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과 도학, 구현노력한 주세붕'
'목민과 도학, 구현노력한 주세붕'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1.10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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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주세붕과 소수서원에 대해>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 주세붕과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면서 또한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순흥은 우리나라에 유학을 최초로 받아들인 안향의 고향이다. 최근 영주시는 이 일대에 선비촌을 건립하는 등 새롭게 단장했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선비촌 안에 공자·주자·안향·주세붕·이황의 초상화를 조각해 놓았는데 공자는 유교의 조종으로서, 주자는 주자학의 태동시킨 주역으로서, 그리고 안향은 주자가 철학의 반열로 격상시킨 유학(주자학)의 도통을 우리나라에 가져온 분으로서, 주세붕은 그러한 도통의 연원을 강학할 수 있는 서원을 최초로 지은 사람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퇴계 이황을 조각해 놓은 상이었다.

소수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인물은 안향과 주세붕 그리고 안향의 후손인 안축과 안보다. 이것은 통상적인 제향방식이다. 도산서원에 이황과 함께 그의 고제 월천 조목이 배향된 것은 그가 도산서원 건립은 물론 물심양면으로 스승과 스승사후에는 가족들을 돌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수서원에 퇴계 이황이 모셔져 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알다시피 이황은 풍기군수로 재직할 당시 조정에 청원하여 소수서원이 사액서원이 될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관례로 보면 당연히 제향 되어야함에도 무슨 연유인지 그렇게 되지못했다. 아마, 당시에 지역적으로 사람을 가르는 편향된 시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늦게라도 영주시가 선비촌 안에 퇴계의 조각상을 모셔놓은 것은 어떤 연유에서든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향인물

-주세붕-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漆原)면에서 태어난 주세붕은 본관이 상주(尙州)이고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한 뒤 정자(正字)가 되고, 검열(檢閱)·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다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고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에 좌천되었다. 1541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나가 이듬해 백운동(白雲洞:順興)에 안향(安珦)의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우고, 1543년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사림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紹修書院)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리고 서원을 통하여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서원에서 유생들과 강론(講論)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 지역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하다가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의 사액을 받고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뒤 풍기사림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 건립되었다. 직제학·도승지·대사성·호조참판을 역임하고, 1551년 황해도관찰사 때 해주(海州)에 수양서원(首陽書院:文憲書院)을 세워 최충(崔冲)을 제향하였다. 재차 대사성·성균관동지사(成均館同知事)를 지내고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이르렀다. <도동곡(道東曲)〉〈육현가(六賢歌)〉〈엄연곡(儼然曲)〉<태평곡(太平曲)〉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등 단가 8수가 전한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배향되고, 백운동 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에《무릉잡고(武陵雜稿)》, 편서로는《죽계지(竹溪誌)》《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심도이훈(心圖彛訓)》 등이 있다.

