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 안동고을 지킨 제방사업!
400년 전 안동고을 지킨 제방사업!
  • 김용준 기자
  • 승인 2015.04.13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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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애향애민 운동, 새마을운동 실천적 원형이자 맹아'
[기자수첩] 김용준(경북인뉴스 본부장)

조선시대 안동지역 향토지인『영가지(1606년)』의 ‘영호루’ 대목과『안동부읍지(1899년)』의 ‘비문’ 대목에 따르면 조선중기 이후에 큰 홍수로 개목둑과 솔목둑이 무너져 부성(府城)이 물에 잠기고 가옥이 떠내려가는 참혹한 물난리가 여러 차례 발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수해를 겪은 후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제방을 다시 쌓는 전후 과정을 비문에 새겨 놓아 당시의 내력을 대략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1983년 발간된『안동향토지』는 이에 대한 내용을 잘 압축시켜 해설을 해 놨다.

이 기록에 의하면 ‘옛날 안동부에 두 군데의 큰 제방(堤防)이 있었으니 곧 개목둑(浦項堤)과 솔목둑(松項堤)이다. 개목둑은 법흥동 임청각 앞에서 지금 철도 쪽을 따라 내려뻗은 강둑 이름이요, 솔목둑은 영양 청송 두 고을 물을 모두 받아 거두어 유정 백여리의 반변천이 낙동강 원류에 합쳐지는 대목으로 부의 동쪽 10리쯤이라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겨우 7년만인 선조 38년(1605, 을사) 칠월 대홍수로 두 제방이 무너졌다, 부사 김륵이 이 고을의 부노(父老)와 대책을 의논, 본도 관찰사 류영순이 경상좌도 14고을의 민정(民丁)을 징발 제방 복구공사를 했으니 그 사유는 안동은 경상도의 거진 일 뿐더러 영남의 뿌리여서 안동의 흉폐가 곧 영남의 안위에 관계되기 때문이라 했다. 그해 농사가 끝난 10월에 착공, 그 이듬해 농사일로 중지했다가 그해 가을에 준공했다. 이런 큰 공사가 끝난 선조 39년에 위의 내용을 권태일이 서술해 개목둑비(浦項堤碑)를 세웠다.

또한 정조1년(1777, 정유)에, 선조 38년 을사년 홍수로부터 170년 만인 이 해에는 앞서 을사 홍수보다 더 극심한 수해로 환난을 입었는데 부사 김상묵이 이듬해인 정소 2년 봄 연인원 18만명의 힘을 모아 수개월 만에 준공했다. 삼년 후인 정조 4년 구월에 비문을 이상경이 지어 위 내용의 솔목둑비(松項堤碑)를 세웠다.

송제사적비와 어방사적비에는 당시 제방축조에 관련한 인물과 직책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벼슬과 관직을 살펴보면 현감은 비교적 작은 현의 우두머리로 종6품이며, 영장은 진영장(鎭營將)을 가리켜 이르는 말로 총융청, 수어청, 진무영과 각 도의 병영 및 수영에 소속된 벼슬로 해당고을의 부사나 목사가 정한다. 도감은 나라에서 큰 일판을 벌일 때 임시로 설치하는 관청이다. 감관은 관청이나 궁방에서 돈이나 곡식을 거두고 내주는 일을 맡은 벼슬아치이며 천총과 별장은 무관 벼슬 또는 산성, 나루, 포구, 작은 섬, 부루 등을 지키는 일을 맡은 무관벼슬이 이에 속한다고 했다.

초관은 군영에 소속된 벼슬이며 군사편제의 하나인 초를 거느리는 우두머리이다. 한 초는 약 100명 정도이다. 도감 유학은 따라서 벼슬아치가 아니고 제방공사 감독을 맡은 사람이다. 도색, 도검은 공사 등을 할 때 도감 아래 직책 일종의 유사로 볼 수 있다. 벼슬아치는 아니지만 제방공사 당시 자발적으로 막대한 재정을 담당한 지역 부호로 보인다. 따라서 현감, 감관은 지역 행정직 문관관직, 영장, 천총, 초관은 군대소속 무관관직, 도감유학은 공사감독관, 도색, 도검은 공사에 필요한 재정을 담당한 지역 민간인으로 군·관·민이 제방공사에 합심해 참여했다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현대에 들어 안동지역 큰 규모의 제방사업은 낙동강건설사업소가 1978~1979년에 걸쳐 49억6천만원의 예산을 투입, 안동관내 낙동강 유역 본류 좌·우편 합쳐서 14곳 (水上堤. 玉洞堤, 水下堤, 湖岩堤, 幕谷濟, 桂坪堤, 丹湖堤, 水洞堤, 下里堤, 下阿堤, 中里堤, 河回堤, 豊川堤) 3만4283미터에 걸쳐 제방을 완벽하게 축조하게 된다.

조선시대 중기이후 두 제방을 통한 치수사업은 농업을 근본으로 삼았던 만큼 곧 관개(灌漑)사업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하나의 고을이 협동하는 생활을 통해 자립과 방위를 실천해 온 것은 우리나라의 오래된 전통유산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다시 근대를 넘던 시기인 1970년대 새마을운동 또한 지역사회의 전통적 협동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보여 진다.

1970년과 1971년에 걸쳐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전 국민의 협동정신과 단결심, 그리고 자조정신을 북돋우자는 것이다’고 거듭 제창했다. 이는 곧 우리민족 고유의 미풍양속인 향약·두레·계·품앗이 등의 협동과 단결, 근면과 자조의 정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자는 것이기도 했다.

▲김용준 (경북인뉴스 본부장)
2011년「새마을운동조직 육성법」개정을 통해 ‘새마을의 날(4월 22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했다. 저개발국가의 발전모델로 선정돼 2010년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 103개 나라 5만여 명이 교육을 받고 있다. 정치적 의미를 뛰어넘어 이제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 대한민국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한 정신적인 힘이요, 조국근대화 정신의 소산인 것만은 사실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백여 년 전, 안동의 낙동강·반반천 제방사업과 관련한 어방사적비와 송제사적비의 기록은 조선판 안동인들의 애향애민의 기초정신으로 해석될 수 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주창한 대표적 국민계몽운동인 새마을운동의 실천적 원형이자 맹아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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