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학문으로 나아간 인물, 이상정'
'오직 학문으로 나아간 인물, 이상정'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1.0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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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 이상정과 고산서원에 대하여(2)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고산서원과 생애

서두에 다소 지루한 사상을 거론한 것은 이미 밝혔듯 대산의 입지와 위상이 학문적 성과에 비해 약체로 인식되고 있는 오류를 다소나마 시정하고픈 마음에서였다. 특히 대산 이상정에 관한 학문적 연구와 접근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데 다행히 한국국학진흥원 발행의 ‘대산 이상정의 생각과 삶’이라는 김순석 박사의 책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산의 일생은 학문으로 사상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 한평생이었다. 정말이지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시기든, 산림처사로 초야 묻혀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시기든 구애받지 않고, 오직 학문으로 나아간 인물이었다. 그가 얼마나 학문을 매진했는지는 교유한 인물들의 면면들을 통해서도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보낸 편지는 문집에 수록된 것만 623통인데 대부분은 학문적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붓을 든 것들이다. 도학자적인 자세로 일관한 그의 삶을 여실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중 대산은 제산 김성탁, 백불암 최흥원, 청대 권상일, 강좌 권만, 구사당 김락행과 가까이 지내며 학문적으로 교유했다. 김성탁은 이재와 함께 갈암 이현일에게 수학을 했고 그의 아들 김락행은 이상정과 함께 이재에게 동문수학한 까닭에 특별한 인연이었다. 1742년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지난번에 지적하여 가르쳐 주신 덕택에 비루함을 면하고 힘쓸 바를 알게 되어 다행스러웠습니다. 권만과 서신으로 성리학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그 원고를 락행이 가지고 갔습니다. 바라건대 세세하게 점검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산은 권상일의 학덕을 존경하여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다. 권상일은 이와 기를 완전히 다른 두 가지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의 성이 되고, 기는 기질의 성이 된다는 퇴계의 학설을 고수했다. 그는 이와 기가 시간적 간격을 두고 서로 나타나게 된다는 시간적 호발설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대산은 자신의 의견을 서신을 통해 제시하였다.

“사람은 말을 타고 출입합니다. 출입하는 것은 말이지만, 말을 타고 움직이는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통해 논리를 전개하자면 사람이 출입하지만 사실은 말이 출입하고 사람은 단지 말 위에 있을 뿐입니다. 이와 기는 도와 기라는 구분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합쳐져서 간격이 없는 혼합이무간입니다. 이와 기는 나누어서 둘이 되기도 하고 합쳐서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기를 벗어나서 독립할 수 없고 기는 이를 벗어나서 제 스스로 운행을 못합니다.”라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권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대산은 경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경서가 바다라면 주자가 쓴 저서와 주석은 밀려와서 부서지는 파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르신이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락행이 보낸 글 중에 동물에게는 칠정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단이 있다고 말하자 대산은 무릇 살아있는 생명체가 모두 이를 갖고 있지만 사람과 금수를 혼연일체라고 한다면 무슨 구별이 있겠느냐며 반문하는 대목도 나온다. 백불암 최흥원과는 서로 자식의 공부를 맡길 만큼 학문적 신뢰가 돈독했다. 대산은 최흥원에게 자신이 쓴 ‘남유록’의 초고를 보내어 검토를 맡겼으며, 공부하다 ‘위손’이라는 뜻이 막히자 해석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렇듯 대산의 훌륭한 점은 자신이 모르는 바를 남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학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에 있는 고산서원은 대산의 이러한 학문이 정립되고 후학으로 전승된 강학의 공간이었다. 이상정은 이색의 15대 손으로서 25세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이황(李滉)의 학통(學統)을 계승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는 한편, 후진(後進)양성에 전념하여 문인록에 오른 제자만도 273명이나 되었다.

지방 사림은 문경공(文景公)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0∼1781)의 이러한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789년(정조 13)에 고산서원을 건립하였다. 서원의 터는 1768년(영조 44)에 창건된 고산정사에다 지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그 이후에는 향사만 지내왔다. 1977년 고산정사와 백승각(百承閣)을 보수하고, 1984년과 1985년에 강당인 호인당(好仁堂), 묘우인 경행사(景行祠), 동재(東齋)를 중수하였다. 1985년부터 유림의 공의로 이상정의 아우인 이광정(李光靖)을 배향했다. 이후,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85년 10월 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경행사·호인당·앙지재(仰止齋)·백승각·전사청(典祀廳)·고산정사·향도문·주사 등 9동의 건물이 있다. 경행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이익공집이며, 풍판이 설치되어 있고, 공포는 겹처마로 단청이 되어 있다.

내부에는 이상정과 이광정의 위패가 있다. 호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0칸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에 명성재라는 현판이 걸린 2칸짜리 방이 있고 나머지 8칸은 마루이다. 서원 행사 때 유림의 공론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전사청은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하는 곳이고, 동재인 앙지재는 제관들이 숙소로 사용한다. 서재인 백승각에는 서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향도문은 향사 때만 집사들의 출입문으로 사용된다. 앙지재와 백승각의 양끝은 개방된 마루가 있어서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동·서쪽에 3단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뜰에는 정요대가 2기 설치되어 있다. 이 정요대는 일명 불받침대라고도 하며 서원행사 때 그 위에 관솔불을 지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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