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2 화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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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지의 삶이지만 울타리는 없었다’(1)
안동과 예천, 두 고을을 품은 학가산 둘레길을 가다
[안동청년기자연합 기획연재]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2)
2016년 03월 30일 (수) 16:24:22 김희철/피현진 mycart@ugn.kr

안동과 예천 두지역의 경계를 찾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삶과 문화에 대해 알아본다. 본 테마는 산과 강, 도로를 중심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리적 요소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번 글은 먼저 양 지역 경계의 시작인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와 예천군 보문면 기곡리에서 부터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와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까지 이다. (편집자 주)      

안동과 예천은 같은 문화권으로 두 지역은 인구나 면적 등 규모면에서 타 시군에 비해 뒤지지 않는 자치단체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안동의 인구는 전국 74개 시(市)중에서 45위(168,157명), 예천군(郡)은 전국 85개 군 중 44번째(46,579명)이다. 행정구역 면적의 크기는 안동은 전국 평균 면적의 3배에 이르는 1위(1,521.82㎢), 예천은 전국 평균 면적(665.91㎢)과 비슷한 661.07㎢이다. 특히 두 지역은 역사성, 지역성, 문화, 생태, 환경적 요인이 우리나라 타 지방자치 단체와 비교해 전혀 부족함이 없다.

   
►안동에서 지도로 보는 안동과 예천의 경계지역. 안동시가지에서 북서쪽에 있는 학가산을 중심으로 안동의 2개면과 예천의 1개면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안동과 예천은 도청유치 마감일을 이틀 앞둔 2008년 5월 13일 오전 11시 안동·예천 경계지점에서 양 지역 대표 각각 50명이 참석한 가운데 도청공동유치를 천명, 다음날 14일 전격 신청해 화제가 됐다.

양 지역의 공동이전 신청에 83명의 평가위원들은 국토의 균형발전 차원에서, 또한 공동신청의 협력정신을 높이 받아들여 2008년 6월 8일 저녁7시 안동·예천 지역이 공유하는 천하제일 명당을 도청이전지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감격스러운 경사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지리적 환경과 긴 역사 문화생활 속에서 지역의 정체성을 같이해 온 이심전심의 이웃 공동운명체 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양 지역은 각각 4개면 지역이 머리를 맞대고 있으며 학가산(882m)은 안동의 진산(鎭山)이자 또한 예천의 진산이기도 하다. 특히 신도청 지역의 주산(主山) 또한 안동과 예천이 함께 공유하면서 좌청룡은 안동의 가일마을 뒤 정산이고 우백호는 예천의 거무산 이다.

   
►학가산 정상에서 보는 신도청 이전지와 검무산. 안동과 예천은 2008년 5월15일 도청유치 마감일을 하루 앞두고 공동유치를 천명해 검무산 밑 천하의 명당자리로 도청을 유치하기에 이른다.

지난날 안동사람이 육로로 한양을 오르내릴 때는 반드시 예천 땅을 경유해야만 했으며 지금도 안동사람들은 예천을 지나는 고속도로를 이용하고 있어 공동의 교통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예천은 광활한 평야의 풍부한 물과 산을 자원으로 한 농업 생산기능을 하고 있고 안동은 농업생산과 생산물 유통기능의 중심지 역할을 함으로써 상호 상거래의 보완적 기능 또한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안동과 예천은 지리적·역사적·경제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솟아 오른 학가산과 내성천, 낙동강이 흘러가는 시·군 경계의 행정 면(面)과 마을에 오롯히 잠들어 있는 삶과 이야기를 양 지역은 공유하고 있다.

   
►학가산 정상에서 보는 또 다른 방향의 안동과 예천의 경계지역이다. 학가산에서 시작된 안동과 예천의 경계가 멀리 보이는 보문산까지 이어진다. 보문산 정상 능선이 안동과 예천의 경계지역인 것이다.

