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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 오면 누구나 자신을 낮추게 된다'
저마다 사연으로 묵묵히 살아온 나무이야기
[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15)
2017년 12월 24일 (일) 10:29:33 정홍식 (전 안동시의원) kbinin@gamil.com

   

▲ 1930년대 안동읍내 시가전경(1). 우편엽서 뒤 옛안동 시가지 모습. 아래 (2) 사진을 우측에 놓고 보면 시내전경이 고스란히 보인다.  (사진제공:남후자)

   

▲ 1930년대 안동읍내 시가전경(2). 우편엽서 뒤 옛안동 시가지 모습 (사진제공:남후자)

그런 시절 있었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너나없이 배고프고 가난했던 시절! 먹을 것도 귀했지만 땔나무조차 귀했던 시절! 모두가 가난해서 가난이 부끄럽거나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않았던 그 시절, 사람들은 마른버짐 핀 얼굴로 기계충 번진 민둥 야산을 돌아다니며 땔감과 먹을 것을 찾아 다녔다.

식민시대의 수탈, 전쟁으로 인한 파괴, 재건시대의 남벌 등 혹한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국토의 70%를 차지한 우리 산하의 민둥산화는 50%를 넘었다고 기록된다. 전후 UN보고서(1969) 조차 “국토의 절반이 민둥산화 되고, 풀 한 포기 없는 산은 8%에 달해 산림 황폐화를 극복할 수 없는 참담한 국가”로 까지 규정되었던 나라!

그래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신 늘 가난과 굶주림에 찌든 백의의 국민들이 잿빛 민둥산을 배경으로 영혼 없이 서서 찍은 흑백 사진들만 근대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나라!

그러나 박정희시대 새마을운동과 연계된 ‘치산녹화운동’은 세계에 유례없는 민둥산의 기적을 일구었고, 가장 단기간에 세계 4대 산림강국으로 도약시켰다.

산림 회생 불능국가로 규정했던 1969년의 UN보고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복구에 성공한 유일 국가(1982년, UN FAO)”로 다시 보고서를 내 놓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십 수 년이었다.

그 배경에는 박정희 군부의 강력한 치안력과 행정·통제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남기 위해 나뭇가지를 줍고, 잡초검불에 솔방울까지 깡그리 쓸어와 추운 겨울 군불 때며 밥 지어 먹던 소위 그 시절의 정부로부터 ‘인간송충이’로 낙인 찍혔던 국민들의 강제부역 녹화사업과 이렇게 해서라도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보자는 당대의 자기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 1969년 6월20일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마을에서 송충구제 작업을 한 후 동원된 마을주민 숫자를 파악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배대연)

우스갯소리지만 박정희정권의 ‘녹화사업’은 뒤이은 5공화국 전두환 정권에서는 대학내외 집회 차단을 목적으로 불온사상으로 판단되는 대학생들을 강제 징집시키던 제도로 변질되어 청춘들의 사상까지 마구잡이 벌채하는 사업으로 또 유명세를 떨쳤다.

공식으로는 ‘소요관련 대학생 조기 입영제’였던 이 녹화사업은 1981년부터 시작되어 강제 입영시킨 대학생들에게 고문을 수반한 가혹행위 등으로 사상전향을 유도했다. 이후 다시 학교로 복귀시켜 정보 프락치로 이용하다가 사회 이슈화되어 결국 1984년에 공식중단이 선언되었다.

녹화사업의 대상자가 5,000여 명까지 되었다고 하니 사상의 자유를 말살하고 프락치 공작 세포 줄기 나무들을 대학가에 심고자 했던 전두환정권의 사상 녹화사업도 가히 전 세계에 유례없는 일이리라.

각설하고 그 힘들고 모진 세월의 풍파 거치며 짧게는 백 년, 길게는 천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나무들도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건재하게 살아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이 노거수들은 역사적 고사나 전설이 있는 명목·보목 혹은 성황당의 당산목, 향교·서당·정자 등에 자리한 정자목 일 뿐만 아니라 해안과 강안을 제방하기 위해 식재된 호안목, 마을 혹은 명승고적을 보호하기 위해 심었던 풍치목, 기형목 등 문화적으로 매우 다양한 삶을 살아 왔다.

이 노거수들이 만고풍상의 세월 속에서도 오롯이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렇게 문화적으로 사람과 가깝고도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의 삶에 스며든 개인 기복문화로 생명수를 더하고 마을 공동체문화로 거대한 뿌리를 내려 숭배와 보호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과 함께 한 세월이 긴 역사도시 일수록 노거수도 많다. 세월이 더하고 덧칠해진 나무일수록 이런 저런 사연도 많이 담겨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무에 깃든 전설과 설화를 아는 이들이 줄어들고, 나무들의 이야기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에 필자는 사라져가는 안동의 나무이야기를 통해 근현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종적을 찾고 기록으로 남겨 지역의 소중한 문화콘텐츠로 남기고자 한다.