주세붕에 관한 간략한 연보인데 그는 기실, 뛰어난 목민관이면서 훌륭한 학자였다. 주세붕이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주세붕은 학문이 깊어 성균관에 있으면 학생들의 훌륭한 스승이 될 것이고, 경연을 맡으면 임금을 도울 만한 인재가 될 수 있다하여 외직으로 보내지 말 것을 요청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임금은 그가 아니면 백성들의 곤궁함을 구할 수 없다고 하여 관찰사로 내 보냈고, 풍기 군수로 재직할 시는 기근 때 백성들을 잘 구휼하여 당시 어사로 있던 이황의 형 이해로부터 가장 우수한 목민관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소수서원은 1541년(중종36년) 7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이듬해 1542년 8월, 순흥 출신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를 설립했다가 1543년 8월에 사당 동쪽에 서원을 설립하고 이름을 주희가 강학한 백록동을 본 따서 백운동이라 했다. 주세붕이 소수서원을 건립하게 된 배경과 심경은 그가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에서도 드러나듯 그는 목민과 도학을 동시에 구현하려고 했다. 그는 안향의 후손인 안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부임한 후 며칠 만에 옛 순흥부에 이르렀는데 소가 울고 있는 숙수사 옛터가 있었다. 이곳은 문정공 안축이 ‘죽계별곡’을 지은 곳으로 신령한 거북 모양의 산 아래에 죽계가 있으며, 구름에 감싸인 산, 소백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 등 진실로 백록동서원이 있는 중국 여산에 못지않다. 흰 구름이 항상 골짜기에 가득하므로 감히 이름하여 백운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감회에 젖어 배회하다가 비로소 사당 건립의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도 서원 근처 바위에는 이황이 새긴 백운동이라는 글자가 있고 주세붕이 새겼다는 경(敬)자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주세붕은 이 글자를 새기면서 사묘와 서원은 비록 허물어져도 경자만은 마멸되지 않고 천년 후에라도 경석이라고 불리리라고 하였는데 아직까지 건재한 것으로 보아 그의 예견은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한편 주세붕은 죽계사와 도동곡을 지어 배향된 선현을 제사 지낼 때 노래 부르게 했다. 죽계사 3장은 안향의 신위 앞에서 분향하고 불렀는데 그 내용은 서원의 풍광과 안향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안향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전래하고 섬학전을 마련한 공이 있기 때문에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주세붕은 안향에 대한 세간의 이러한 저평가를 뛰어넘어 그를 우리나라 도학의 조종으로 받들려는 복심을 갖고 있었다. 즉 안향이 성리학을 이색과 정몽주에게 전수하는 등 도통의 연원이 안향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렇듯 주세붕은 당초 서원 설립의 목적은 안향을 배향함으로써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갖게 된 것이고 이것은 곧, 성리학적 교화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주세붕의 이러한 생각과 시각은 대다수 풍기사림들이 서원설립에 반대하는데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밀고 나간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곳 사림들은 안향이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데다 향교가 있고 기근이 심하며 성현을 배우는 것은 그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주세붕의 서원론을 불필요한 교육기관이라며 배격했다. 그러나 그는 도덕적 질서 없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보았다. 때문에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오늘날의 소수서원이 있게 했다.

-안향-

본관 순흥(順興). 초명 유(裕).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향이었으므로, 이를 피하여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시호 문성(文成). 우리나라에 주자성리학을 처음 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원종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옮기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어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다. 1275년(충렬왕 원년)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어 외방으로 나갔을 때에는 미신타파에 힘썼다.

안향이 황폐한 문묘(공자묘)를 보고 울적한 마음이 들어 읊어다는 시는 그의 정신적 연원을 밝혀주기에 충분하다. “곳곳마다 향등을 올려 부처에게 복을 빌고 집집마다 북소리 다투어 푸닥거리네. 오직 몇 칸 공자 사당은 온 뜰엔 가을 풀뿐, 사람 없어 적막해라.”

이 시에서 보여주듯 안향은 은연중에 무속을 배척함으로써 이 땅을 다시 새롭게 발전시키고 사람들을 교화하고자 했다. 그는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이를 내세워 고려문화를 혁신하려고 한 제1세대였다. 이후 판도좌랑(版圖佐郞)을 거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고 독로화(禿魯花-토루카)로 선발되었다. 또 국자사업(國子司業)을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랐는데 이 해에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이 되었다가 낭중(郎中)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곧 고려의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다.

1289년(충렬왕 15)에는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는데 조선후기의 각종 기록에는 이때 원의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교육의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국학(國學)의 대성전(大成殿)을 낙성하였으며, 그리고 10년 뒤인 1298년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는데 그때 그곳의 학관이 고려에도 문묘가 있느냐고 물어 중국과 똑 같은 공자의 사당이 있다고 대답하자 크게 경탄하여 안향을 일컬어 동방의 주자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303년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의 초상화와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사(諸子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1304년(충렬왕 30)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고 1306년(충렬왕 32) 9월 12일에 죽었다.

죽은 뒤인 1318년(충숙왕 5)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안축과 안보-

안축과 안보가 배향된 것은 안향과 가까운 집안이었기 때문이지 유학과는 큰 관계가 없다. 안축(1287~1348)의 호는 근재이며 고려 충숙왕 때 벼슬하여 우문관제학, 감춘추관사에 이르렀다. 경기체가로 된 ‘관동별곡’‘죽계별곡’을 남겨 무낭가로 이름이 높았다. 안축은 국문학사에서 많이 연구되는 인물이다. 안보(1302~1357)는 안축의 아우로 충숙왕 때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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