 안동·예천 경계의 시작과 끝
-영주에서 살며 예천에서 농사짓고 안동땅을 넘나들며 살아가고 있다

안동과 예천의 행정구역은 왕조가 바뀌면서 조금씩 그 경계를 달리해 왔다. 고려 개국의 결정적 공로를 인정받은 안동은 서기 930년 고창군에서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고 고려 성종 14년에는 군위, 의성, 봉화, 영주 등 14개 군현을 관할하는 광역의미의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이후 조선 성종 2년에는 당시 전국 4개 대도호부 가운데 하나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다 일제에 의해 안동에 속해있던 감천면이 예천군에 편입되고 안동군과 예안군이 병합하여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가 찾아보고자 하는 경계지역은 근대 이후에 자리잡은 안동과 예천의 경계를 말한다.

예로부터 땅은 산맥과 강을 중심으로 선을 형성하며 그 경계를 이루어 왔다. 안동과 예천 역시 북으로는 문수지맥의 가장 큰 봉우리인 학가산의 북쪽 끝을 시작으로 서남향으로 내려오며 갈마령, 보문산, 대봉산을 지나 경북 도청 소재지의 주산인 검무산을 거쳐 낙동강과 예천이 처음으로 만나는 예천 보문면 신풍리와 안동 풍천면 신성리를 경계로 남쪽 끝을 형성하고 있다.

안동과 예천 경계의 시작점은 공교롭게도 봉화 물야면 오전리 선달산(1,236m)에서 발원하여 영주 무섬마을에서 소백산의 세 지류와 합한 내성천이 학가산과 만난 지점이며 영주 문수면 조제리와 예천 보문면 기곡리, 안동 북후면 석탑리가 만나 서로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학가산이 동서로 날개를 펼친 학의 형세라면 내성천과 만나는 이곳은 학이 노닐 수 있는 생명의 터전으로서 풍수의 조화를 이루는 길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곳에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작은 나루터가 있어 안동과 영주 예천을 연결해 사람들이 왕래 하도록 도왔다. 이 나루터는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와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 예천군 보문면 기곡리를 오가며 농사 등 이 지역 사람들이 경제 활동을 하는데 아주 중요한 나루였는데 도로의 발달로 1998년 석탑교가 건설된 이후 나루터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안동, 영주, 예천의 경계지역이다. 사진 아래 보이는 작은 실개천이 영주와 예천의 경계이고, 사진 왼쪽에 보이는 산의 골이 안동과 예천의 경계라고 지역 주민들이 말해주었다.

이곳에서 만난 어느 노부부는 예천과 영주가 갈라지는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예천 영주 갈라지는데? 저기 작은 도랑이래"라며 손짓한다. 영주와 예천은 작은 물길을 사이에 두고 갈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영주 문수면 멱실이라는 마을에 살며 예천 기곡리 느릅실에서 농사를 짓고 안동땅을 넘나들며 살고있다. 안동과 예천은 영주와 예천의 경계지점에 서있는 단양우씨 열녀비각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내성천과 접한 학가산 계곡을 경계로 하고 있다.

이들 노부부는 “1998년 석탑교가 생기기 전에는 안동으로 가려면 나루터를 이용해 건너가거나 다른 도로를 따라 빙 둘러 갔다"며 "나루터는 그저 사람의 간단한 물건만 실어 나를 수 있었을 뿐 많은 물건을 옮기려면 다른 길을 통해 돌아가야 했다”고 말해 주었다.

이렇듯 안동과 예천의 강과 산이 어우러져 예천 보문면, 호명면, 지보면이 안동 북후면, 서후면, 풍산읍, 풍천면과 서로 만나 접경을 이루어 삶과 문화를 함께 공유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안동과 영주의 경계지역인 내성천. 석탑교 밑으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데 이 석탑교를 건너면 영주땅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내성천 앞 작은 산은 예천 땅이다.

 학가산(鶴駕山)

–혼탁한 세상 곧은 절개를 지키는 독야청청한 산

학가산은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서후면 자품리와 예천군 보문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또한 양 지역의 진산으로 안동과 예천, 영주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산이다. 동쪽으로 영양 일월산(日月山), 서남쪽으로 대구 팔공산(八空山), 멀리 북쪽으로 소백산맥이 아련히 보이고, 영남의 북부 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 부근은 동서로 길쭉하고, 높이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봉우리 4~5개가 500m에 걸쳐 솟아 있다. 서쪽 끝자락은 안동과 예천의 경계다.

