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면 어제와 같은 내일이 기다린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면 어제와 같은 내일이 기다린다
  • 김수형
  • 승인 2015.07.30 1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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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돋보기> - 김수형(두루협동조합 이사장)

▲김수형(두루협동조합 이사장)
숙종조 이후 영남 남인의 정계진출은 전면적으로 불가능하게 됐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인들이 조선의 대표적인 악녀라고 부르는 장희빈(1659~1701)의 아들인 경종(1688~1724)의 죽음 이후 극소수의 남인만이 정계 진출이 가능했다. 역사책에서 당파를 넘어 골고루 인재를 등용했다고 하는 영조의 탕평은 노론과 소론을 위한 탕평이었지 남인까지 끌어안는 탕평은 아니었다. 그렇게 영남 남인은 약 200년간 야당도 아닌 재야세력이 되어 지역의 근거지를 어떻게든 지켜보려했다.

그런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가 알고 가야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는 열려있는 신분제로 운영되는 나라라는 점이다. 재주가 있으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 결국 목적했던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는 사회였다. 단, 그것이 결코 쉬운 사회는 아니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양반으로 인식되는 퇴계선생도 신분상승에 성공한 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 반기문 UN사무총장의 조상인 반석평이라는 분도 신분상승에 성공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분제도는 신분 상승과 양반의 지위유지를 위해 세 가지 문이 열려있었다. 첫째가 잘 알려진 과거시험 통해 나라에 공을 세우고 높은 관직으로 대를 이어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가 과거 시험으로 측정할 수 없는 높은 학덕을 가진 대학자가 되는 것이다. 유교를 중심으로 했던 조선은 유교의 대학자를 높이는 사회였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벼슬에 욕심을 내고 과거를 치는 것보다 초야에 묻혀 학업에만 전념하는 것을 더 높게 치기도 하였다.

세 번째가 혼인이다. 조선 양반들의 혼인을 보면 요즘처럼 부자, 권력자 가문과 혼인하는 것을 즐기는 집안도 있지만 한쪽에서는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혼인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이상을 유지해 가려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 뜻의 정점에 있는 지역의 대유학자의 집안과 혼맥을 연결하는 것이 A급 양반의 지위를 얻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양반 계급을 상속받은 한 개인은 유림의 구성원으로 자신의 계급과 사회적 지위를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수대 위의 조상만 팔아 자신이 A급 양반이라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기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역 사회 안에서 끊임없이 양반들 간의 사회적 지위 변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남에서 A급 양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개인으로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유학적 자기 학식과 도덕적 생활을 유지하여야 하며 문중으로써는 뜻을 같이하는 집안과 혼맥을 잇고 가문을 유지시킬 수 있는 경제력을 가져야했다.

경제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조선초기의 균등상속에서 벗어나 장자상속으로 전환하여 재산이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문중 재산을 만들었다. 이렇게 장자와 문중이라는 두 틀을 둠으로써 둘 중 하나가 경영실패로 약해지더라도 나머지 하나를 잘 운영하여 다른 하나를 살려내는 방식을 택했는데 이러다보니 중심에 가까운 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문중의 구성원들은 소작농의 지위를 가진 양반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문중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작농이 되었지만 A급 양반이라는 계급을 유지하고 싶어 했고 그 대안으로 가문 내에서 대학자를 배출하고 뜻을 같이하는 문중과 지속적으로 상호 혼반을 유지하여 지위를 유지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척박한 시대 상황 속에서 만들어낸 해결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중과 그 구성원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줄 수 있는 방법은 문중 내에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대유학자를 배출하는 것과 대의를 가지고 중앙과 지방의 시대적 정치 사안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인물의 배출이다. 이러한 분위기와 유교적 도덕 속에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바른 소리를 했던 많은 지역의 선비들이 탄생했다고 본다.

지금도 그런 선조를 내세우며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다. 단지 자신의 선조만이 아니라 같은 지역민으로써 그 당당했던 과거가 자랑스럽고 자신이 그 지역의 구성원이라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그 시대 사람들은 문중 차원에서 그런 인물들을 키웠었다. 대학자를 키워야했고 시대적 리더를 키워야했다. 그러다보니 5살~10살 남짓의 문중 아이들 가운데 총기가 있는 아이가 있으면 문중차원에서 지원을 해서 인재를 양성했다. 장학제도를 만들어 문중에서 토지를 주어 안정된 생활을 보장했으며 좋은 스승을 찾아 배울 수 있도록 도왔다.

결국 영남 유림은 그 이전에도 그러했고 그 이후에도 그러했다. 대유학자와 시대적 리더들의 정신과 삶을 기리는 서원을 만들고 그 곳에 당대의 대유학자를 모셔 젊은 사람들을 키워내는 사회적 교육 시스템도 만들어냈었다.

유학의 이상이란 원래 내세 즉 죽은 이후에 세상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현세를 이상사회로 만들어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노력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를 중시하다보니 먼저 자신을 그리고 가족을 그 뒤에 지역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천하)에 나가서 변화를 만들어내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전체적 구조를 보면 지역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부분의 유림이 움직였으며 그리고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에서 활동할 수 있는 소수만이 서울(한양)에서 중앙 정치에 관여하였다. 그들은 지역을 대변하고 지역을 지지기반으로 활동했다.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쓴 이유는 지금과 비교를 하기 위함이다. 중앙을 제외한 지방, 특히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노인은 남고 젊은 사람들은 떠나고 있다. 앞으로 십년 뒤 과거의 영광은 현실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지역 사회는 중앙 정부의 예산을 확보하여 계속해서 사라진 과거를 기념하고 있다.

지금은 지역을 살려낼 방법을 모색해야할 때가 아닌가한다. 옛날처럼 우리를 위해 인재를 키우고 견디며 지역을 키워나갈 방법을 찾아야한다. 협동조합도 문중도 모두 그런 것을 하기에 적합한 조직이 아닌가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면 어제와 같은 내일이 온다. 하지만 때론 과거와 같이 살면 오늘 보다 더 좋은 세상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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