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행 높았으나 평생 자유로운 사람'
'학행 높았으나 평생 자유로운 사람'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5.1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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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송암 권호문과 청성서원(靑城書院)>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 9]

1.청성서원

청성서원은 조선중기 명종 때의 학자인 송암 권호문의 위패가 배향된 서원이다. 위치는 안동시 서후면 솟밤다리에서 송야천을 따라 좌회전하여 가다보면 청성산 동쪽 기슭에 동향으로 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1608년(선조 41) 사림의 발의로 연어헌지에 창건되었고 위패는 광해군 4년인 1612년에 안치되었다. 이후 영조 43년(1767)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로 옮겨지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1909년 도내 유림들의 뜻에 따라 옛터에 복원하였다. 강당, 동서재, 정도문, 청풍사, 전사청, 신문 등 모두 7동의 건물이 배치되어있다. 매년 2월과 8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특히 이곳은 안동의 역사 지리서인『영가지』를 갈무리 한 장소이기도 하다. 1791년에는 귀와 김굉이 서원의 원장이 되어 향중의 여러 선비들을 초청하여 영가지를 교정하고 한 부를 정서하여 청성서원에 보관했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다.

2.송암 권호문

송암 권호문(1532∼1587)의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자는 장중(章仲)이며 호는 송암이다. 안주교수(安州敎授) 권규(淚)의 아들이다. 퇴계의 문인으로 156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이어 부모를 여의자 관계(官界) 진출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 기슭에 연어대(鳶魚臺)를 짓고 유유자적하였다. 이황의 문인으로 동료들인 류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등과 교유하여 학행(學行)을 높이 평가받았다. 벼슬길에 마음을 접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여 만년에 덕망과 학문이 높아져 유학자로서 이름을 휘날렸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ㆍ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퇴계 사후에는 퇴계의 문집을 교정하고, 퇴계가 편집한 이학통록(理學通錄)을 교정하여 간행하고 발문을 지었다. 또한 퇴계를 배향하기 위한 여강서원(현 호계서원)을 세우는 일에도 적극 나서 여강서원 상량문을 짓기도 하였다.

평생 자연에 묻혀 살았는데, 이황은 그를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벗 유성룡은 사후 그를 기리며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이니, 외로운 마을 지나는 나그네 슬퍼지네. 일생의 일을 평론하면 백세의 스승이라 할 만하네. 시린 구름 빛 아득한데 늙은 나뭇가지 쓸쓸하여 슬픔을 자아내네. 옛 벗의 뜰엔 가을 풀만 무성하네.”라 시를 지어 그를 백세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평하였다. 56세로 일생을 마쳤으며, 묘지는 안동부 서쪽 마감산(麻甘山)에 있다.

작품으로는 경기체가의 변형 형식인 <독락팔곡(獨樂八曲)>과 연시조인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이 <송암집>에 전한다. 이 송암집은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의 시문들을 총6책으로 엮어 1680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외, 관련문서로 청성서원 강안(靑城書院講案)과 청성서원향음례일록(靑城書院鄕飮禮日錄),청성서원가속노비안(靑城書院假屬奴婢案)이 전한다. 「강안(講案)」에는 청성서원(靑城書院) 구성원들의 명단이 생년, 호와 함께 실려 있는데, 모두 152명에 이른다. 그리고 맨 뒤에는 제문이 실려 있다. 청성서원향음례일록에는 먼저 향음례가 임진왜란 이후에 끊어진지 오래되어 다시 행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으며, 향음례가 행해지는 4일간의 일정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다. 청성서원가속노비안는 무오년 8월로 작성 시점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서원의 가속과 노비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3.송암의 문학으로 본 의식세계

송암은 우리나라 국문학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독락팔곡(獨樂八曲)이라 제(題)한 1연의 노래 8수는 고려 경기체가를 계승한 것으로, 국문학사상 주목된다. 특히 우리말을 많이 구사하여 경기체가 발전에 형식상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내용도 당시의 한학적(漢學的)ㆍ도학적(道學的)인 통속적 틀에서 벗어나 자연의 풍광을 노래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송암의 자세는 독락팔곡>이라 제(題)한 일년의 노래 8수는 고려 경기체가를 계승한 것으로, 국문학사상 주목된다.

