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사랑, 최고의 행복’
‘최고의 사랑, 최고의 행복’
  • 격월간 링커 편집인 이구호/사진기자 김시모
  • 승인 2015.11.1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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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주적 인터뷰] 두봉 주교(경북 의성, 봉양문화마을)

1978년 봄, 정부는 영양 군민들에게 감자 종자를 배포하여 농사를 짓게 했다. 그러나 그 감자 종자들은 불량인 상태였고, 이미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된 농민들은 피해 보상을 위한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상운동에 앞장섰던 오원춘이 영양 버스정류장에서 정체불명의 기관원에게 납치되어 포항과 울릉도 등에서 15일간 폭행, 감금되었던 사실이 알려졌다. 이것을 알게 된 천주교 안동교구와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폭로하며 적극적인 저항운동을 펼쳤다. 그 해 8월, 안동 목성동 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중심으로 촛불 시위가 시작 되었으며, 저항 운동은 서울 명동 일대에 이르기까지 확산 되었다. 당시 이 사건으로 국외 추방명령을 받은 천주교 안동교구 교구장 두봉(87, 경북 의성)주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의지를 꺾지 않았고, 마침내 로마 교황청(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정부로부터 추방명령 철회를 이끌어냈다. 이 사건이 이른 바 '오원춘 사건', 바로 '안동농민회사건' 이다.

젊은 외국인 사제의 흔들림 없는 의지는 당시 사건의 현장을 뜨거운 열정과 정의감, 그리고 긴박함으로 가득 채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여유로운 한 낮에 우리 취재진을 맞이하기 위해 직접 현관문을 열어 주던 그의 얼굴에는 이미 모든 것을 녹여 버리고도 남을 만큼의 평화로운 미소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오늘은 결코 쉽지 않았던 그의 삶을 조금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들어보려고 한다.

♦ 두봉 주교
♦ 청년 두봉

1. 1954년에 입국하셨으니, 벌써 60년도 넘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저희보다 훨씬 오래 사셨고요. 프랑스에서 보내셨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 두 배 정도는 더 오래 살지 않았나요? (웃음)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우리 집을 간단하게 소개해 드릴게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셨던 아버지는 몸이 조금 약한 편이셨습니다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강인한 분이셨어요. 어머니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5남매 중 넷째였고요. 부모님이 안 계셨던 사촌동생 둘까지 포함하면 7남매가 함께 살았죠. 그러나 살기가 너무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작은 땅에서 채소농사를 지어 시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갔죠. 식구들이 많은 편이었지만, 서로 마음이 잘 통했어요. 제가 10살이 되던 해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6년 간 계속된 전쟁과 피난살이 동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 제대로 먹지 못했어요. 그래서 지금 제 키가 160cm가 조금 넘는데, 팔을 벌리면 그 길이가 180cm나 됩니다. 원래 팔 벌린 길이와 키가 같다고 그러잖아요? 저도 180cm는 넘는 키가 될 수 있었는데, 어린 시절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지금의 키 밖에 되지 못했죠. 그 정도로 아주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상황을 비관하거나 원망한 적은 없었습니다. 집안 분위기가 너무나도 즐겁고 화목했거든요. 제 대답이 너무 길었나요? (웃음)

2. 오를레앙이라는 도시가 주교님께는 그리움 가득한 고향이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잔 다르크의 도시 정도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 네, 오를레앙이라는 도시는 인구가 현재 30만이 조금 넘는, 지금도 인구가 계속 늘고 있는 그런 중소도시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인구가 10만 정도의 작은 도시였죠. 수도인 파리와 10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오를레앙과 같이 파리에서 가까운 도시에 살면서 파리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오를레앙은 잔 다르크의 도시입니다. 백년전쟁 당시에 섬나라였던 영국은 대륙으로 뻗어나가고 싶어 했죠. 영국에 가까운 대륙의 나라가 프랑스였기 때문에 그렇게 침략해 온 거죠.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을 영국으로부터 구해낸 때가 1429년 입니다. 그녀가 18세 때, 왕(샤를7세)을 찾아가서 전쟁에 앞장 서겠다고 당당히 나서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었을까요? 시대는 다릅니다만 어떤 면에서는 유관순 열사하고도 비교 할 수 있겠죠? 결국 그녀의 부대가 영국군들이 포위하고 있던 오를레앙을 구해냈죠. 그녀가 오를레앙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오를레앙은 잔 다르크의 도시”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된 것이죠.