사람과 더불어 사는 나무는 사람을 닮아간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시간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오랜 시간 견뎌 온 생명들은 저마다 견뎌 온 시간만큼의 감동이 있다. 더구나 세월이 지날수록 더 의연하고 당당해지는 목숨이 있다면 그보다 더 위대하고 지순한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여기, 늙을수록 더 아름다워져 가는 생명이 있다. 가만히 보지 않으면 곁에 있어도 알 수 없는 것! 그래도 여전히 사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간을 박제시키며 기억을 역사해 가는 것! 산 채로 썩어가는 가지에는 이끼가 공존하고, 썩은 그 가지조차 온전히 품은 채 그늘을 내주며 사람의 역사를 증언해 내는 그것! 나무!

도회지에서는 그 익명성과 분주함 때문에 존재감도 공존법도 잃어버린다. 그래도 나무는 묵묵히 그들의 삶을 품고 산다. 그래서 나무는 어쩌면 사람보다 더 사회적이고 인간적이다.

그렇게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나무는 사람들을 닮아간다. 문득 길가 나무에 드러난 결을 바라본다. 그리고 거기서 하마나 패였을지 모를 우리 시대의 모습을 찾아 한참을 관찰한다.

안동에 오면 누구나 나무에게 자신을 낮춘다!

누가 나에게 안동의 정체성에 대해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800년 세월 한 곳에 서 있는 안동부의 신목(安東府 神木)을 보라”고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대도호부(현재의 도청)였고, 구한말까지도 경북도의 동북부 일대 17개 군을 관장했으며, 시·군이 통합되던 1995년까지 웅부안동을 자랑하던 군청이 있었던 역사의 산실 동부동의 웅부공원!

그 곳에 가면 수령 800년을 자랑하면서도 1981년에 이르러서야 도 지정 보호수가 된 늙고 병약한 느티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 동부동 웅부공원 내 수령 800년 안동부 신목.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면 누구든 가장 먼저 이 신목을 찾아와 부임인사와 퇴임인사를 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이야기지만 언제부터인가 안동 부사(군수)로 부임하는 자는 첫날과 퇴임하는 마지막 날, 늘 이 신목에 신고하는 관례가 생겼다. 이 관례는 지방자치제가 부활되고 시장직선제가 도입된 지금도 행해지고 있으며 전국 어디어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의전을 받는다.

김휘동 전 민선시장은 “시장이 신목 앞에 서면 의전담당 직원은 가장 큰 목소리로 국태민안을 당부하고, 시장은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 꿇고 기원 드린 후 비로소 간부들과 상견례를 나누며 업무를 수행한다”고 회고했다.

이 신목 노거수가 안동부 관사 뒤뜰에 자리 잡은 사연도 재미있다. 당시 안동부 성내에는 젊은 청년들이 요절하여 과부가 득실거렸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물길이 연관된 옛 지명 영가(永嘉)에서 연유한다고 하여 물길을 바꾸고, 성내 곳곳에 목숨 수(壽)자 형으로 큰 나무를 심어 고을 수령이 그 나무를 섬기며 제사토록 했다는 기록이 이조실록에 있다.

1930년경에 조사·보고된『한국의 지리풍수』에도 언급되어 있는 걸로 보아 아마 그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 그 옛날엔 이 곳 웅부공원으로도 큰 강물 줄기가 흘렀다고 하니 분명 이 신목 역시 목숨 수(壽)자 형으로 심겨졌던 나무 중 하나일 것이다.

   
▲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 앞 회화나무. 6명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이 집안의 지맥을 끊기 위해 임청각을 가로질러 철길을 내고, 개발독재시대 안동댐 진입로 개설사업 때에도 어찌하지 못해 도로 한 가운데 살려두었던 수령 300년의 노거수.

항간에는 2008년, 누군가에 의해 절단된 임청각 도로 가운데 서 있던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 역시 목숨 수(壽)자 형으로 심겨진 나무 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다. 암흑의 식민시대에도 꼿꼿이 서 있었고, 1971년 안동댐 진입로 개설공사 때도 손대지 못한 채 도로 한 복판에 서슬 퍼렇게 서 있던 이 나무가 변을 당했을 때 안동 시민이면 누구나 안타깝고 슬퍼했다.