   
►천주마을에서 본 학가산의 모습이다. 사진 왼쪽 학가산이 안동과 예천의 경계지역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학가산은 학이 앉았다 날아가는 형상 같다고 하여 학가산(鶴駕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영주에서는 정상이 평평하게 보여 선비봉, 안동에서는 울퉁불퉁하게 보여 문둥이봉 혹은 문필봉이라 하며, 예천에서는 그 모습이 수려한 인물과 같다고 하여 인물봉으로 불린다.

산 아래 자품리 주민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마을에서 재주가 많고 인품이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것을 시기하여, 재품리(才品里)였던 마을 이름을 '놈 자(者)'를 써서 자품리(者品里)로 격을 낮추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아름다운 학가산의 이름도 원래는 학가산(鶴駕山)이 아니라 학가산(鶴佳山)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안동에서 문둥이 봉으로 불리는 '학가산' 이지만 필자가 느끼는 학가산은 홀로 우뚝 솟아 있는, 혼탁한 세상에서 홀로 높은 절개를 지키는 독야청청한 산으로 보인다. 그래서 문필봉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문둥이라는 것도 문필봉을 바라보며 글공부 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뜻의 문동(文童)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반대로 예천에서 바라보는 학가산은 휘하에 비슷비슷한 크기의 작은 봉우리들이 켜켜이 늘어서 있다. 마치 물결이 파도치듯, 논 가운데 짚가리를 쌓아놓은 듯, 이러한 형태의 산을 수(水)형산이라 하여 부자가 나는 산이라 하는데 예천에 알부자가 많다는 소문이 소문만은 아닌 모양이다.

학가산은 안동과 예천 경계에 있다 보니 다양한 등산로가 존재한다. 그 중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등산로는 광흥사에서 오르는 코스와 좀 더 올라 천주마을에서부터 오르는 코스다.

천주마을에서 학가산을 오르다보면 산마루 부근에 울창한 소나무 숲과 참나무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은은한 향기를 뿜는 하얀 함박꽃나무 군락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봄이면 산중턱이 매화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 골짜기가 깊지 않고 사면이 가팔라 큰 짐승들이 살지는 않는다. 그 중 연령이 있는 소나무들을 보면 깊게 V자 모양으로 훼손돼 있는 나무들이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송진을 채취하기위해 훼손 된 것으로 1천 그루가 넘는 나무들이 일제에 의해 상처를 입었다.

   
►천주마을에서 학가산을 오르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너른 바위로 마당바위라 불린다. 약 20명의 사람들이 올라설 수 있는 바위로 등산객들에게 좋은 쉼터가 되는 바위다.

경치 구경을 하며 산행을 하다 힘들다고 생각되는 시점에 마당바위가 나타난다. 마당바위는 천주마을 주민들에 의해 불리어진 이름으로 약 20여명이 올라갈 수 있는 평평한 바위인데 옛날에는 나무꾼들의 쉼터이자, 무속인들 신앙의 대상이 되던 바위다. 현재는 등산객들이 땀을 식히고 숨을 고르는 좋은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석문과 신선바위를 비롯해 각종 기암절벽을 지나다보면 동학가산성이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그 옛날 학가산에는 두 개의 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둘 다 자연지형을 이용해 쌓은 석성으로 언제 만들어 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어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국사봉 정상에 거의 도달할 때쯤 우리나라 대표 방송국들의 중계시설과 통신시설을 만나게 된다. 안동 인근에 높은 산이 없어 학가산에다 설치했겠지만 눈에 거슬리는 것이 사실이다. 예전에는 통신대가 있어 학가산 출입이 통제되기도 했다는데 필요한 문명의 이기라 여기며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나라 주요 방송국의 중계시설과 통신시설이 학가산 정상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안동이 경북북부지역의 중심도시다 보니 안동 그 중에서 가장 높은 학가산에 자리 잡았겠지만 대자연과 어울리지 않는 시설이라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시설이기도 하다.

