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아직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대한민국, ‘아직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 김대호
  • 승인 2009.06.01 17: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평>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1

외상 민주주의

지난 3월 초 유시민이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379페이지짜리 책을 ‘돌베게’ 출판사에서 냈다. 책의 부제는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다. 이 책은 정치인이 쓴 책 치고는 베스트 셀러 반열에 올라가 있다고 한다. 요즈음 대학을 다니다 보면 유시민 초청 강연을 알리는 현수막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이라는 표현 보다 ‘공짜 의료, 공짜 교육’이라는 표현이 이 구호의 본질을 잘 드러내주듯이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표현 보다는 ‘외상 민주주의’ 혹은 ‘외상으로 가져다 쓰는 헌법’이 책 제목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전달해 주는 듯이 보인다.

이렇게 표현하고 보면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책의 핵심 메시지는 대충 집어 낼 수 있다. 아직 갚지 못한 외상값이란 곧 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을 수호하기 위해 좀 더 흘려야 할 땀, 눈물, 피다. 이명박 정부는 외상값을 받으러 온 조폭 스타일의 채권 추심원(해결사)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명박 정부는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사랑하사, 자신들이 누리는 민주주의와 헌법이 온전히 자기 것인 줄 알고 흥청망청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보낸 사자인지도 모른다. 불순한 민중교회 목사가 있어서, 이렇게 설교하면 불순한 신도들은 ‘아멘’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쓰고 보니 회사에서 가불도 종종 하고, 주변 가게에 외상 장부까지 비치하여 외상을 하고, 월급날 맨 먼저 갚으러 다닌 기억이 있는 40대 이상에게는 외상은 친숙한 단어지만, 그 아래 세대에게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신용카드가 외상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어(死語)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나 싶다. 그러면 신용카드 청구서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책에서 제목과 관련된 설명들을 모아 보면 이렇다.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일종의 후불제 헌법이었고,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 였다.(p 22) 제헌헌법 덕분에 우리 국민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얻었다. 양성평등이 대중적 의제가 되기도 전에 여성들이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 받았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노동3권이 주어졌다. 대한민국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p 23) 나는 대한민국이 ‘아직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할부금을 다 치르지 않은 채 타고 다니는 승용차와 비슷하다.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를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다 치르지 않았다.(p 59)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무기 창고 헌법

책은 크게 1부(헌법의 당위)와 2부(권력의 실재)로 구성되어 있다. 유시민이 쓴 책 머리말에 의하면, 1부는 ‘주로 헌법의 기본권 조항을 소재로 삼아,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 실현해야 할 가치와 목표가 무엇인지’를 살핀 글이다. 2부는 ‘헌법의 절차에 따라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 받는 대의민주주의 정부와 국회의 권력이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운영되는지’를 살핀 글이다.

이 책은 1부와 2부에 걸쳐서 헌법이라는 창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살피고, 헌법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해 시시비비를 한다. 이것이 이 책의 주제곡이다. 2부의 상당부분은 유시민이 개혁당,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두번,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하면서 체험하고 고뇌하고, 느낀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구중궁궐처럼 느껴지는 정당, 국회, 행정부, 부처가 실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진솔하게, 또 재치와 해학이 넘치는 글 솜씨로 까발렸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 유명 정치인과 권력 기관들이 화려한 조명을 받는 연극 배우라면, 유시민이 까발린 것은 그 무대 뒷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속살을 보는 느낌을 준다.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현대 국가의 헌법은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더 나은 사회, 더 행복한 삶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거름으로 키워낸 꿈(이상)과 지혜의 결정체이다. 또한 헌법은 국가와 구성원 간의 책임(권리)과 의무를 명시한 계약서다. 이는 현행 헌법 제 2장(헌법 제 10조부터 39조)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국민의 의무는 교육, 근로, 납세, 병역 의무 뿐이다. 그러나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는 대단히 많고 또 상세하다.

