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당신은 잡지를 만듭니까?'
'왜 당신은 잡지를 만듭니까?'
  • 이구호 기자
  • 승인 2015.07.09 16: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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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말해주지 않으면 잘 모를 평범한 안동 사람들의 이야기
[문화인터뷰] 백소애-사랑방안동 편집실장

안동에는 지역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잡지가 제법 많다. 그러나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만큼 유서 깊은 잡지는 전국적으로도 드물다. 작년 종간 됐다가, 반년 만에 복간호를 내는 <사랑방 안동>지. 그 27년의 역사를 이어받아온 백소애 편집실장을 만났다. <글.사진, 격월간 링커 이구호 기자>

▲ 사랑방 안동지 백소애 편집실장

- 사랑방안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건 언제인가요?
“2006년부터니까 벌써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네요. 사랑방 안동이 1988년에 창간을 했으니 역사의 3분의 1을 함께 한 셈이네요”

- 9년이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네요. 종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당시엔 어떤 심정이셨나요?
“대청소하다 보면 하라는 청소는 안하고 묵혀뒀던 일기나 편지 보느라 시간 다 보내는 경우가 허다해요. (웃음) 사랑방 종간호를 내면서 옛 자료를 들춰보니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뭔가 이룬 게 있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좀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주변에선 흔들리지 않고 잘 이끌어 왔다며 격려해주셨지만. 종간 당시엔 정말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셨어요. 그동안 잡지에 관한 행사를 크게 열었던 적은 없는데, 이례적으로 종간행사를 크게 치렀어요. 사랑방안동의 역할과 의미에 공감한 임동창 선생님께서 공연도 해주셨지요. 아쉬움이 큰 만큼 매듭의 의미도 가볍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종간을 했는데, 반년 만에 다시 복간을 하니, 생각보다 상황이 민망한 감도 있습니다. (웃음) 그래도 복간하게 되어 다행이라며, 백수 탈출을 축하한다며, 힘내라는 응원의 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 지역 잡지를 만들고 이어간다는 게 만만찮은 일인데, 특히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금전적인 부분이 가장 어렵죠. 지금은 최소한의 인쇄비용 걱정이야 없지만, 사랑방안동은 시작할 때부터 종간할 때까지 돈이 없었습니다. 실무진들은 물론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이 봉사를 한다는 신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구요, 그 많은 필진들께도 원고료 한 푼 못 드렸습니다. 하나 더 꼽자면 세대교체의 문제도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간 사랑방을 이끌어온 편집위원, 운영위원들의 뒤를 이을 새로운 운영진, 필진의 확보와 인력 충원이 필요했는데, 그런 세대교체가 자연스레 이뤄지지 않았어요. 젊은 사랑방이 아니라 사랑방이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거였죠. 27년간의 방대한 자료를 디지털화하고, 좀 더 깊이 있는 내용들을 다루고 싶었지만 달리는 일손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개인의 이익이나 단체의 이해관계를 위해 지면 할애를 하지 않은 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안동시의 현안과 관련된 내용의 보강,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나가야 하는 점 등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 굳이 변화가 필요할까요? 사랑방 안동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때론 학술지 같다, 어렵다는 말씀들을 많이 들어요. 시민의 삶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그런 가벼운 이야기들이 필요하다는 조언들이죠. 사실 다시 사랑방 안동 일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을 때 거절하고픈 마음도 컸어요. 새로운 편집인, 운영진이 와서 이전과는 다른 사랑방 안동을 만들어주길 바랐거든요. 그런데 경험자가 저 밖에 없으니 손발을 맞춰보자는 말씀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합류하게 된 거고요. 복간된 사랑방 안동은 기존의 편집 기조를 유지해 나간다는 방침 아래, 포맷 변화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사랑방 안동에서 이어온 큰 뿌리를 이어감과 동시에 새로운 변화를 적절히 담아내는 게 과제라고 생각해요.”