국사봉은 학가산 7개 봉 중 최고봉으로 학의 머리 혹은 학위에 탄 신선의 모습이라고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나라에 제사를 올리기도 한 봉우리다. 국사봉에 오르면 사방이 확 트이고 조망이 시원하다. 또한, 정상에서 부는 시원하고 깨끗한 산바람은 산행에 지친 온몸의 땀을 싹 씻어준다.

국사봉 정상에서 보는 경치는 천하절경은 아니다. 하지만 안동·예천 사람들에게는 평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일단 날이 좋으면 안동시가지는 물론 영주시가지와 예천읍내, 내성천, 풍산들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우리가 산에 오른 이날은 미세먼지로 인해 탁 트인 시야를 선물하진 않았다.

국사봉 정상은 취재팀의 테마인 '안동·예천 경계지역을 가다'란 글을 쓰기 위해 첫 번째 답사 장소로 정한 곳이다. 그 이유는 국사봉에서는 안동·예천의 경계지역인 풍산읍, 풍천면, 북후면, 서후면(이상 안동시), 감천면과 보문면, 호명면, 지보면(이상 예천군)이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능인대사가 수행과 포교를 했다는 능인굴이다. 능인대사는 8방9암자의 모델을 제시한 학가산의 개산조로 석탑리 전설에도 등장한다. 현재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 등산객들의 목을 축여주는 장소가 됐다.

국사봉에서 내려와 우측으로 길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작고 좁은 동굴인 능인굴이 있다. 이곳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이 있어 등산객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 능인굴은 신라 신문왕 때(680년 경) 능인대사(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가 수행과 포교를 했던 거처로 봉정사와 개목사의 창건주이자 천등산의 천등굴에 얽힌 전설과 석탑리의 석탑 설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승려이다. 또한, 능인굴에서 수행과 포교에 힘써 학가산 주변 아홉 개의 절을 이루고 오늘까지 8방 9암자의 모델을 제시한 학가산의 개산조라 할 수 있다.

능인굴을 지나 서학가산성으로 발길을 잡다 보면 무선중계 시설물을 조금 지나 예천군 산악회에서 세워놓은 또 다른 예천 국사봉 정상석이 있다. 안동과 예천의 진산인 만큼 학가산을 둘러싼 양 지역의 치열한 자존심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 학가산이기도 하다.

 석탑리(石塔里)

–안동, 영주, 예천 사람들의 자존심이 담긴 전설이 내려온다

학가산을 내려와 안동과 예천, 영주가 경계를 이르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 중 석탑리는 내성천을 사이에 두고 예천 보문면 기곡리와 영주 문수면 조제리가 경계를 이루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추곡리와 신전리 일부와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 일부를 병합해 석탑리가 됐다.

   
►석탑리방단형적석탑. 학가산 뒤에 있는 석탑으로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며,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석탑이다.

