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 불경, 언해에 많은 공적 쌓다'
'불사 불경, 언해에 많은 공적 쌓다'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5.1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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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애련사와 학조대사>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 10]

애련사와 학조대사

애련사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자품리 학가산(鶴駕山)에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본래 자품리에 있는 광흥사(廣興寺)의 말사였으나 현재는 아니다. 자세한 연혁이 전하지 않고, 특별한 유물도 남아 있지 않으며 절집의 외양 또한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래서인지 현재 소속 종단이 없는 사찰로 누가 언제 창건하였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다만, 1799년(조선 정조 23) 편찬된《범우고(梵宇攷》에 사찰 이름이 나오고 세조의 국사를 지낸 학조대사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범우고》에는 사찰 이름이 예련사(刈蓮寺)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조대왕 때 편찬된 범우고에 예련사가 기록되어 있고 학조대사가 활동한 시기가 세조~연산군의 치세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애련사의 창건은 아마 조선 초나 중기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학조대사와 관련된 기록은 극단(두 얼굴)을 오가고 있다. 때문에 당시 사회분위기와 국가운영의 기틀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석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두 얼굴이란 고승과 학승이란 평가 뒤에 따라다니는 요승의 이미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평가를 받고 있는 연유를 파고들 필요가 있다.

조선은 개국을 하면서 불교적 색채가 강한 고려의 잔재를 털어내고 새로운 이상국가의 모델로 유교를 선택한다. 조선의 이어짐이란 어떤 측면에선 개국의 철학적 행정적 기틀을 잡은 삼봉 정도전의 이상적 국가관이 천천히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급속도로 천착되어 간 시간들이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 만큼 삼봉의 철학은 조선 천지 곳곳을 숨 쉬게 하는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학조선사가 활동했던 조선 초중기는 유교국가 조선이 겨우 불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특히 세조 시대는 국왕 자신의 불교에 대한 이해 덕분에 활동의 공간이 존재했을 뿐, 층층시하로 배불의 경향은 그 힘을 배가시켜가고 있는 시기였다. 관직을 수행하는 관리가 유교경전을 공부하여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주자학이 절정을 구가하지는 않았지만 정상을 향해 발돋음 하고 있는 개화직전의 시기였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국왕 자신의 불교에 대한 이해란 말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세조가 불교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신적 구조, 아니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정치 환경을 배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죽음으로 몰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업보를 불교를 통해 그 죄업을 씻으려고 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과 고민은 국가 통치이념인 유교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이러한 환경과 여건 위에서 학조대사를 이해하여야만 온전한 인물과의 대면이 가능할 수 있다. 학조대사가 어떤 경로로 세조의 국사가 될 수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전례를 살펴보았을 때 한나라의 국사(임금의 스승)란 최고의 경륜과 지성, 덕망을 구비하고 있지 않으면 오를 수 없는 자리다. 보조국사 지눌, 여말의 도선대사, 선초 태조 이성계의 국사였던 무학대사, 승병을 지휘하며 임란을 평정했던 선조시대의 서산대사의 예를 보더라도 불교계의 존숭과 일반의 존경 없이는 임금의 스승이 될 수가 없었다. 학조대사는 세조의 국사가 된 이후 왕위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꾸준하게 왕실과의 관계를 유지했던 곳으로 보인다.

1467년 세조의 명으로 금강산 유점사를 중창하고, 1487년(성종18) 정희왕후의 뜻을 받들어 해인사《대장경》판당을 중창하였다. 이때 해인사의 중창은 오늘날 해인사 모습의 바탕이 되는 중요한 불사였다. 1500년(연산군 6) 신비(愼妃)의 명으로 해인사《대장경》3부를 간인하고 그 발문을 지었다.《남명집》을 언해하고 1520년(중종 15) 다시 해인사《대장경》1부를 간인하였다. 이외에도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보물 제114호,한자본)이라든가 금강경삼가해언해본(金剛經三家解諺解本) 등 각종 불사와 불경의 언해에 많은 공적을 쌓은 승려로 학덕이 뛰어난 당대의 명승이었으며 문장과 필력이 뛰어난 문호로 칭송되었다.

학조대사가 지성을 연마할 수 있었던 배경과 터전은 그의 잉태적 환경인 가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가문의 입향조는 세종 때 비안 현감을 지낸 김삼근(金三近)이다. 원래 군내(郡內) 풍산현(豊山縣) 남불정촌(南佛頂村)에 살았으나, 차남인 김계행(金係行:1430∼1517)이 출생한 이후에 이곳 소산리(素山里)로 옮겨왔다. 그의 장남인 김계권(金係權, 판관공)의 부인(예천권씨)이 다섯 아들을 데리고 시미에 낙향을 했는데 첫째가 출가하여 세조때 국사가 된 학조(學祖)대사이고, 차남은 합천부사(陜川府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등을 지내고 성종(成宗) 때에 보익의 공훈으로 공신녹권(功臣錄卷)이 하사된 김영전(永銓:1439∼1522)이다.

학조대사는 출가한 탓으로 자신의 막내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하는데 그가 김번으로 이것은 또한 안동김씨, 그 중에서도 장동김씨의 화려한 역사가 된다. 이 부분에 대해 안동김씨 가문에서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남편 김번이 별세하자 부인 남양 홍씨는 신안동 김씨 선산 경내에 있던 방앗간을 지키면서 실의를 달래고 있었다. 이 무렵 남편의 백부로서 출가하여 등곡이란 도호를 가진 고승(학조대사)이 ‘이 방앗간 자리는 천하명당이니 내가 다른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건물을 헐고 내 어른을 모시게 해 주게나’ 하고 말했으나 홍씨부인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오히려 이 자리가 천하명당이라면 제 남편을 모시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다.

학조대사는 하는 수 없이 방앗간을 허물고 그 자리에 조카인 김번의 유해를 이장한 다음 조카 손자 생해(生海)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 자손 중에서 금관자 서말, 옥관자 서말이 쏟아질 것이다’ 라고 격려했다 한다. 가노라 삼각산아---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심양에 잡혀갔으나 굴하지 않았다.)은 김번의 증손자이다. 김상헌의 후손에서 영의정,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왕비 셋을 비롯하여 수 십 명의 판서가 배출되었으며, 형인 김상용의 후손에서도 정승, 판서 등이 많이 나오고 형제가 영의정에 오른 김수흥(金壽興), 수항(壽恒)과 왕비 셋이 나와 가문을 세도가의 반석위에 오르게 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 인물들을 배출한 천하의 명당이 바로 덕소(德沼) 石室(석실)마을에 있는 옥호 저수형의 안동 김씨의 선산이다. 이 자리를 흔히 학조대사가 점지한 소점자리라고 칭하는데 봉요십자도심혈(蜂腰十字道心穴)로 알려진 이 혈은 조선 8도 360고을 3공 6경 수령 목사 부사를 모두 안동김씨 사랑방에서 나오게 만든 명당이다. 그 뿐만 아니라 김조순(金祖淳), 김좌근(金佐根), 김병기(金炳冀)의 조자손 3대 60여년간 세도정치를 하게 한 자리이다.

세도정치가 막을 내린 고종 시대에도 안김은 빛을 발휘했다. 고종 때 김병기와 12촌간으로 ‘회색당상’ 김병덕(炳德)과 병시(炳始)는 정승을 지냈으며 역시 병기와 14촌간인 병국 병학이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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