 
 

3. 잔 다르크가 영국군을 퇴각시켰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짜가, 이제는 오를레앙의 축제일이 된 “5월 8일”입니다. 60년이 넘는 대한민국에서의 삶에서 주교님께 가장 의미 있는 날짜는 언제인가요?

- 제게 가장 특별한 날짜라고 하면 바로 한국에 처음 온 그 날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제가 한국에 처음 온 때가 1954년 12월 19일 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저는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하고 있던 때에 6.25전쟁, 한국전쟁이 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있던 부대에서도 한국전쟁에 지원하고 싶은 사람은 지원하라는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신부가 되기 위한 공부 중이었기 때문에 지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같이 생활하던 친구들 중에 지원해서 한국으로 간 친구들이 있었고, 안타깝게도 전사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로 한국을 조금씩 알기 시작했어요. 한국에 오던 그 날 저는 다짐을 했어요. 나는 지금부터 프랑스 사람이 아니다.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불러야 되겠고, 한국어를 배워야 되겠고, 한국의 풍속을 받아들여야 되겠다. 내 인생의 새 출발이다. 평생 한국에서 살 것이다. 그런 마음을 먹고 한국에 왔어요.

4.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는 사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큰 결단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 저는 어릴 때부터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방식으로 말하자면 고 3때였습니다. 앞으로 내 삶에 대해서 어떻게 살면 좋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주셨던 신부님께서 종교철학에 대해 가르쳐 주셨어요. 불교와 유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소개를 해 주셨죠. 특히 사랑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해 주셨어요. 사랑에는 여러 가지 수준이 있다. 낮은 사랑 그리고 중간 사랑이 있고, 마지막에는 최고의 사랑이 있다. 최고의 사랑은 자기의 상황이 어떻든 타인을 자기보다 더 중요시 하는 것이라는 거죠. 예를 들면, 한 가정에 아기가 생기게 되면, 그 어머니는 감기약조차 먹지 않죠. 아기가 태어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부모님이 희생과 사랑으로 돌봐주어야만 합니다. 최고의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과 행복을 짝지어 생각해 보면 낮은 사랑은 낮은 행복, 중간 사랑은 중간 행복 그리고 최고의 사랑은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의 비결이 바로 사랑이라는 결론입니다. 내가 먼저 최고의 사랑을 가지고 최고의 행복을 누린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의 비결을 가르쳐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신부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5. 전쟁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대한민국은 보기만 해도 처참했을 텐데, 혈기왕성한 청년 시절에 어떤 계기로, 어떤 생각으로 오시게 되셨나요?

- 저는 한국으로 발령을 받아서 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국으로 발령을 받게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발령을 받은 때가 1953년 6월(당시 24세)이었거든요. 아시다시피 휴전협정을 맺은 것이 그 해 7월입니다. 전쟁 중에 있는 나라에는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 원칙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한국으로는 갈 수 없으리라는 그런 생각을 가졌어요. 그런데, 교계의 어른들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이었습니다. 곧 휴전 협정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한국으로부터 사람을 보내달라는 부탁도 있었고요. 전쟁 후,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많은 일꾼이 필요했겠죠. 당시에 저는 어느 나라가 되던지 보내는 대로 가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국으로 발령이 나게 되니,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군대 시절, 친구들이 목숨 걸고 싸우러 갔던 한국전쟁에 지원하지 못했던 마음이 늘 있었는데 이제 나도 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았어요. 사실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선교사입니다. 외국으로 나가는 선교사는 이왕이면 어려운 나라로 가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쟁이 끝난 한국에 어려움이 많다는 사실은 오히려 제게 좋은 일이었습니다.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것에 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는 겁니다. (웃음)

 
 

6. 안동이라는 곳은 오랫동안 유교적 가치가 자리 잡고 있어서 생활하시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실제의 삶은 어떠셨나요?