석탑리는 이곳에 석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의 석탑은 '방단형적석탑(方壇形積石塔)'으로 각 층이 넓은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돌무지 네모 탑으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석탑은 5단이며 한 변이 13m에서 13.6m이고 높이는 5.3m 정도인데, 원래는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각 층마다 바깥에는 반듯한 판돌 4장을 쌓고 안에는 막돌로 채워 넣었다. 고구려식 무덤과 비슷해 고구려 전성기인 장수왕 때 쌓았던 탑이라는 주장도 있다. 서울 석촌동에도 고구려식 백제 돌무지무덤이라고 하는 층단형 무덤이 있다는 점과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진했던 사실에 비추어 이 탑이 불탑이 아니라 장수왕이 기념으로 쌓은 탑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학가산 서쪽에 있어 '학가산 석탑'이라고도 불리는 이 탑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한 가지는 능인굴에서 소개됐던 능인대사와 관련된 전설인데 삼천 승려들이 수도를 하던 영주 부석사에서 어느 아침 공양 시간 평소와 다름없이 발우를 펼치고 전발게(발우를 펴면서 외는 게송)를 염불 후 각자 앞에 놓여 있는 밥통을 끌어다 밥을 푸려고 하는 순간 분명히 4명이 한조를 이루도록 밥 한통씩이 놓여 있었는데 전발게를 외우는 사이 그 밥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에 갓 스님이 된 사미승은 자신이 잘못 본 것으로 여기고 급히 공양간 보살에게 밥 한통을 더 달라고 했다. 그러나 공양을 올린 보살은 분명 맞게 올렸으므로 그렇지 않다고 맞섰다. 그런데 그날 저녁 또 밥 한통이 감쪽같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없어지기 시작한 밥 한통은 이튿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계속 없어졌다. 이렇게 공양들이 차례로 없어지자 스님들은 서로 시비가 붙고, 드디어는 싸움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스님들은 부석사 조실스님을 찾아가 그 연유를 밝히고 대책을 물었다. 이에 조실스님은 "허허 이싱할 것 없지 공양이 한 그릇씩 없어진다는 것은 누군가 먹기 때문이 아닌가? 허나 공양 도둑은 부석사 안에는 없다. 조석으로 부석사 공양을 한 그릇씩 가져가는 사람은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학가산의 능인대사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삼천명의 스님들은 분풀이를 하기로 하고 돌을 하나씩 들고 능인대사를 찾아 갔다. 이들이 학가산 북쪽 산등성이에 이르자 능인대가가 삼천 승려들 앞에 나타나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도둑은 한 가지 죄, 잃은 놈은 열 가지 죄라 했는데 오히려 잃은 놈들이 나를 벌하러 왔느냐?"고 빈정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고 흥분한 스님들이 돌을 던지려고 하니 능인대사가 눈을 부릅뜨고, "살생을 금하고 자비를 추구하는 사문들로서 이것이 웬 추태인가? 오히려 자기의 공양을 남에게 주는 베풀음을 행해야 하거늘 자기의 공양을 빼앗겼다고 속세의 무리들처럼 살생을 하려드는가? 시주밥을 먹고 수행하는 출가사문이 올바로 수행치 않기에 내가 밥이 아까워 한 통씩을 가져와 가난한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느니라"하고 준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엄한 꾸중에 부석사 삼천 승려들은 크게 깨달아 능인대사를 죽이려고 들고 온 돌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탑을 쌓았는데 그게 오늘날 석탑리의 석탑이라는 설이다.

다른 전설은 명인도사(明認道士)와 마고선녀(麻姑仙女)의 이야기다. 두 사람은 바위로 만든 집에 살면서 돌로 만든 신을 신고, 돌로 만든 말을 타고 다녔다. 또 신통력으로 소백산을 왕래하면서 돌밥을 날라다 먹었는데, 이 탑의 돌은 그들이 남긴 흔적이라는 설이다.

이 ‘방단형적석탑(方壇形積石塔)’을 지나 928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보면 내성천이 나오고 석탑교가 나온다. 이 석탑교 가운데가 안동과 영주의 경계지다.

석탑교를 건너 내성천을 따라(문수로) 1~2km정도 내려가다 보면 영주와 예천이 맞닿아 있는 영주 문수면 멱실과 예천 보문면 기곡이 만나고 그 내성천 건너 학가산 골이 안동 북후면 석탑리다. 영주와 예천은 작은 실개천을 경계로 하고 있고, 두 지역과 안동은 내성천과 학가산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학가산자연휴양림

-사계절 휴양시설 자연이 준 선물

안동 석탑리를 따라 내려가다 석탑교 위로 내성천을 건너면 바로 인접한 예천 우래교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한참 학가산을 오르면 예천군에서 관할하는 학가산 자연휴양림이 나온다. 안동시 북후면과 예천군 보문면 접경 지역 깊숙한 곳에 위치한 덕에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을 간직한 청정지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예천 학가산 자연휴양림. 학가산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찾는 이들에게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예천의 대표적 관광명소이다.

학가산 북쪽계곡에 위치한 우래 자연휴양림은 중앙고속도로 예천 IC에서 약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가는 길 또한 내성천의 아름다운 물길을 따라 이어져 호젓한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최상의 코스다.

