰 사랑으로 치유가 되듯 내가 겪는 시달림이 무속을 넘어선 더 큰 사랑과 도량과 자비로 치유가 될 수 있다고 믿고 또 믿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이 철석같은 기원은 적어도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제비원에서 기도를 열심히 할수록 영혼은 맑아져만 갔다. 꿈을 꾸거나 생각으로 떠오른 것은 뒷날 모두가 현실이 되었다. 어떤 사람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기에 “상복이 있겠습니다.” 라고 말하면 영락없이 큰 상을 받았다. 아는 사람 형체에서 좋은 기운이 느껴져 돈이 들어온다고 말하면 반드시 횡재수가 터졌다.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하면 안 좋은 일이 생겼고 액운을 막아야 한다고 했는데 막지 않은 사람은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거나 죽어나갔다.

사람을 보고 생각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은 기겁을 했다. 남편이 내게 제발 떠오른 영감을 입 밖으로 뱉지 말아달라며 애원하며 두 손을 싹싹 빌었으나 말문이 닫히지 않았다. 사정하다 안 되니까 윽박지르기까지 했지만 내 의지로는 말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다 보니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한 번은 부부동반을 해서 절집을 가는데 남편 친구에게 “얼마 있으면 상복을 입게 됩니다.” 라고 말했다가 남편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지고 그 길로 절가는 것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는데 열흘 뒤에 그 집 시어른이 돌아가셨다. 일흔을 넘기시고도 정정하셨는데 아침 드시고 멀쩡히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일이 이 지경이 되다보니 진원사의 권은도 선생과 평화사 주지이신 최사불 스님이 내가 스물아홉 되던 해 성주신과 대감을 모시라고 권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당하기가 싫으면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방책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그 길로 대감을 집에 모셨다. 권은도 선생이 일러준 성주신도 함께 모시려고 했으나 성주는 내 집이 없으면 모시지 못한다고 해서 그해 나는 집을 사서 성주신과 대감을 함께 모셨는데 지금껏 모시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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