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 거부하자 20kg 몸무게 빠져나가
내림굿 받고 신의 길을 따라 나서다
신병 거부하자 20kg 몸무게 빠져나가
내림굿 받고 신의 길을 따라 나서다
  • 읊은이/송옥순,글쓴이/최성달
  • 승인 2014.12.15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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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안동제비원성주풀이에 얽힌 나의 인생' 別曲>(3)
[읊은이:송옥순/글쓴이:최성달]

성주굿을 할 때, ‘성주의 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 이라는 성주풀이를 노래한다. 이렇듯 예로부터 안동 제비원은 민족신앙의 본향으로 일컬어져 왔다. 최근 사단법인 안동제비원성주풀이 보존회 송옥순 회장은 2012년 안동제비원성주풀이를 전국최초로 완창하는 공연을 성공시켰다. 성주신앙의 체계적인 보존과 계승은 물론이고 현대인에게 보다 쉽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송옥순 여사. 전통문화 유산을 온몸으로 계승·체현하고 있는 인간 송옥순의 삶의 이력을 경북문화콘텐츠진흥원의 기획으로 최성달 작가가 구술 받고 정리해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3. 전국 산천을 돌아다니다.

권은도 선생과 최사불 스님으로부터 성주신과 대감신을 받아 집에 모셔놓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자나 깨나 기도를 했다. 그때부터는 제비원과 석수암, 법룡사 가는 것 말고도 시간을 내어서 전국 산천을 돌아다니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팔공산, 지리산, 속리산, 계룡산, 설악산, 청량산, 한라산을 비롯한 전국의 명산과 기운이 좋다는 바위산은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다 다녔다. 정말이지 내 운명이 무당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신실하게 채워지는 삶이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바랬다.

나는 산에 기도를 드리러 갈 때마다 세 가지 소원을 빌었다. 첫째, 무당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고, 둘째는 가족이 건강하기를 빌었다. 마지막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니까 모든 일이 술술 풀려나갔다. 그 당시 나는 계를 20개나 하고 있었지만 단 한군데서도 사고가 나지 않았다. 빈틈없이 철두철미하게 한 탓에 25년 계주를 하면서도 남에게 욕을 먹지 않았다. 돈이 풍족하게 들어왔고 아이들도 무럭무럭 잘 자랐다. 이렇게만 살 수 있으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호사다마랄까? 행복한 시간이 계속되지를 않았다. 마흔다섯 되던 해 기미가 이상했다. 산 기도를 많이 해서 그런지 또다시 정신이 맑아져만 갔다. 앉아 있으면 앞날이 다 보였다. 굿판에 가면 굿하는 무당보다 더 족집게처럼 모든 것을 맞추어버려 굿하는 무당을 곤란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그 뿐만 아니라 뱃속 아이의 성별이며 시험 앞둔 수험생의 당락을 백발백중 다 맞추어 버리는가 하면 꿈속에서 선몽이나 예지몽을 꾼 것도 시간이 지나면 영락없이 꿈속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사람 얼굴만 보면 앞날에 닥친 일이 훤히 보였고 그것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 밖으로 뱉다 보니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용한 점쟁이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내림굿을 받아 본격적으로 점집을 차리지 않았을 뿐 나는 어느새 무당 아닌 무당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난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무당 하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든 무당이 되지 않으려고 더 안간힘을 다 했다. 일 년 동안 매달 굿을 한 해도 있을 만큼 이 길을 피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어려움이 닥쳤다. 새벽에 기도하러 가다가 12톤 트럭에 부딪쳐 공중 몇 바퀴를 돌고 떨어졌는데 희한하게도 팔 다리에 조금 타박상을 입은 것 외에는 멀쩡했다. 죽지 않은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는데 이런 식의 신의 장난과 시달림이 이어졌다. 신을 계속 받지 않고 버티니까 딸아이에게도 이상한 일이 발생하곤 했다. 딸아이가 새벽만 되면 사라지곤 했다. 그런 날이면 버선발로 온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 아이는 사라졌다가 되돌아와서도 자신의 행동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새벽에 자신이 어디론가 갔다 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해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도무지 마음을 잡을 수 없는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정신없이 산천을 찾아다니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산에 가서 천지신명에게 울고불고 매달렸다. 어째서 지금껏 그렇게 치성 드리고 매달렸는데 고통이 멈추지 않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서러움에 눈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도무지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서럽고 서러워 눈물만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무엇 때문에 죽기보다 싫다는 사람을 골탕 먹이려고 하는지, 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천지신명께 따지고 또 따졌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거역하면 할수록 고통은 점점 심해져 갔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정말 견디기 힘든 무서운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신의 조화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단 한숨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물 한 모금 입안으로 넘기지를 못했다. 겨우 며칠에 우유 1개만 허락이 되다보니 사람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니 눈알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이 이어졌지만 정신은 더 초롱초롱하게 맑아져가니 사람이 미칠 지경이었다. 석 달 열흘 만에 몸무게가 20kg 가량이 빠져버렸다.