자연휴양림에 들어서면 울창한 숲 속에 자리잡은 통나무집들이 주위 나무들과 계곡, 바위와 너무도 잘 어우러져 마치 드라마 속에 나오는 고급 별장에 온 듯하다. 통나무 집 안으로 들어서면 편백나무의 테르펜향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특히,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이 내부 분위기를 안락하게 만들어 준다.

학가산 우래 자연휴양림은 다양한 평수의 숲속의 집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최대의 장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친지간의 여행이나 기업체 및 웬만한 단체여행의 인원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시설 면에 있어서도 짜임새 있게 잘 배치되어 있다. 휴양림 위로, 사람이 학을 타고 노니는 형상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학가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나 있고, 기타 부대시설로 캠프파이어장, 야외무대, 어린이놀이터, 체력단련장, 물놀이장, 강의동 등을 갖추고 있어 사계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광흥사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온 한글 유적지 명소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신라의 승려 의상(義湘)이 치악산(雉岳山) 구룡사(龜龍寺)를 세운 직후인 669년(문무왕 9)에 창건하였고, 그 뒤 수차례 중수(重修)·중창(重創)하여 대찰이 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인 광흥사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불교서적을 문론 왕실과 선비들의 책을 출판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사찰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유명해진 사찰이다.

광흥사는 1827년 화재로 인해 시왕전과 일주문을 제외한 5백여 칸의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됐으며, 일제강점기 말 종교탄압 등의 영향으로 관리가 되지 않아 거의 폐사(廢寺) 상태에 이르게 된다. 또한, 광복 후인 1946년 대화재가 발생해 대웅전이 소실되고, 1954년에는 극락전(極樂殿)이 무너지는가 하면 1962년에는 학서루(鶴棲樓)와 대방(大房)이 도괴됨으로써 중요한 전·각 들이 거의 없어졌고 현재는 응진전(應眞殿-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55호)만 남아있는 상태다. 이렇게 되자《취지금니묘법연화경(翠紙金泥妙法蓮華經)》(보물 제314호)과 《백지묵서(白紙墨書)묘법연화경》(보물 제315호) 등 중요 문화재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광흥사가 왕실의 원찰이 된 것은 혜각사 신미와 등곡, 학조와 인연이 있어서다. 두 승려는 세종부터 세조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왕실의 신뢰를 받았으며, 그 중 학조대사는 안동 출신으로 보백당 김계행의 형 김계권의 장자이다. 불교서적의 한글 언해본을 간행하기 위해 1461년(세조7년) 설치한 간경도감이 1471년(성종2년) 중신들의 반대로 폐지된 이후 광흥사는 출판업무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 한글언해본인 월인석보, 선종영가집언해 등이 광흥사에서 발견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광흥사가 최근 주목받게 된 것도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와 관련이 있다. 훈민정음해례는 광흥사 응진전 나한상의 복장유물이었는데 절을 지키는 스님보다 도둑이 먼저 알고 훔쳐갔을 정도로 훈민정음과 관련된 유물이 많은 사찰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광흥사는 역사적인 한글 유적지의 명소가 되었다.

광흥사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절도범에 의해 광흥사에서 도둑맞은 것으로 절도범의 진술에 따르면 “광흥사 응진전의 나한상 등에 들어 있던(복장·腹藏) 수십 권의 고서를 절취했는데 그 중 한 권이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70호와 동일 판본인 상주본이었다”고 밝혀 광흥사에서 해례본이 나왔음을 인정했다.

이후 광흥사와 조계종 총무원은 복장유물(불상을 만들 때 불상 안에 넣는 불경 등 문화재)의 도난 방지를 위해 10여 개의 시왕상들을 개복하는 과정에서 안에 있던, 15개 상자 분량의 고문서들을 발견했는데 확인 결과 고려말기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전까지 2백여 년 사이에 간행된 고문헌 250여건이었다.

