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이군 도리를 다한 손홍량'
'불사이군 도리를 다한 손홍량'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1.1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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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손홍량과 타양서원>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4)]

3. 손홍량과 타양서원

정평공 가계에 대해서는 영조 15년, 곡강 배행검이 지은 정평공 1)유사가 있다. 그곳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선생의 본성은 순(洵)이었으나 현종의 이름과 같아 그의 5대조 응(凝)대에 손이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원래 복주의 타양현(현재 일직면과 주위의 몇 개면이 합쳐진 지명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사람이며 시조 간(幹)이 신라왕을 모시고 일직군에 행차하니 비로소 관을 일직으로 했다. 증조부의 이름은 상의직의직장동정의 벼슬을 지낸 세경(世卿)이고, 조부는 중현대부전객령을 지낸 연(衍)이다. 봉익대부밀직부사상호군 송(松)의 따님인 안동 조(曺)씨와 합문지후 벼슬을 지낸 아버지 방(滂)사이에서 1287년(충렬왕 13년) 안동 일직에서 태어났다.

과거를 1307년에 급제한 것으로 보아 첫 관직은 충렬왕 서거 2년 전인 재위 33년에 19세의 나이로 시작했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영조 때 배행검이 지은 정평공유사에 충선왕 때 관직에 진출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이색의 사장시와 조선조의 박팽년이 정평공의 손자 손조서(孫肇瑞)의 말을 인용한 진권서에도 5조(다섯 임금)을 모셨다고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정작 어느 것이 맞는지 헷갈린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계산을 해 보아도 여섯 임금이 아니라 다섯 임금을 모신 결과가 된다. 기록자들의 부주의인지 과거급제 날짜를 잘못 기록했는지 여하튼 바로 잡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선생의 벼슬길은 비교적 순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충목왕 4년(1348년)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고, 이때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이듬해인 충정왕 즉위 원년(1349년)에는 추성보절좌리공신(推誠保節佐理功臣)이 되고, 이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으며, 삼사의 으뜸 벼슬인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이듬해 복주부원군(福州府院君)에 책봉되는 등 치사(65세)로 벼슬길에서 물러날 때까지 요직을 두루 거치며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왕 등 여섯 임금을 섬겼다. 이후, 공민왕 13년(1362년) 그의 나이 76세(박팽년의 진권서에는 78세로 기록되어 있다) 되던 해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을 오니 이 일은 손홍량 가계는 물론, 안동 전체가 정치 역사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의 안동 몽진과 손홍량 가계의 급부상

손홍량이 환도 후 공민왕에게 받은 궤장과 초상화, 그리고 중앙정계의 문인들이 그에게 바친 사장시는 공민왕의 안동 몽진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일련의 안동위상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손홍량 가계의 급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손홍량은 몽진 이듬해 두 아들과 함께 난을 평정한 하례를 올리기 위해 왕성을 찾아갔다. 이때 공민왕을 비롯한 중앙정계의 환대는 실로 파격이었다. 왕은 구절산호용장이라는 지팡이와 손수그린 초상화를 하사했다. 왕실이 손홍량에게 보인 이 때의 호의는 고금의 전례에 비추어도 드문 일이었다. 현재 전해지는 사장시 5편과 백문보의 시서는 당시의 이러한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꼼꼼히 살피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역사적 기록에 나타난 왕실과 중앙정계의 손홍량에 대한 환대는 단 하나의 사실, 즉, 몽진 시, 영접에 대한 화답의 성격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영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다. 왕이 홍건적을 피해 남하를 하는 과정은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 정, 모든 고을이 예를 갖추어 왕을 맞이했다는 것은 상식의 수준이다. 그런데도 기록은 오직 공민왕이 손홍량에게 말했다는 “그대는 나이가 들어도 일직한 사람이로다.”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쏠려 있다. 외형적 역사는 오직 이 부분에만 포인트(점수)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을 그렇게 단순하게 이해하면 날줄과 씨줄 속에 묘연하게 감춰진 역사적 행간을 상상력으로 불러올 수가 없다. 손홍량의 공민왕 영접으로 대변되는 상징은 충절의 또 다른 강렬한 표현 방식일 뿐이다. 그 속에 숨겨진 사실은 손홍량으로 대표되는 안동 인물들의 목숨을 건 헌신일 것이다. 가령, 손홍량은 공민왕이 안동에 머무는 동안 홍건적을 물리치고 왕성을 회복하는 데에 모종의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군사를 모으고, 인심을 다독이며, 전략을 세우는 등 정세운을 총관으로 반격을 도모할 때의 전과가 어쩌면 영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공민왕에게 크게 어필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러한 신뢰의 중심에 손홍량이 있다고 보는 것이 이후, 대도호부로 격상되는 안동의 위상과 손홍량 가계의 급부상을 설명하는데 오히려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은 초상화에 관한 것이다. 여러 기록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손홍량의 초상화를 공민왕이 그렸다는 주장이 유력하나 그것을 언제 어떻게 그렸느냐 하는 문제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생각들이 나올 수가 있을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대통령 훈장을 넘어서는 명예를 임금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하여 환영축하연에서 축시를 유명 인사들이 지어 바쳤는데 그 글속에는 하사 받은 지팡이 이야기만 나오고 초상화에 대한 언급은 없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조선 세종조에 그의 손자 손조서가 궤장에 관한 사장시는 보존되었으나 초상화에 관한 축하시는 유실되어 안타깝다는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건대, 손홍량이 귀향할 때 지팡이와 초상화를 함께 선물 받은 것이 아니라, 초상화는 뒷날에 왕이 직접 그려 사람을 통해 전달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왜냐하면 전해오는 시서와 사장시가 6편(백문보,이인복, 이색,정사도,이달충,김제민)있는데 어디에도 초상화 이야기를 노래한 이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실된 초상화 관련 사장시란 뒷날의 일이어서 전해오는 사장시와는 내용이 별개라고 보면 크게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안동 정신의 도도한 맥을 이은
상촌 김자수와 백죽당 배상지의 충절


