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은 남 팔자 고치는 사람일뿐’
스승 권은도, 10년간 혹독하게 가르쳐
‘무당은 남 팔자 고치는 사람일뿐’
스승 권은도, 10년간 혹독하게 가르쳐
  • 구술 / 송옥순, 정리 / 최성달
  • 승인 2014.12.2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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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안동제비원성주풀이에 얽힌 나의 인생' 別曲>(4)
[읊은이:송옥순/글쓴이:최성달]

성주굿을 할 때, ‘성주의 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 이라는 성주풀이를 노래한다. 이렇듯 예로부터 안동 제비원은 민족신앙의 본향으로 일컬어져 왔다. 최근 사단법인 안동제비원성주풀이 보존회 송옥순 회장은 2012년 안동제비원성주풀이를 전국최초로 완창하는 공연을 성공시켰다. 성주신앙의 체계적인 보존과 계승은 물론이고 현대인에게 보다 쉽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송옥순 여사. 전통문화 유산을 온몸으로 계승·체현하고 있는 인간 송옥순의 삶의 이력을 경북문화콘텐츠진흥원의 기획으로 최성달 작가가 구술 받고 정리해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 성주굿과 성주풀이 스승 권은도 / 안동제비원지신밟기 스승 오숙자

4. 신어머니 권은도는 나의 성주풀이 스승

나에게 내림굿을 전수한 큰무당 권은도 선생은 친정 엄마 추씨와 아들 두 분이 모두 박수다. 어릴 때 그 어머니가 내림굿을 받는 장소에서 모녀가 동시에 접신이 되어 말문이 트인 경우였다. 그때 이야기를 들어보면 엄마가 내림굿을 받는데 딸인 권은도 선생이 더 뛰면서 신명을 부렸다고 한다. 지금 연세가 팔순을 훨씬 넘겨 귀가 잘 들리지 않지만 내림굿을 준 신제자만 해도 수백은 족히 넘는다.

나는 그 많은 제자 가운데세도 수제자로 통했다. 많은 이들이 권은도 선생을 찾아가 무당의 길을 갔지만 수련기간이 혹독해 오래 견디지를 못했다. 겨우 몇 달이 지나면 홀로 독립해서 떨어져 나갔다. 그럴 때마다 선생은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무당의 길을 간다고 나무랐지만 어리숙하고 무던한 사람도 1년을 버틸 재간이 없을 만큼 정신과 육체가 모두 힘들었다.

나 또한 신공부가 워낙 혹독하다 보니 집에 돌아와서는 매번 신당에 하소연하며 서럽게 울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왜 이렇게 고된 무당의 길로 나를 떠미셨는지 신령님께 되묻곤 했다. 어디에서도 나의 존재감을 찾을 수가 없었다. 40년 넘게 도도하게 살아온 내 인생은 어디에도 없었다. 온통 수치심과 모멸감만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면 신령님이 애처롭고 불쌍하게 나를 바라보며 화답을 했다.

“알고서도 모른 척하고, 보고서도 못 본척하고 듣고서도 말하지 않은 내공이 있어야 이 길을 갈 수가 있다. 항상 겸손해라.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라. 모두를 치유하는 만신이 되려면 필히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평소에 그렇게 잘 대해주시던 선생이었지만 일만 시작하면 심하게 질책을 하셨다. 제대로 못한다고 혼나고 지혜롭지 못하다고 나무라시고 어느 것 하나 성에 차시는 게 없었다. 물론 선생님이 워낙 매섭게 한 것은 신의 길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권 선생님의 말씀인즉, “대충 가르쳐서 내 보내면 선생 욕 먹이고 자신도 욕을 먹은 데다 가장 큰 문제는 절실해서 찾아온 이들을 구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욕보인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선생님께서 내게 하신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선생은 “무당은 자고로 남의 팔자를 고치는 사람이지 자신의 팔자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나는 선생의 그 말이 무당뿐 아니라 모든 성직자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세태가 혼탁한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직분을 망각하고 중생과 양들을 구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리사욕 채우는데 신과 종교를 이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무당은 인생 상담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찾아온 사람의 절실한 분분을 가장 지혜롭게 풀어줄 수 있는 안목과 지혜를 겸비해야 있어야 큰무당이 될 수가 있다.

나는 그 어렵다는 권은도 선생을 꼬박 10년을 모셨다. 굿은 일 마다않고 묵묵히 10년을 따라다녔다. 아무리 역정을 내어도 얼굴 한 번 안 붉히고 대꾸한번 하지 않았다. 내가 무당 되기 전 사회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벌며 떵떵거리고 살았다 해도 나를 살려준 사람은 권은도 선생이었다. 나는 오로지 그 한 생각으로 선생의 수발을 10년간 들었다.

그 덕택인지 권은도 선생의 제자 가운데 선생의 입으로 수제자라고 말한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굿의 12거리는 물론 오구굿, 안동제비원성주풀이, 성주굿을 알차고 제대로 배울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늘날 내가 사단법인 안동제비원성주풀이보존회를 이끌면서 성주풀이와 성주굿을 대중화할 수 있는 힘 또한 선생의 알찬 지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주풀이의 요체
안동제비원성주풀이 / 안동제비원성주굿 / 안동제비원성주지신밝기


5.제비원성주지신밟기 가르쳐준 오숙자 선생

내가 안동제비원성주풀이와 안동제비원성주굿, 안동제비원성주지신밟기를 본격적으로 전승 보존에 나서기 전, 안동 일대에서 이것을 전승 보존한 분들은 권은도, 오숙자 양대 선생이다. 나는 권은도 선생에게서 안동제비원성주풀이와 성주굿을 전수받았고 오숙자 선생에게서는 안동제비원성주지신밟기를 전수받았다. 이것은 행운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 세 가지를 오롯하게 다 구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두 분의 스승이 가르쳐주신 이러한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 전승하면서 숱한 말들을 들었다. 내가 이것을 후학들에게 전승하려고 하자 갑자기 너무나 많은 이들이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권은도, 오숙자의 제자라고 외치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들 중 누구도 안동제비원성주지신밟기와 안동제비원성주굿 그리고 안동제비원성주풀이를 구연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서 그저 그 분들과 교유하고 신내림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제자라고 떠들고 다녔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이 그 분들의 제자라고 한다면 적어도 그분들의 평소 말한 종지(宗旨)와 문화적 맥을 이어온 흔적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지 안다는 것만으로 진정한 제자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부끄러운 제자라면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엄중한 책임과 막중한 사명감을 느낀다. 전대 선생님들이 그렇게 갈망하고 소원했던 국가적 전승의 길을 반드시 내 대에는 이룩하고 말겠다는 전의를 다져본다.

내가 두 번에 걸쳐 전대 선생님들로부터 내려온 안동제비원성주풀이와 성주지신밟기를 사비를 들여 음반을 제작한 것도 제대로 된 보존 전승을 위해서다. 후학의 입장에서는 교과서라도 있어야 좀 더 안정적이고 편안한 가운데 이 소중한 문화적 자산을 보존 전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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