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운 청춘 조국에 바쳤으나 우리는 끝내 모른 체 했다
꽃다운 청춘 조국에 바쳤으나 우리는 끝내 모른 체 했다
  • 김용준/유경상 기자
  • 승인 2015.07.0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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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구전투’에 묻혀있는 안동인도교 숱한 영령 어떻게 달래려나 ■ 1950년 8월1일 오전 7시30분, 안동인도교·철교 폭파사건

1950년 6월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한국사 최대의 비극이었다. 6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있지만 전쟁과 분단, 죽음의 상흔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한국인의 삶과 모든 사회정치적 분야에 대립과 갈등의 불씨로 작동 중이다.

△안동시내와 정하동을 가로지르고 있는 안동인도교가 리모델링을 통해 근대문화유산 격으로 새 단장을 하고, 인근 안동낙동강 고수부지 일대가 생활체육 및 휴식공간으로 시민이 즐겨 찾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상처를 덮은 채 평화스러워 보이는 강물과 인도교에는 안동전투 중 철수명령의 지연하달로 인한 철수작전 실패와 잘못된 인도교 폭파시간 때문에 북한군에 쫒겨 어처구니없이 숨지거나 강물 속으로 빠져 실종된 다수의 군인희생자들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안동지역에서도 지난해 ‘안동전투’ 과정에서 희생된 전사자들의 첫 유해발굴이 시작됨으로써 지역의 관심이 높아졌다. 국방군사연구소가 펴낸『한국전쟁(상)』(1995)에 따르면 ‘안동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기 직전에 국군 제8사단과 수도사단 제1연대가 안동지역에서 북한군 제12사단과 제8사단 일부병력의 침공을 4일간 저지한 방어전투였다”고 간략하게만 설명해주고 있다. 4일간은 7월29일부터 8월1일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안동전투 중 8백 여 명이 넘는 국군이 희생된 ‘안동인도교·철교 폭파 및 대참사’가 발생했고 이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이에 실체적으로 접근해 객관적인 사실 고증과 함께 냉정한 교훈으로 남겨야 된다는 것이다. 몇몇 개인의 증언에만 기대거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지 않고 보여주기식 행사용으로만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최근 안동시내와 정하동을 가로지르고 있는 안동인도교가 리모델링을 통해 근대문화유산 격으로 새 단장을 하고, 인근 안동낙동강 고수부지 일대가 생활체육 및 휴식공간으로 시민이 즐겨 찾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상처를 덮은 채 평화스러워 보이는 강물과 인도교에는 안동전투 중 철수명령의 지연하달로 인한 철수작전 실패와 잘못된 인도교 폭파시간 때문에 북한군에 쫒겨 어처구니없이 숨지거나 강물 속으로 빠져 실종된 다수의 군인희생자들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국방부가 발간한『한국전쟁사2』(1979)에서는 “‘안동인도교·철교 폭파사건’이 발생한 시간은 8월1일 아침 7시30분이다”고 전하고 있다. 군과 보훈관련 단체 자료에서는 당시 국군 등 835명(또는 851명)의 인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 수뇌부의 전략부재로 안동철수작전 실패

전쟁 발발 보름이 지나는 시점인 7월29일 전후쯤, 북한군 제12사단과 제8사단이 영주와 문경 방면에서 안동으로 공격을 해 오기 시작했다. 안동지역은 지리적으로 낙동강 상류인 동시에 중앙선 철로와 대구, 포항, 영천 방향 도로의 분기점이기 때문에 군사방어망을 구축해야 했고, 안동 방어임무를 부여받은 국군은 제8사단과 수도사단 일부였다. 제8사단은 29일 옹천에서 철수해 안동 중앙선 축선을 중심으로 방어편성을 했고, 수도사단 제1연대는 풍산으로 진출했다가 안동으로 이동해 제8사단을 지원하게 된다. 31일 새벽 북한군 제12사단이 전차를 앞세워 안동방향으로 진격해 국군과 쌍방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이미 육군본부에서는 낙동강방어선 형성계획이 수립돼 7월31일 24시를 기해 안동철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국군 제1군단은 철수시간이 임박한 20시에 제8사단과 수도사단 참모들을 소집해 작전회의를 개최했고, 회의시간은 8월1일 01시 까지 지체되고 있었다. 계속 명령하달이 늦어져 04시에 이르러서야 제8사단 제10·21연대가 철수하도록 했고, 제16연대는 수도사단 제1연대 엄호아래 후위로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제8사단 내에서 제10연대가 방어선을 이탈해 06시30분에서 07시20분 사이에 인도교를 건넜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 일부 병력이 안동교와 안동철교 부근 낙동강변 구릉지대를 점령하고 기관총을 수 정을 거치했다. 안동교가 피탈당할 위기가 발생했다.

