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희망은 바깥이 없다!
보이지 않는 희망은 바깥이 없다!
  • 이위발(시인,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 승인 2015.10.2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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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이위발 (시인,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 이위발 (시인,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며칠 전 텔레비전을 보면서 눈물을 짓게 했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금강산이산가족 상봉에서 올해 여든 여덟 살인 북측의 리흥종 할아버지가 딸을 위해 ‘애수의 소야곡’과 ‘꿈꾸는 백마강’을 불렀을 때입니다.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습니다. 육십 오년 만에 만난 부녀간의 상봉에서 다시는 보지 못할 아버지의 음성을 노래로 녹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젊은 시절 자주 부르던 노래를 딸에게 다시 들려주기까지 육십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던 아버지와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던 딸의 표정에서 희망의 환희를 보았습니다. 기나긴 세월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상봉의 그날을 인내와 끈기로 버텨왔던 두 사람의 희망이 이루어진 날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희망이라는 것이 쉽게 보이는 것이었다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 희망이 가장 먼저 날아갔을 것입니다. 희망은 가장 깊숙하고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여름 내내 울었던 매미 소리가 귓전을 맴돕니다. 매미는 땅속에서 굼벵이로 십년을 살다가 애벌레에서 딱딱한 껍질을 벗어나 허물을 벗고 태어납니다. 여름만 되면 나무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던 그 소리에 정신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십년을 땅속에서 살다 밖에 나오니 감격에 벅차 울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사실 매미는 종족보존을 위해 크게 울수록 암놈과 짝짓기를 할 수가 있기에 절대 절명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울음도 얼마가지 못하고 십일을 살다가 죽습니다. 이것이 매미의 일생과 십년의 시간입니다. 한없이 십일 동안 울고 짧은 시간에 사라져가는 곤충의 일생이 겉으로 보기엔 짧은 시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매미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 냈기에 십일 동안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들도 육신의 허물을 벗고 영혼의 날개를 펴는 것처럼 매미의 일생도 같습니다. 땅속에서 십년을 살아온 매미가 땅위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오라기 안 걸쳐도 나무들이 알몸으로 찬바람 견디는 것은 발밑에 따뜻한 피가 흐르기 때문이라 합니다. 땅속에서 타오르는 생명이 추위가 와도 사나흘이면 물러가는 것은 숨어있는 불길 때문이라고 합니다. 희망은 늘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져 있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별들은 대낮에도 빛나고 있듯이 말입니다.

희망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얘기할 때 보이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다가서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마다 희망이 보인다고 하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희망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있다면 모두에게 보여야 되는 것이고 없다면 모두에게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희망은 모두에게 서로 다른 희망일 수도 있습니다. 희망은 각자에게 서로 다를 수 도 있고 같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같은 희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보일 때는 함께 보이고, 보이지 않을 때는 함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이 우리에게 스스로 다가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희망의 소원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그런 소원을 가지고 각자의 구미에 맞는 희망이라는 완성품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에게는 희망이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치찌개를 만드는 재료는 동일할 수 있으나 맛있는 김치찌개를 만드는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래스피를 가지고 서로 다른 음식이 만들어 지듯이 재료도 중요하지만 희망이란 결국 만드는 사람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맛있기도 하고, 맛이 없을 수도 있고, 신선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희망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만들어진 완성품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라고 한 도종환 시인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희망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인간의 얼굴을 한 희망은 온다/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희망의 바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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