이렇듯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도 아니고, 위용도 잃은 신목에게 여전히 몸을 낮출 줄 아는 하심(下心)의 자세! 박정희 개발독재 지상주의조차 어쩌지 못한 나무의 존엄과 기개! 이것이 바로 안동의 정체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안동에 오면 누구나 안동의 나무에게 자신을 먼저 낮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안동 행정의 중심지였던 동부동 옛 군청사 앞.

 

   

▲ 웅부안동의 위용에 걸맞게 거대한 노거수들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행정 관청들과 어우러져 있던 안동 행정의 중심 동부동 옛 군청사 앞

수심을 걸어두던 나무! 걱정나무!

동부동 옛 군 청사 앞 신작로 길에는 걱정나무라는 별호를 품은 거대한 노거수 한그루가 또 서 있었다. 이 삼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군청, 경찰서, 법원, 지청, 소방서, 세무서, 전신전화국, 담배인삼공사에 이르기까지 관내의 모든 관공서가 집결해 있던 안동행정의 심장부였다.

그렇다 보니 일제 때도 그 나무 밑에는 유난히 많은 촌부들이 두런두런 모여 앉아 있곤 했는데 이들은 안동재판소나 안동지청의 소환, 재판 등 송사에 연루된 자들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수심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곤 해서 걱정나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해방과 전쟁 이후에도 걱정나무는 여전히 소환 당한 촌부, 촌로들의 수심을 걸어 두는 나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데 언제쯤 무슨 이유로 훼손되어 종적을 감췄는지 기록이 없다.

총 든 경찰이 정문을 지키던 그 시절의 경찰서가 1982년에 이전했고, 그 터에는 지금의 한양아파트가 들어섰으며, 1995년에는 시군통합으로 군청사가 자취를 감추었다.

불과 20~30여 년 전의 일인데 그 어떤 기록도 없이 토박이 촌로의 기억으로 전해 들어야 하는 역사가 슬프다. 이들마저 유명을 달리 하면 기록되지 않은 이 소중한 역사들은 어디에서 또 듣고 찾을까?

   
▲ 안동소방서는 1965년에 개소하여 1977년에 이곳에 청사를 준공했다가 1999년에 강변로의 현 위치로 이전했다.

 

   

▲ 안동경찰서는 1945년 개설되어 6.25당시 폭격으로 전소되었다가 1955년에 재신축 후 1982년에 현재의 당북동으로 이전했다.

 

   
▲ 법원은 1909년 안동구재판소로 설립되어 1914년에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1947년 안동지원으로 개칭되어 이 곳에 있다가 2003년에 현재의 강남동으로 이전. 검찰청 역시 1896년에 안동재판소로 개소되어 1909년 대구지방재판소 안동구재판소 검사국 1912년 대구지방 법원 안동지청 검사분국으로 개칭되었다가 1948년 지금의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으로 변경되어 법원과 함께 2003년에 강남동으로 이전했다.

나무박물관 안동에서는 나무에게도 안부를 묻는다!

사실 안동의 역사는 나무가 고스란히 말해 준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길안 용계리의 수령 700년 은행나무, 녹전 사신리의 수령 600년 느티나무, 와룡 주하리의 수령 600년 뚝향나무, 임동 대곡리의 수령 500년 굴참나무, 그리고 길안 송사리의 수령 400년 소태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이다. 여기에 하회마을의 만송정 숲과 남후 광음리의 구리 측백나무 자생지가 합해져 안동의 국가지정 천연기념물은 총 7본이다.

그러나 안동은 굳이 천연기념물 아니어도 저마다 사연으로 묵묵히 살아 온 나무들도 많은 사랑을 받는다.

관직보다 초야의 실천적 유림을 더 존경해 온 지역 풍토와 궤적을 같이 하는 것일까? 하회마을 삼신당의 수령 600년 느티나무가 그렇고, 봉정사 관내의 수령 470년 은행나무와 도산서원 경내의 수령 450년 왕버들나무가 그렇다. 안기동 석수암의 수령 400년 향나무와 학자수나무인 풍천 가일의 수령 300년 회화나무도 맥을 같이 한다. 그렇게 총 175 그루의 보호수를 소장한 안동은 그래서 나무박물관 그 자체이다.

오랜 세월 한자리에 뿌리 내리고 영욕의 시대들을 고스란히 지켜봤을 안동의 노거수들! 일제 강점기에는 잡다한 민간신앙지로 천대를 받았을 것이다. 동족상잔의 이유도 모른 채 서로 총구를 겨누며 죽어가던 어린 인민군과 국군 병사들의 눈물도 닦아 주었을 것이다. 한 생 다하고 황천길 떠나는 상여 앞에서는 함께 울어도 줬을 것이다. 그렇게 나무는 고단했던 모든 삶을 고스란히 보듬고 우리 곁에 있는데 굳이 지정보호수가 아니면 어떠랴?