- 안동에 처음 오게 된 것은 1969년입니다. 당시에는 각 도마다 1개의 교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상북도의 인구가 너무 많아져서 남쪽과 북쪽을 나누어 담당하기 위해 북쪽지역 교구를 새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남쪽지역은 대구교구, 그리고 북쪽지역은 안동교구가 된 것이지요. 교황청으로부터 안동교구장으로 임명을 받았지만, 저는 일단 거절을 했습니다. 새 교구의 교구장은 한국 사람이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교황청에서는 한국주교단에서 내린 결정이니 그대로 따라주기를 요구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문화적인 차이라고 하면, 그런 차이가 조금은 있죠. 안동에 오기 전 대전에서 생활하던 때에는 유교사상이나 불교사상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안동에 와서 살아보니까 내가 유교사상에 대해 조금은 소극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을 했어요. 유교는 참 좋은 점도 있다, 아니 좋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중 가장 좋은 점이 “바르게 산다” 는 것이었습니다. 유교의 뿌리가 깊은 집안에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죠. 어떠한 상황에서도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들이 저와 아주 많이 통했습니다. 어려움 보다는 오히려 유교의 사상을 더 좋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박해를 당하는 과정에 많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유교의 전통과 맞지 않다고 여겨졌던 것이죠.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옛날의 일입니다. 저에게 어려움(안동농민회사건)이 있었을 때에도 유림에서 저를 어떻게 생각을 할까 조금 염려를 했는데, 바르게 산다는 점에서 오히려 좋게 봐 주시고, 고맙게 생각해 주셨죠. 그만큼 전혀 어려움이 없었어요. (웃음)

 
 

7.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 중 한분이신 김수환 추기경님과의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주교님께서 느끼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 네, 맞습니다. 인연이 있었죠. 천주교에서는 각 교구장을 “주교”라고 부르는데, 전국의 주교들이 주교회의라는 정기적인 모임을 갖습니다. 당시 서울대주교님이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은 주교회의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의장을 맡으셨죠. 저는 상임위원을 맡았고요. 서로가 아주 잘 통했습니다. 그 분께서 사회 문제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태도를 취하셨기 때문에, 저 또한 그 부분에서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어요. 아, 그 분이 안동하고도 인연이 있어요. 안동 목성동 성당의 주임신부이셨거든요. 지금도 연세 많으신 분들께서는 추기경님께서 주임신부로 계셨을 때 어떤 분이셨는지,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더러 말씀하시곤 하십니다.

 

8. 안동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사건이 ‘안동농민회사건’, 이른 바 ‘오원춘 사건’입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 그때는 지금처럼 정의 구현 사제단과 같은 그렇게 구체적인 조직이 없었어요. 안동농민회사건으로 저 뿐만 아니라 안동교구의 모든 신부님들이 힘을 모았습니다. 우리 성직자들은 각오를 하고 있었어요. 다치는 것도 심지어 죽는다는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천주교인이라 이유로 주위로부터는 따돌림을 받고, 직장에서는 승진이 안 되고, 수시로 누군가로부터 미행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시민 단체가 없었습니다. 모든 단체들이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운영이 되고 있었고, 정부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용공이라고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자율적인 단체는 가톨릭에만 있었어요. 안동의 가톨릭 농민회에 와 보니, 불교신자, 개신교신자 심지어 종교생활을 전혀 하지 않은 그런 분들도 있었죠. 정말 자유로운 형태의 모임이었어요.