광흥사 주지 범종 스님은 “한글로 된 고서도 많이 나온 점 등으로 미뤄 광흥사가 한글 창제 및 반포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특히, 1213년 간행된 것으로 기록돼 있는 '종경촬요'와 1387년 고려 우왕 때 간행된 ‘대혜보각선사서’ 등 불교 교리와 관련된 것들이 많았으며, ‘대혜보각선사서’에는 목은 이색의 발문도 있었다. 또한, ‘월인석보’나 ‘선종영가집언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담고 있어 한글의 변천사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광흥사는 응진전(應眞殿)·응향각(凝香閣)·칠성각과, 화재 뒤 복원된 대방(大房) 및 정면 8칸, 측면 3칸의 요사채 등이 남아 있으며, 최근 대웅전을 새롭게 건설하는 등 과거의 영광을 찾기 위해 불교계와 신도 등이 계속 노력하고 있는 사찰이다.

 천주마을과 애련사

-갈림길에서 만난 두 지역의 유별난 학가산 사랑

학가산 반대편의 또 다른 경계지를 찾아가기 위해 안동의 서후면 자품리의 천주마을과 예천군 보문면의 산성리를 찾아 다시 방향을 잡았다. 이 곳 경계를 가기 위해서는 천주마을을 지나야 한다. 천주마을은 안동 시내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학가산 바로 아래 위치해 있으며, 학가산을 등반하려는 사람들이 천주마을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한다.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를 넘어가기 전 만나게 되는 천주마을. 천주마을이라고 해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모여 살았던 마을로 오해하면 안 된다. 깎아지는 절벽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이 천주마을이라 천주교와 관련지어 천주교가 박해를 받던 시절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천주마을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이 하늘거미가 줄을 친 형국이라 산 모양이 느릿(느릇)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학가산 정상으로 오르는 깎아지른 절벽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 같다 하여 천주라고도 했다.

천주마을을 지나 경계지로 가기 위해 길을 잡다보면 애련사가 나온다. 애련사는 창건자와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절 이름은 선암사(仙巖寺), 애련사(艾蓮寺), 예련사(刈連寺) 등으로 불리어졌고, 고승 학조대사(등곡)가 이곳에서 득도해 애련암(愛蓮菴)으로 고쳐 부르기도 했으나 신라시대부터 학가산 중심부에 위치한 8방 9암자 중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학조대사는 세조의 명에 따라 해인사 대장경 50벌을 인경 했으며, 판전 40간을 다시 지어 오늘날 해인사를 있게 한 고매한 학승으로 말년에 이곳에 다시 돌아와 입적했다. 풍산읍 소산마을 출신으로 병자호란 때 척화파 거두 청음 김상헌 선생이 1641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기 직전 4년 동안 이곳에서 와신상담하던 은둔지로도 알려져 있다. 현재는 다소 초라한 암자로 보이지만 역사가 깊은 곳임에 틀림없다.

   
‣당재. 안동 천주마을에서 예천 산성리를 넘어가는 경계
   
►당재에서 바라본 학가산. 사진 오른편 높은 봉우리 옆이 안동과 예천의 경계지역이다.

이 곳 애련사를 지나 조금 가다보면 또 하나의 안동과 예천 경계지가 나온다. 이곳이 당재이다. 큰 도로도 아니고 시멘트 포장이 된 작은 농로 길인데 안동↔예천 이정표만 없다면 그냥 시골의 작은 농로에 불과한 곳이다.

이곳 농로에서 학가산을 바라보면 산의 능선들이 힘차게 뻗어 나가고 있는데 이 능선 중앙이 안동과 예천을 나누는 경계로 짐작된다. 동네사람들에게 물어 봤지만 예천 사람들은 안동의 국사봉 바로 밑부터 예천땅이라 하고 안동사람들은 학가산 서쪽의 30%정도만 예천 땅이라며 서로 주장을 달리하는데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지형도(축적 1/25,000)에서 안동 학가산의 높이는 870m(좌측 예천쪽 정상 봉우리)로 표기되어 있으나 1/5,000 지형도에서 가장 높은 곳을 확인한 결과 능선 중간쯤에 874m 봉우리가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874m 봉우리가 우리가 알고 있는 국사봉 정상(882m)이고 예천 안동 경계의 정확한 위치는 그 국사봉에서 예천쪽 정상석이 있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안동 학가산 정상 국사봉의 정상석(사진 왼쪽)과 예천군 산악회에서 만든 예천 학가산 정상석(사진 오른쪽)

 예천 산성리와 안동 신전리

-가슴 아픈 현대사를 기억하고 있는 산. 그리고 사람들

이 경계지를 넘으면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다. 이 곳 경계지(약 해발 400m)에서 내려다보는 산성리는 이 글에서 그냥 이름 정도만 밝히고 넘어가도 될 그저 작고 평화로운 산간 마을에 불과해 보인다. 하지만 이곳 산성리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맞은, 아픔을 간직한 마을이다.