홍건적의 난이 평정된 후, 송홍량 가계의 급부상은 관직의 순조로움으로 이어졌다. 손홍량의 외손인 상촌 김자수는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고, 다른 외손들인 백중당 배상지(판사복시사), 배상도(보문각직제학), 배상경(공민왕조 문과), 배상공(공조전서), 아들인 득수(밀직사좌대언지삼사), 득령이 전공판서겸진현관대제학에 오르는 등 가문의 번창이 날로 더해갔다.

그러나 가문의 번창과 반비례하여 불어오는 역풍(역성혁명의 기운)은 손홍량 가문에는 선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흐름으로 전개된다. 역성혁명의 동조와 절의라는 대의명분 사이에서 손홍량 가문은 일제히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선택을 한다. 아들, 사위, 손자 등이 모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함으로써 유교에서 강조하는 군신간의 의리를 끝까지 지킨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급격한 사회변동 과정에서 시류에 흔들리지 않았던 안동정신의 이어짐과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새롭게 조명할 가치가 충분한 역사적 사실을 안동이 또 하나 보유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점은 다 시 한번 강조하지만, 안동의 정신사 측면에서는 비중 있는 무게로 다뤄져야 한다. 삼태사에서 시작된 안동정신이 퇴계로 이어지는 가교(架橋)에 손홍량 가문이 있는 것이다. 이는 안동정신이 중간에 공백 없이 늘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태평할 때는 효하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목숨마저도 버릴 수 있음이 안동정신을 상징한다면 손홍량 가문은 유교정신에 입각하여 불사이군의 도리를 다함으로써 안동정신을 만천하에 드러냈다고 할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 상촌 김자수는 이미 고려조에 이름난 효자로 알려져 공양왕 때 고려도관찰사 김자수마을이라고 쓴 효자비가 남문 밖, 그러니까 현재의 위치로 보면 안동시 안기동에 세워졌다. 이후 고려가 망하자 상촌은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안동으로 내려와 남문 밖에서 은거했다. 이때 태종 이방원이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차례 출사할 것을 제의했으나 매번 거절하였다. 이에 노한 태종이 다시 형조판서를 제수하며 만일, 응하지 않으면 삼족을 멸하겠다고 위협하자 아들 근(根)을 데리고 고려에 대한 마지막 충절을 지키려는 발걸음을 옮겼다. 정몽주의 묘소가 있는 추령(경기도 광주)에 다다르자 말에서 내린 상촌은 “평생 충효의 뜻 금일에 누가 있어 알리요. 한 번 죽어 원한의 눈 감으면 저승에서라도 알아 줄 이 있으리” 라는 절명시 한 수를 남기고 가슴에 품고 온 독약을 꺼내어 한 많은 세상과 하직한다. 이러한 충절로 두문동 72현으로 추앙받기도 하는 선생은 이 때문에 산소가 안동이 아닌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에 있다. 유허비와 효자 정려각, 그리고 선생을 제향하고 있는 추원재는 안동시 안기동에 있다.

안동시 송천동에 있는 금역당은 백죽당의 고택(종택)이다. 고려가 망하자 동생 배상공과 함께 외가가 있는 안동으로 왔다. 이 때문에 안동에 있는 흥해배씨들은 모두 백죽당과 배상공의 후손들이다. 백죽당은 굴공의 고사에 따라 조정에서 모자를 벗고 옷소매를 떨쳐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로 백죽(소나무와 대나무)을 심고 그 가운데 집을 지었으며, 시주(詩酒)를 벗 삼아 홀로 늙어갔다. 본조(本朝)에서 끝까지 지조를 더럽히지 않아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역시 두문동 72현으로 존숭받고 있으며 사림은 그의 지조를 기리고 뜻을 받들기 위해 선조1년(1568) 서후면 금계리에 경관서원을 세우고 선생을 배향했다. 손홍량이 안동정신사에서 갖는 비중이란 그의 가문과 혼인관계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많은 연비관계의 사람들에까지도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유교적 행위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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