- 이렇게까지 하시려면 사명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전 발행인 김복영 방장님께서는 40대에 공무원의 자리를 박차고 큰 돈벌이도 아닌 이 일에 모든 걸 던지셨어요. 좋아하셨던 일이었으니까요. 지인들과 지역 주민들의 도움의 손길들이 모여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죠. 사실 전국적인 범위에서 보더라도 이렇게 오랫동안 지역향토지로 명맥을 이어가는 경우가 없거든요. 처음에는 계간으로 나오다가 조금씩 힘을 모아 격월간으로 나올 수 있었죠. 소설가 김중혁은 내 인생의 책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에 <세상의 모든 잡지>라 답했어요. 우리가 말하는 품위는 내용에 경박성이 없음을 뜻할 뿐이지 쓰임새를 따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골 할매들이 엉덩이에 깔고 앉아 있다가 ‘이 사람은 누군고?’ 하고 궁금해하는, 그런 잡지라고 생각하고 또 그럴 때면 보람도 큽니다.”

▲지난해 발간된 종간호. 반년 만에 복간호를 내게 된다.

- 잡지를 만들면서 바라본 안동 지역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윤태호의 웹툰 <이끼>에서 ‘십수년 이장질에 구름은 못 타고 산 몇 개는 옮겼다.’는 말이 나와요. 이장, 경찰, 의원, 마을사람 모두 그들의 생활공간을 거점으로 외부인에겐 틈을 주지 않죠.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안동에서 3대가 살아야 안동사람 된다는 말이 있어요. 토착민들의 뿌리가 단단한 지역사회에서 특히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적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사랑방 안동지의 운영위원, 편집위원 대다수는 지금 현재 안동에서 살아가는 ‘안동사람’이지 소위 우리가 말하는 고향이 ‘안동사람’인 경우가 오히려 드물어요. 그런 분들이 27년간 사랑방 안동을 이끌어왔다는 게 재미있지 않아요?
전통적으로 보수성이 강한 곳이지만, 다양한 성향의 활동가들도 많습니다. 재미난 지역이에요. 전국에서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해낸 곳이기도 하구요. 폐쇄성과 보수성이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가길 바랍니다. 안동사람 특유의 꼿꼿함과 인정이 좋은 방향으로 흘렀으면 좋겠어요.”

- 앞으로의 역할과 계획은?
“창간호였어요. 길안에서 20여 명의 어르신들이 합동 회갑연을 열었죠. 그때 사진이 그대로 실렸고요. 그리고 20년이 지나고 제가 취재를 갔을 때 명단을 살펴보니 이미 많은 분들이 운명을 달리하셨어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와 첨단의 시대까지 모두 경험한 그런 분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이 저에게 많은 배움의 기회가 됐어요. 종간호를 앞두고,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다시 찾아뵈었죠. 그때는 네 분만이 살아계셨어요. 이제 이 분들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다른 무엇보다 그런 분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게 사랑방의 지향점이라 생각해요. 인터넷을 통해 자기 글을 발표할 창구가 넘치는 이 시대에 활자화 된 책이, 그것도 격월간으로 나오는 잡지의 영향력이란 어쩌면 보잘 것 없을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동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독자들이 있고, 그 모든 이야기들이 안동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안동의 예사 사람, 누군가 말해주지 않으면 잘 모를 평범한 안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네 사랑방처럼 편히 접할 수 있는 책. 그게 바로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이라 말하고 싶네요.
이제 새로운 발행인인 정익수 사장님이 살림살이 잘 꾸려나가실 것이고, 안동문화의 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욕이 가득 차 있으시니, 저는 여기서 실무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게 앞으로의 계획이죠. 여전히 이 지역의 숨은 사연, 이름 모를 안동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담아내고 싶고요.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순간에 손 털며 후회 없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끝으로 지역의 청년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지역의 젊은이들은 실패를 두려워말고, 이것저것 많이 도전해보고 겁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소설가 이만교의 책에 ‘개구리는 왜 계속 개구리로 사는가?’ 라는 구절이 있어요. 꿈이 없는 삶, 그 본질과 마주하게 됐을 때의 비극을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깨어 있는 젊은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가장 반기는 말이 <무기력>일 겁니다. 맘껏 뛰어들기를!”

(위 기사는 격월간 링커에 게재된 것을 허락아래 재수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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