보이지 않는 뿌리는 여전히 모든 세월을 감싸고, 겉으로 드러난 장대함 보다 더 큰 넉넉함으로 우리를 품고 있지 않은가! 귀 대고 가만히 들으면 나무에게도 심장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안동에서는 나무에게 안부를 묻고, 그 나무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안부와 그 나무가 허락한 시간의 안부를 물으며 공존하며 살아간다.

   
▲ 봉정사 은행나무. 고금당 뒤쪽 기슭에 있는 두 그루 은행나무는 수관이 그리 장대하지는 않으나, 연륜은 매우 깊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뚜렷한 부부수(夫婦樹)인데 독신의 수행자들이 사는 절집에 들어오게 된 것은 신라 스님들이 중국 유학에서 돌아오면서 약목(藥木)으로 들여왔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절집에서 보는 대부분의 은행나무들은 암나무라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관아에 은행알을 공출하기 위해 암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이다.

 

   
▲ 석수암 향나무. 이 나무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이 절을 창건하면서 전설이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이는 특이한 수형이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 받게 되었다.

 

   
▲ 잘리어진 임청각 회화나무. 항간에는 2008년, 누군가에 의해 절단된 임청각 도로 가운데 서 있던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 역시 목숨 수(壽)자 형으로 심겨진 나무 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다.

 

   

▲ 천연기념물 제314호 주하리 뚝향나무. 이 나무는 낡은 기와집 앞뜰에서 자라고 있는데, 선산부사를 지낸 이정(李楨)이 평안북도 정주판관으로서 다산성(茶山城) 축성의 일을 마치고 귀향할 때 가지고 와서 심었던 세 그루 중 아직 남아 있는 한 그루라고 하며,『노송운첩(老松韻帖)』에 이에 대한 내력이 실려 있다고 한다.

웅부공원! 다시 안동의 옛 심장에 서서!

그 회한의 여정 뒤로 하고 신목이 있는 웅부공원 한복판에 다시 섰다. 옛 관아의 모습을 본 뜬 동헌 영가헌과 문루인 대동루 그리고 상원사 동종을 재현한 종각! 공원 이름만큼이나 모든 것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쉽사리 마음을 주지 못한다. 역사적 기록에 근거에 복원이 아니었으니 우리 안동의 것이라는 연대감이 없고, 유장한 세월이 스며들어 있지 않으니 유산적 가치도 없을뿐더러 건축학적 미학조차 느껴지지 않는데 어찌 쉽게 마음을 허락할 수 있을까? 영가헌과 대동루라는 이름조차 2006년 시민공모로 지어진 것 아니던가?

안동향토지(저자 송지향)에 따르면 “도호부 청사였던 관아는 옛 군청과 소방서 자리에 있었고, 부사의 집무실인 동헌은 건물에 유리를 끼우는 등 보수를 해 일제 중기 무렵까지도 군청사 그대로 썼다”고 한다.

“군청 앞에는 폐문루(閉門樓)가 있었고, 왕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관원을 유숙시키고 접대하는 객사는 지금의 태사묘(太師廟) 앞에 있었는데, 그 앞에는 또 큰 규모의 관풍루(觀風樓)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도성에는 늪과 연못이 많았는데 지금의 옥정동 안동예식장 자리와 안동문화원 일대도 옛 연못이었다”고 한다.

“군청사 오른쪽에는 수령 200년 넘는 홰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를 해칠 경우에 군청에 화가 생긴다고 해 청사 신축시 건물 벽이 이 나무에 닿지 않도록 축조했다”고 하니 지금 대동루와 종각 사이에 서 있는 노쇠한 노거수를 일컫는 듯하다.

1919년, 이곳에서는 3,0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군민들이 모여 3.1 만세운동을 펼쳤고 30여 명이 순국한 자랑스러운 사적지이다. 무엇이든 새 것으로 깨끗하고 웅장하게 지어 올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진정한 웅부(雄府)란 그 곳에 남아 있는 흙, 나무, 벽돌 한 장에도 역사적 사실을 복원해 생명을 다시 불어 넣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호흡하는 일이 아닌가?

어쩌면 그때 군 청사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해 근대사박물관으로 만들고 독립운동의 성지를 기릴 작은 표지석 하나라도 세웠더라면 무미건조한 이 밋밋함과 이질감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우리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문득 돌아본 대동루, 서 있기조차 힘겨워 보이는 홰나무 가지가 무심히 동짓달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12월의 하루가 또 나뭇결로 저물어 간다.

   

▲ 하회마을 삼신당나무

 

   

▲ 도산서원 경내의 수령 450년 왕버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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