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학봉 임란기념관 ‘임란역사기록관’으로 전면수정 돼야
서애·학봉 임란기념관 ‘임란역사기록관’으로 전면수정 돼야
  • 김희철 (경북인뉴스 편집위원)
  • 승인 2015.04.21 18: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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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인물에서 벗어나 역사적 반성 담은 포괄적 기록관 필요

세상물정이라고는 모르는 순진한 ‘촌놈’이 대학에 입학하던 날. 책 장사꾼의 감언에 속아 『세계대백과사전』, 『세계고전문학전집』, 『사상 철학전집』 등 거액의 도서를 구입했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늦었고 넉넉잖은 형편이라 가득 꽂힌 책들을 보며 망연자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학교 다니는 동안 문학, 사상집이나 역사서 등 애물단지 서적들을 하나 둘 꺼내 읽으면서 그 깊이와 방대함에 놀라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던 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을 접하게 된 것도 이즈음인데 무심코 꺼내 읽은 징비록의 충격은 지금도 아려온다.

국난시기 한 나라의 재상으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진 과정과 당시 백성들의 피폐함을 보면서 나라가 힘이 없을 때 어떤 상황이 도래하는지 여실히 보여주었고,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데 충실하면서도 생생한 현장을 묘사해 내는 문학적 역량과 속도감 있는 전개, 그리고 사관의 냉철한 시각과 예술가의 감성을 동시에 구사하는 간결하면서도 탁월한 문체에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 TV에 방영되는 드라마 ‘징비록’을 보면 그때 느낌이 되살아나는 듯 감회가 새롭다. 서애 선생은 나라를 지키는 일 만큼은 모든 사심을 버리고 어떠한 정파와도 대화하며 공평함을 추구했다. 그는 공인으로서의 자세와 학문적 깊이, 사람에 대한 이해와 포용심으로 이순신을 천거했고 선조를 견인해 내는 한편 명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 퇴계선생 아래 함께 공부했던 학봉 김성일 또한 굴하지 않는 기개와 충성심으로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백성을 안정시키고 백의종군하여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지금 안동에서는 이 두 분을 기리기 위한 임란기념관 건립을 둘러싸고 논란이 심각하다. 여론이 첨예하게 엇갈리자 일부에서는 임란기념관이 아니라 ‘내란기념관?’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서애, 학봉 기념관에 각 100억 원씩 모두 200억 원의 적잖은 예산이 소요되는 ‘임란기념관’ 논란. 그러나 이 뜻 깊은 사업을 풀어가는 모양새가 마치 눈앞에 주먹 대 놓은 양 답답하게 흘러가고 있다.