제1군단 참모장 최모 대령과 제8사단장은 당초 교량폭파 시간을 06시로 계획했으나 교량부근에 북한군이 출몰하기 시작하자, 제21연대가 강에 당도하기 전인 7시30분 경 두 개 교량을 폭파한다. 폭파가 결행됐을 때 이미 건너간 국군에 비해 건너가지 못한 국군은 낙동강 북쪽 부근에 접근 중이었다. 제21연대는 강을 등지고 추격하는 북한군에 사격전을 벌이지만 밀리기 시작하자 강물로 뛰어들었다. 등 뒤로 집중적인 사격을 받으며 강물 속으로 도하를 시도한다. 설상가상으로 제16연대는 북한군 1개 연대와 치열한 접전 중인 06시 에서야 철수명령을 받았고 엄호해야 할 수도사단 제1연대가 이탈해 포위된 상황이었다. 각개로 돌파 및 도하를 하게 돼 연대병력 중 장교2명과 사병 814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는 손실을 당하게 되었다. 또한 제10연대 제2대대는 북쪽 강변에 집결했으나 북한군의 사격으로 도섭지점을 정찰하지도 못한 채 안동교각 부근의 여울을 통해 도하를 시도했다. 등 뒤로 쏟아진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안동전투 중 8백 여 명이 넘는 국군이 희생된 ‘안동인도교·철교 폭파 및 대참사’가 발생했고 이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이에 실체적으로 접근해 객관적인 사실 고증과 함께 냉정한 교훈으로 남겨야 된다는 것이다. 몇몇 개인의 증언에만 기대거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지 않고 보여주기식 행사용으로만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진상규명과 위령사업으로 늦게나마 원혼 달래야

일화에 따르면, 미군 제8군사령관이 안동방어 국군 제1군단에게 7월31일 19시경 비행연락기를 통해 “8월1일 미명까지 낙동강 남안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전달했지만, 명령문인 영어를 번역하고, 첨부된 투명도 축적을 계상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철수개시 시간을 8월1일 02시로 시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사단참모장이 군단사령부를 떠난 시간은 20시 무렵이어서 대대단위까지 하달된 시간은 날이 샐 무렵이었다고 한다. 원래 계획보다 4시간이나 늦게 큰 혼란 속에서 철수를 시작하다보니 북한군의 기습공격에 밀려 부랴부랴 안동교를 조기폭파하게 되었고, 다리를 넘지 못한 부대원들이 더 큰 희생을 당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1군단의 안동 철수작전은 철수 시간과 낙동강 도하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다리를 폭파해 국군의 인명을 고스란히 희생시킨 셈이다. 이로써 제8사단의 철수 및 후퇴작전이 실패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 군에서는 이를 두고 철수명령 지연하달로 인한 명령의 적시성 실패로 규정하고 있다. 예하부대가 명령을 적시에 받아 작전을 준비하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기록된 문서에는 희생당한 다수의 군인은 제8사단 16연대와 21연대 2대대 2·3중대로 적시하고 있다. 인명피해 숫자는 835명에서 851명으로 기술돼 있지만 추정에 불과하고 정확한 통계숫자는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6월25일 안동mbc 뉴스에서도 “16연대 77%인 851명과 8사단 21연대 50% 전력이 상실되었다”고 추정하며, 정확한 진상규명과 위령사업을 추진해 역사적인 교훈으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고 보도했다.

6월27일 안동보훈지청과 안동시보훈단체협의회가 안동교 전투지를 추모하는 ‘호국퍼레이드’걷기행사를 개최했다. 안동충혼탑에서 안동인도교를 거쳐 탈춤공원까지 많은 군인과 시민 등이 함께 걸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1965년 건립된 안동충혼탑만이 무정한 낙동강물과 안동인도교·철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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