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채꽃이 나아가는 한 걸음 세상
범부채꽃이 나아가는 한 걸음 세상
  • 이위발(시인,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 승인 2015.08.0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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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 에세이] 이위발(시인,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이위발(시인,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나이가 들면 아침잠이 없어진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몸소 받아들이는 아침입니다. 여섯시 전에는 어김없이 눈이 떠집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아침부터 들에 나가 일을 하는 것도 잠이 일찍 깨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면 어김없이 꽃밭에 물을 줍니다. 습관처럼 물을 주며 애정을 표시합니다. 비가 오는 날만 예외입니다. 지금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설악초, 참나래, 금잔화, 맨드라미, 상사화, 범부채가 마음을 달뜨게 해줍니다.

그 중에 유독 제 눈길을 끄는 꽃이 있습니다. 범부채입니다. 줄기는 곧게 서고 잎이 좌우로 가지런히 부채 살 모양으로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꽃잎이 여섯 개로 황적색 바탕에 반점이 범 가죽처럼 있다고 해서 범부채라고 합니다. ‘정성어린 사랑’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는 이 꽃은 화려하진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며 자랑하지도 않으면서 은은하고 고고하고 기품 있게 그 모습 그대로 피어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안상학 시인의 <범부채가 길을 가는 법>이란 시가 꽃의 생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범부채가 한 해에 한 걸음씩 길을 간다//봄내 다리를 키우고/여름내 꽃을 베어 물고/가으내 씨를 여물게 한다/겨울이면 마침내 수의를 입고 벌판에 선다/겨우내/숱한 칼바람에 걸음을 익히고/씨방을 열어 꽃씨를 얼린다/때로 눈을 뒤집어쓴 채 까만 눈망울들 굳세게 한다.”

범부채는 씨앗을 퍼트리는 방식이 다른 꽃들과 다릅니다. 바람에 의해 온 사방에 꽃씨를 퍼트리는 민들레나 개망초, 동물에 의해서 씨를 퍼트리는 짚신나물이나 도깨비 바늘, 뻥튀기처럼 터져 씨앗을 옮기는 봉선화나 괭이밥들은 자신들만의 생존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범부채는 한 해에 자기 키 만큼 한 뼘씩만 씨앗을 퍼트립니다. 답답하다는 생각과 그렇게 해서 어떻게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구심도 듭니다. 하지만 범부채는 느림의 속도로 한발 한발 나아갑니다. 범부채의 속내엔 욕망이나 욕심보다는 내면에 대한 자신의 성찰이 먼저입니다.

연일 이어지는 사건사고가 언론을 통해 들려옵니다. 명문대학교 출신 전직 교사가 장난감 권총으로 새마을 금고를 턴 사건, 상주 할머니 독극물 사건, 형제간에 흉기를 찔러 죽음을 부른 사건, 사라지지 않는 국회의원들의 성추행 사건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건사고를 접하면서 이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이 시대에 필요한 삶의 방법은 무엇일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든 것이 물질이 선점하고 자신에 대한 내면적인 성찰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 것인가? 숱한 성현들의 가르침도, 종교적인 사랑도, 부모님들의 가정교육도, 학교에서 배우는 수많은 지식도 소용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할 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면에 대한 진지한 생각보다 물질이 보이는 곳엔 달려들고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범부채의 삶의 방식이 현실에선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뚜벅뚜벅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내면을 키워가는 삶이 방식이 바람직할지도 모릅니다. 범부채꽃은 꽃을 피우고 난 뒤 자신의 삶을 마무리 할 때의 모습도 너무나 경이롭습니다. 다른 꽃들은 화려하게 피지만 꽃이 질 때의 모습은 보기가 싫습니다. 특히 벛꽃은 너무나 아름답게 피지만 꽃이 지고 난 뒤의 모습은 추하기까지 합니다. 범부채꽃은 자신의 생을 마감할 땐 꽃잎을 몸 안으로 돌돌 말아 자신의 모습을 숨기듯 까만 점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난 뒤 열매가 떨어질 때 함께 땅으로 떨어집니다. 모든 것을 내면으로 끌어안고 스스로 산화 하듯이 꽃의 일생을 마감합니다.

가끔 자신에게 묻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지?’ ‘아니 왜 이렇게 살아야하지?’ 그 누구도 시원한 대답을 해 줄 순 없습니다. 하지만 한번쯤 내면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보십시오. 뭔가 가슴을 치고 나가는 것이 있을 겁니다. 아니면 어디선가 쿵하고 떨어지듯 가슴을 때리는 울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 소리는 범부채가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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