   
►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예천군의 산간마을 산성리 전경.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중공군 참전 후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군력을 동원해 무차별 폭격을 감행한다. 그 속에서 많은 민간인들도 희생됐는데 이 산성리도 그 피해지역 중 하나이다.

1951년 1월 19일 산성리에 오후 2시 50분, 3시 40분, 3시 55분 세 차례 폭격이 행해졌다. 당시 미군의 정찰임무보고서를 보면 그냥 폭탄이 아니라 네이팜탄과 로켓을 이용한 폭격이 행해 졌음을 알 수 있다. 이 폭격으로 69호에 이르던 마을이 초토화 되고, 사망과 실종 64명을 포함해 136명의 사상자를 낸 우리 현대사의 가슴 아픈 동막골이다.

1951년 1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지만 산성리는 평화롭기만 했다. 산성리 마을주민 안태기 씨(주민대책위원장)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지만 깊은 산골에 살다보니 전쟁은 소문만 무성한 남의 일 이었고, 폭격을 받은 이날도 마을 사람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가 신기해 하늘의 비행기를 구경하다 변을 당했다"라며 "당시 정찰기가 한차례 마을을 돌았는데 비가 왔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비가 아니라 마을을 불태우기 위해 뿌린 휘발유였다"고 증언했다.

그는 "하늘에서 보면 이곳 산성리와 학가산 넘어 반대편 안동 신전리가 골의 생김새, 마을이 자리잡은 위치 등이 너무 유사해 미군이 신전리로 착각해 폭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그 당시 신전리에는 북한군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 마저 폭격이 있기 하루에서 이틀 전에는 이미 이동하고 없었다고 들었다"라고 답했다.

1952년 미8군과 5공군의 감찰감이 합동으로 조사해 보고한 '합동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산성리 뒷산인 학가산에 북한군 10사단이 집결한다는 적정보고가 있었고, 미군은 소개령을 내린 뒤 마을을 폭격하고 '폭격 대성공'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정작 소개령은 폭격을 당한 산성리가 아니라 학가산을 사이에 두고 있는 신전리에 내려졌고, 네이팜탄은 산성리에 쏟아져 내린 것이다.

   
►산성동미군오폭희생자위령비. 2010년 6월 24일 예천군과 산성리 주민들이 위령비를 조성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미군 오폭 사건으로 희생된 희생자들의 이름.

이날 폭격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주민은 남자 18명, 여자 33명 등 51명이나 됐으며, 특히 사망자 가운데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16명이나 됐을 정도로 결과는 참혹했다.

안태기 씨는 “좌익이 뭔지도 몰랐던 마을을 이렇게 무참히 박살내고 억울한 사람들을 만들었으니 명예회복은 물론이고, 정당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며 “그동안 국방부에서 한차례 다녀갔을 뿐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미군 폭격은 없었지만 전쟁의 아픔은 학가산 너머 신전리도 다르지 않았다.

예천임씨 집성촌을 이루며 대대로 평화롭게 살아왔던 마을사람들은 북한군이 있다는 정보로 인해 마을사람들이 잡혀가 총살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주민에 따르면 “당시 70호 정도가 살고 있었는데 마을주민 여러 명이 서후면 대흥초등학교 뒷산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고 증언했다.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 학가산을 사이에 두고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와 함께 전쟁의 아픔을 겪은 안동의 대표적인 마을이다.

이렇듯 학가산은 안동과 예천주민들의 가슴 아픈 현대사를 기억하고 있는 산이며 지금도 여전히 그 후손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며 공유하고 있는 산이다.

<다음호에 계속>

[안동청년기자연합·안동아카이브연구회 공동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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