우리말을 보다 많이 섞은 보람으로, 경기체가 발전에 형식상 많은 변질을 가져왔다. 내용도 그때 흔한 한학적(漢學的)ㆍ도학적(道學的)인 것보다는 스스로 전원적인 것을 쓰려고 애쓴 흔적이 많이 보인다. 이런 태도는 그의 생애에 벼슬자리에 있지 아니했다는 긍지에서 빚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생애에 벼슬자리에 있지 아니했다는 긍지에서 빚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의식의 세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약포 정탁이 글을 보내어 벼슬하여 다스리는 일에 마음을 둘 것을 청하였으나 송암이 독락팔곡(獨樂八曲)을 지어 사절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강호고사라고 칭할 수 있다.

권호문은 난세에 초야에 묻혀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덕을 닦으며 후학을 지도하는 한편, 산수를 사랑하면서 안자(顔子)의 삶을 본받아 안빈낙도하면서 벼슬의 유혹을 물리치고 깨끗한 삶을 살았다. 그는 남명 조식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은거하여 뜻을 구하여 뜻을 이루었고, 참된 즐거움 온전히 누리며 일생을 보냈네. 당세의 선비로서 우러를 뿐만이 아니리니 천길 높은 산 저절로 가파르고 우뚝하네.”

대표적 작품으로는 경기체가의 변형 형식인 「독락팔곡(獨樂八曲)」과 연시조인 「한거십팔곡 (閑居十八曲)」이 있다. 그 외에 송암은 1700여 수에 이르는 한시를 남겼다. 그의 한시는 다양한 시 세계를 보여주는 데, 후학을 위한 권학시에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공부에서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책에 집착하지 말고 일상생활 모두에서 마음 닦는 자세를 잃지 말라고 하고 있다. 나아가 명리의 길을 버리고 초야에 은거하며 덕을 닦아 백세의 스승이 되는 일이 바람직한 일이라는 처사의 삶의 자세를 강조하였다.

그의 유유자적한 처사적 삶에는 전현의 삶이 모범이 되었다. 그는 초야에 묻혀 절개를 지키며 유유자적하게 은자의 삶을 누린 도연명 등의 삶을 시속에 표현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그는 바람직한 성리학적 삶에 대해서도 퇴계와 남명을 들어 기리고 있다.

동시에 성리학적 세계관을 글로 피력하였는데 관물당을 짓고 쓴 기문인「관물당기(觀物堂記)」에는 이치가 천지를 낳았고, 천지가 만물을 낳았고, 그 천리가 우리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 천리가 우주와 인간 본성을 관통하여 있다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권호문은 유달리 산수를 사랑하여 수없이 많은 산수시를 남기고 있다. 그의 유유자적 한 삶은 독락팔곡과 한거십팔곡에도 잘 드러나 있거니와 한시에서도 그는 한가로이 지내면서 스스로 즐거워하는 삶을 그리는 수많은 시들을 남겼다.

그의 학문의 바탕은 성리학이었고, 교유도 퇴계 문하의 동문들이었으나, 그는 성리학적 세계관, 도덕 의식을 삶의 저변에 지니면서도 그 일반적인 경계를 벗어난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문집으로 『송암집(松巖集)』이 있다.

그는 또한 시조도 지었다. 역시 일련(一聯)으로 된 연시조로 18수인데 제(題)하여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이라 하였다. 그의 생활 태도가 엿보인다. 16세기 시조의 두드러진 사조(思潮)로 세전(世傳) 노래의 시조화(時調化), 유교 이념의 시조작(時調作), 그리고 자연과 태평(太平)을 구가하는 내용을 가진 시조의 연작(連作) 현상 등을 볼 수 있는데, 권호문은 특히 이 나중 특성의 사조 속에 존재하고 있는 시조인이다.

‘독락(獨樂: 혼자 즐기다)’ㆍ‘한거(閑居: 한가롭게 지내다)’, 이런 상(想)이 그의 시정신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있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노래라 하는 것은 흔히 시름(憂思)에서 나오는 것이라 했듯이 내 노래 또한 한 불평에서 나온 것이겠다’라고 <독락팔곡> 서문에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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