하는 수없이 나는 살기 위해서는 또 굿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알고 지내는 무당에게 굿을 맡겼는데 그 무당이나 나나 한겨울인데도 땀이 비가 오 듯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굿한 효과는 며칠이 가지 않았다. 보름 만에 잠을 자고 끼니를 겨우 이었으나 곧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되돌아가기에 다시 나는 그 무당에게 굿을 한 번 더 해달라고 애원을 했다. 하지만 그 무당은 손사래부터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두 번 다시 굿 이야기는 자신에게 꺼내지 말라며 정색을 했다. 사연인즉 그 무당이 나를 위한 굿을 하고는 일주일을 앓아누웠다는 것이었다. 내 상황이 자신에게 전이되어 그 무당도 다른 무당을 불러 굿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무당마저 굿을 못해주겠다고 하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정신을 다 수습하지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누가 옆에서 그랬다. “물장사를 해보시소. 그러면 신을 안 받아도 된다고 카디더.” 나는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앞뒤 가릴 것도 없이 부동산을 찾아가 매물로 나와 있는 노래방을 다짜고짜 계약하고는 팔자에도 없는 물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무엇을 해도 되지를 않았다. 노래방도 파리가 날리고 곗돈도 떼이기 일쑤였으며 그렇게 호황을 누리는 남편 전파사도 무슨 영문인지 사양길을 걸었다. 신병도 전혀 나을 기미가 없었다. 신의 풍파 때문이었는지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밤마다 꿈을 꾸었다. 내가 돗자리를 깔고 점판 앞에서 점을 보는 신꿈이 밤마다 계속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또 꿈을 꾸었는데 백발노인이 나타나 뭘 하고 있느냐고 고함을 쳤다. 뒤이어 친구가 찾아와 점을 봐달라고 손을 내밀었는데 뒤를 보니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길게 줄지어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잠에서 깬 나는 그제 서야 나 자신을 자각했다. 결국은 돌고 돌아 무당의 길을 가야하다니 새삼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것도 없었고 가지 않으면 정말 내가 신의 노여움을 받아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내 신병은 필시 큰무당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불현듯 들자 그전에 굿을 해주었던 무당이 “나 같이 기가 센 사람은 큰 무당을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당시 경북에서는 나의 안동제비원성주풀이와 성주굿의 스승이신 진원사의 권은도 할머니가 큰무당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전에 이미 성주신을 받은 인연도 있고 해서 무작정 두 발로 진원사를 찾아가서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그런 나를 선생이 찬찬히 내려다보더니 내림굿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두말 않고 그리하겠노라고 대답을 했다. 내림굿 날짜를 받아놓고 며칠을 집에서 고민을 해도 살려면 이 길밖에 없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내림굿을 하는 날,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진원사를 권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존심이 남아 있어 누구에게도 내가 무당이 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를 않았다.

굿판을 차려놓고 선생이 마당을 열자 얼마 안 있어 접신이 되었다. 접신이 되고나서 나는 정신없이 몇 시간을 펄쩍펄쩍 뛰었다. 뛰면서 온갖 말이 다 튀어나왔는데 첫마디가 “천지신명이시여 저를 굽어 살피시어 만 중생을 살리는 큰사람으로 쓰이게 하십시오.”라는 말이었다. 이어서 “장군, 장군, 대감, 대감”이라고 외쳤다. 장군신과 대감신이 온 것이었다. 뒤이어서 “내가왔다. 고깔 쓰고 칠성 할매가 왔다.”고 말을 내 뱉었는데 금방 내 동생 옥희가 선녀가 되어 들어왔고 온갖 신장 도사가 접신이 되어서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내림굿은 아침에 시작하여 새벽 5시쯤 끝이 났다. 드디어 신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그동안 단 5분을 못 자던 잠을 그날 처음으로 푹 잔 것이다. 그 다음날 자고 일광을 받고 밥을 먹는데 그 밥이 세상 처음 먹어보는 밥인 것처럼 꿀맛 같았다. 사람 마음이 참으로 요상했다. 내림굿을 받고나서 살맛이 나자 이 좋은 것을 이제껏 왜 안 받겠다는 그 난리를 쳤는지 내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이었다. 그길로 남편 몰래 운안동에 신당을 차리고 점을 보기 시작했다.

내가 무당이 되자 그 소문은 삽시간에 장안으로 퍼져나갔다. 25년간 계주했던 내가 무당이 되었으니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거나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용하다는 입소문이 나자 차려놓은 점집에 금방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 소문을 어디서 남편이 듣고서는 저녁에 찾아와 차려놓은 신당을 닥치는 대로 부숴버렸다. 남편이 부끄러움과 화를 참지 못해 신당을 훼손하자 갑자기 급성당뇨가 찾아왔다. 남편은 병 때문에 급격하게 살이 빠졌고 반대로 나는 살이 찌기 시작했다.

남편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갔다. 나는 남편을 그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 싶어 하루는 아파서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을 향해 부엌에서 갖고 온 식칼을 휘두르며 벌점 푸는 의식을 거행했다. 처음에는 내 행동에 거부감을 느끼던 남편도 내가 열성을 다해 의식을 치르니까 어린아이처럼 다소곳한 모습으로 내가 하는 행위를 그냥 지켜보았다.

그 벌점 물리는 의식을 치르고 나자 남편의 병이 거짓말처럼 완쾌가 되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야 내 무당 노릇을 그렇게 반대하던 남편도 잠잠해지기 시작했지만 그 당시 마음으로 나를 응원해준 후원군은 아이들이었다. 남편이 무당하는 나를 윽박지르면 아이들이 나서서 남편에게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하시게 그냥 두라고 남편을 말렸다. 지금 장성한 아들은 영어 선생하는 아내를 만나 제주도에서 토목기사를 하며 살고 있고 딸은 서울 모병원의 수간호사로 있다.

남편과 아이들의 양해를 얻는 나는 무당의 길을 가고자 전자제품 판매점과 노래방 그리고 그 많던 契(계)를 일거에 모두 접었다. 이제는 물질의 길이 아니라 정신의 길로, 인간의 길이 아니라 신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단단하게 마음을 먹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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