‘오원춘 사건’의 시작은 감자 문제였습니다. 정부의 주도로 불량 감자 종자를 배포했던 사건인데, 당시 정부는 그 사건 이전부터 가톨릭 농민회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어요. 정부의 정책에 찬성하기도하고, 반대하기도 했던 태도 때문이죠. 아무래도 가톨릭 농민회가 정부로부터 어려움을 겪게 될 것 같아서, 안동교구청의 일부를 농민회 간부사무실로 사용하도록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정부의 요원들이 예고도 없이 그 곳으로 들이닥친 겁니다. 농민회 간부들과 지도 신부님을 체포해 갔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항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저는 외국 사람이기 때문에 체포할 수는 없고, 국외추방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합당한 항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후퇴할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 후 당시 서울에 거주 중인 교황 대사님이 외무부 장관을 찾아가서 교황청과 상의되지 않은 추방명령은 부당하다고 강하게 주장했어요.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대해 외무부 장관을 교황님과 직접 만나게 하여 정부 측의 주장을 그대로 전달하게 되었어요. 그 다음엔 제가 바티칸으로 갔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윤공희 광주대주교님과 함께 교황사무실에서 한국교회에 관한 여러 가지 설명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제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교회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죠. 한국으로 되돌아가세요, 만일 일방적으로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 주교님을 그냥 쫓아낸다 하더라도 저는 그 곳에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잘하고 있어요.” 라고 말이죠. 그런 이야기를 교황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많은 힘을 얻고 돌아왔어요.

약 한 달쯤 후에 대통령이 저격을 당해 서거하시게 되었죠. 그 이후로 ‘오원춘 사건’, 즉 ‘안동농민회사건’ 은 더 이상 수사가 진행되지 않고, 제게도 추방과 관련한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어려움이라면 제가 외국으로 쫓겨난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절대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죠. 외국인으로써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라 말씀들을 하셨지만, 제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요.

 
 

9.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가 되어버린 “청년문제”에 대한 주교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듣고 싶습니다.

- 청년들 스스로가 답을 찾아 가겠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의 입장에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대한민국처럼 이렇게 갑자기 발전한 나라가 없을 겁니다. 후진국 중에 후진국이었던 이 나라가 이렇게 빨리 선진국으로 올라서게 되다니요. 많은 물질적인 발전을 이루어 왔지만, 지금 대한민국에는 돈이 최고라는 생각들이 만연해 있는 것 같아요. 청년들도 그런 영향을 받았는지, 우선 돈을 벌어야 되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죠. 빠르게 발전해왔던 시간들로 인해 지금 이 시대에 정신적인 손해가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청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안동사람들이 마땅히 먼저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남을 돕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빈부의 격차가 커지면서 물질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도움을 받아야 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사람들이 자살하는 경우들이 생기는 이유는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라고 생각해요. 남들에게 도움을 주면 동시에 자기도 도움을 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청년들이 나누고 섬기고 돕는 방향으로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말씀 드릴 것은 청년들이 통일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과 분단되어 지낸 것이 7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련의 경우도 공산혁명 이후 70년 만에 붕괴되었거든요.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건 오래 가지 않을 거예요. 언젠 가는 깨질 것입니다. 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은 70년 동안이나 다르게 가져왔기 때문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청년들이 그런 사람들하고 만나야 될 것이고 손을 잡아야 될 것이니까, 넓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마음과 생각들을 가지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10. 더 편하고 좋은 환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쉽게 믿음과 신념을 포기해버리는 것 같습니다. 청년들이 믿음과 신념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어느 시대에서든 모든 것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습니다. 그 어려움이라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좋은 점은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좋지 못한 것과는 단호하게 멀리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하지 않을까요? 우리 청년들이 언제 어디서나 바르고 떳떳하게 사는 그런 삶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도전하십시오. 한 번 해 보십시오! 우리나라가 더욱 아름다운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저와 같은 나이 많은 사람들은 여러분을 대신해서 나설 수가 없습니다. 후원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힘껏 뒷받침 해 드리겠습니다. 해 보세요!

 

[맺음]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가겠다는 두봉 주교. 가을 하늘 가득 담긴 얼굴에는 60년 전 청년 두봉의 미소가 가득하다. 최고의 사랑과 최고의 행복이 대한민국 청년들의 가슴 속에 새로운 희망으로 불타오르길!

[위 기사는 바름협동조합 격월간지 ‘링커’ 4호의 허락아래 게재된 제휴기사입니다. 더 생생한 이야기는 유투브 <Linker TV>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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