문중에서는 두 분을 기리기 위해 국도비가 지원되는데 이를 두고 왈가왈부 하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서애문중의 경우 서애의 유물을 보관 전시한 하회마을 영모각이 40년이 넘어 늘어나는 방문객을 감당하지 못해 기념관 건립이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시의회를 비롯한 일각에서는 막대한 시민 혈세를 특정 문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맞서고 있다. 게다가 동일한 내용으로 두 인물의 기념관을 각각 따로 건립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임란기념관 논란이 2년 넘게 계속되는 동안 민심은 갈라지고 갈등의 골은 점차 깊어가고 있다. 안동시의회는 시민들의 반대 여론을 의식해 지난해 임란관련 추경예산 4억2천만원 전액을 삭감했으나 올 2월 안동시에서 일방적으로 설계 사업을 집행하다 시의회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다시 중단되는 사태가 빚어지는가 하면 양 문중 관계자 50여명이 시장실로 찾아가 운영비를 문중이 부담하겠다고 작성한 바 있는 업무협약서가 당시 성급하게 이루어졌다며 협약서 내용을 부정하고 200억원 중 시비 50억을 빼더라도 나머지 금액을 집행하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내홍을 겪으면서 사업에 대한 명분은 이미 퇴색되고 말았다. 특정 인물과 문중을 위한 사업이란 지적이 일자 최근 안동시는 ‘서애 학봉 임란역사기념관’이란 이름을 ‘임란역사공원’으로 이것을 또다시 ‘임란역사 문화공원’으로 바꾸면서 특정 문중사업이 아니라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원이라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시 집행부의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본질적 내용은 바뀌지 않은 채 이름만 바꾸는 꼼수를 부리고 있는게 아니냐는 비판을 불러오는데다 두 문중 역시 조상의 업적을 기리고 명예를 드높이고자 했던 사업이 명분이 약해지면서 오히려 조상에 누를 끼치는 결과가 되지 않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서애, 학봉은 문중인물이기 이전에 나라의 위인으로서 정부에서 역사 기록을 보호하고 업적을 기려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특정 문중을 위하는 접근보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임란 당시 북인들의 활약상은 잘 알려진 편이나 영남 남인은 그 활동이 매우 컸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안동만 하더라도 상주까지 진격해 왜군의 보급로 차단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의병대장 근시재 김해, 기봉 류복기와 다섯아들, 동생 류복립, 그리고 김용, 배용길, 이홍인, 이정박 등 안동 향병은 그 성세가 곽재우 의진과 비슷한 것으로 보고될 정도였다. 특히 서애, 학봉과 같이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로 좌의정을 지낸바 있는 약포 정탁선생의 경우 왕을 수행하는 주요업무 외에도 절체절명의 이순신을 구명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임란이 끝나는 순간까지 뛰어난 지략으로 위기를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 당시 이순신에게 龜甲船(거북선)설계도를 전달한 인물로 주목받고 있는 간재 이덕홍, 의병장을 맡아 크게 활약했던 만취당 김사원과 그 일가, 백암 김륵, 우복 정경세, 퇴계 문하는 아니지만 대구 팔공산 현풍지역을 주로 활동했던 망우당 곽재우, 상주출신 충의공 정기룡 등 경북에는 임란인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국난시기 이름 없는 민초들의 활약은 또 얼마나 컸을까.

논어에 공자는 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리에 어긋나고 순리에 어긋나면 곧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 고 하고 정사를 맡을 기회가 되면 가장 먼저 必也正名乎 “반드시 명분을 바로 잡겠다”고 했으며 북송의 사마광은 政者正也 “정치는 공정해야한다”고 했다. 정사가 편협하면 공정성을 잃고 공정하지 못하면 명분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새긴다면 임란기념관 건립이 성사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임진왜란은 징비록에 고스란히 담겨있듯 우리민족이 다시는 겪지 말아야할 가슴 아픈 역사이다. 이름만 임란역사문화공원으로 바꿀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시민과 도민들에게 역사적 반성과 귀감이 될 수 있는 역사관으로 재창조 되어야 한다. 그래서 두건의 예산을 한데모아 서애관, 학봉관, 약포관, 곽재우, 정기룡관을 비롯해 향민들의 임란 활동을 종합적으로 담아낸다면 사업의 명분을 얻게 될 것이며 문중으로서도 실리와 명분을 모두 얻을 수 있을 뿐더러 선조들이 후대에 역사를 제대로 평가받는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더욱이 안동으로 도청이 이전되는 시기에 맞추어 건립된다면 그 취지는 더욱 빛을 발할 것이 아닌가.

▲김희철 (경북인신문 편집위원)
서애, 학봉 임란기념관은 이제 논란을 종식하고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다. 따라서 필자는 지역의 임란 인물들을 포괄하고 향민들의 활동을 모아 ‘안동 임란역사기록관’이나 ‘경상북도 임란역사기록관’으로 전면적으로 재창조 되기를 바란다. 징비록(懲毖錄) 집필이 끝나고 생을 마칠 때 까지 어느 누구도 만나기를 거부했던 서애 류성룡 선생의 뼈에 사무친 그 뜻을 조금이라도 기린다면 치적 중심이 아니라 통렬한 반성 중심으로 내용구성을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대비하는 역사기록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서애선생을 면목없게 하지 않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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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2015-07-02 10:15:42
지역에 이런 언로가 있고 필진이 있다는게 자랑스럽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