본래 계약서는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잣대이자, 상대에게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무기이다. 헌법 자체가 인류의 이상을 총화 했고, 또 국가의 의무 및 국민의 권리를 상술해 놓았기에 국민에게 그만큼 무기가 많이 쥐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기는 헌법 제 11조부터 37조에 이르는 기본권 조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헌법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이야 말로 실전에서 무수히 많이 사용되어온, 최고, 최강의 무기이다. 유시민의 말대로 합법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정부를 무너뜨린 ‘불법적’인 집단적 주권행사(4.19, 5.18, 6월 항쟁 등)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였다.(p 59)

민주주의와 인권이 흔들리는 시기, 총체적 문명 역주행의 시기에 헌법은 민주공화국을 지키려는 시민군의 무기 창고이다. 이 곳에는 칼, 창, 활 같은 오래된 무기부터 미사일 같은 초현대식 무기까지 다 있다. 특히 헌법 제 1조라는 무적의 강철검이 있다. 이 책이 가진 첫 번째 의의는 바로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지키고, 민주주의와 건강한 상식을 지키는데 필요한 무기가 가득한, 헌법이라는 창고의 문턱을 낮추고, 무기 중의 일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시범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한마디로 헌법을 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두 번째 의의는 한국 권력기관들, 즉 정부(대통령, 청와대, 장관, 부처 등), 국회(의원), 정당, 법원, 헌법재판소, 언론사, (진보) 지식사회의 속살(속성과 실력)을 그 특유의 진솔함과 날카로움으로 파헤친 것이다. 이는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르고, 당사자들과 언론이 별로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들이 대부분이다.

유시민은 초야에 묻혀 생물학, 심리학의 최신 성과를 섭렵하고, 또 헌법을 천착하고, 여기에다가 자신의 두터운 체험을 녹여 내어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파고들 단어(개념)를 몇 개 만들었다. ‘양복 입은 침팬지’, ‘토끼과 정치인과 사자과 정치인’, ‘알바 언론, 악플 언론’, ‘애국과 해국’(주관적 애국과 객관적 해국) 등이 그런 것이다. 이런 날카롭고 재미있는 비유, 풍자가 유시민의 입에서 일상적으로 구사되었기에, 상대에게는 깊숙한 상처를 주고, 지지자에게는 쾌감을 주면서 유시민의 독특한 정치력을 구성하지 않았나 싶다.

유시민 주방장의 퓨전요리

유시민은 2008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 새 명함을 만들면서, 전(前)자를 붙인 직함(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붙이는 것도 이상하고, 경북대학교 시간강사를 붙이는 것도 ‘마음이 추워서’ 며칠을 고민 끝에 ‘지식소매상’으로 적었다고 한다. 물론 그는 지식소매상이라는 직업에 대해 제법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자부심은 ‘(좋은 야채나 육류를 가져와서 멋진 요리를 만들어 수준 높은 단골 고객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유명한 맛 집을 경영하는 식당 주인 겸 주방장이 느끼는 자부심과 닮았다(p 357)’고 한다.

이제 유시민 주방장의 요리 맛을 좀 보자.

과거 유시민은 역사(세계사)와 경제학을 주된 재료로 하여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팔았다. 이번 요리의 주된 재료는 헌법과 자신의 생생한 체험담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중요한 재료가 들어갔다. 그것은 바로 인간 본성을 탐구한 생물학, 심리학 지식이다. 유시민 책을 읽어 보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많이 인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인 즉 ‘경쟁과 자연선택이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 수준에서 벌어진다’ (p44)는 것,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규제하는 행동 매뉴얼의 집합인 문화유전자(meme)는 세대전승 된다’ (p 88)는 것 등이다. 또한 필립 짐바르도의 <루시퍼 이펙트>도 많이 인용되고 있다. 이는 1971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실시했던 모의 교도소 실험을 소개한 것인데, 요지는 ‘악한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악한 상황을 만들어내면 선한 사람도 악을 저지른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썩은 사과 상자’에 들어가면 ‘멀쩡한 사과’도 ‘썩은 사과’가 된다는 것이다’(p366, 368)

이 외에도 스티브 존스의 <진화하는 진화론>,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의 복수>, 대니얼 골드하겐의 <히틀러의 자발적 사형집행인들>, 2007. 12월 방영된 mbc 다큐멘타리 ‘탕가니카의 침팬지들’ 등이 있다. 이런 지적 편력 때문인지 생물학에서 많이 사용되는 개념으로 정치와 사회를 설명한다. 주요하게 차용되는 개념은 먹이, 서식지, 생태계, (생물학적, 사회학적) 유전자 등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사람은 주어진 제도의 환경 속에서 더 좋은 먹이와 서식지를 차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경쟁한다……우리 헌법 제40조부터 제118조에 걸쳐 국회와 대통령, 행정부와 법원, 선관위와 헌법재판소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경쟁의 규칙, 그리고 그 경쟁에서 승리한 개인과 집단 사이의 권한 배분과 분쟁해결 절차까지 모든 중요한 사항을 규정해 두었다.’ (p 163)

‘국민국가 사이의 경쟁이 전개되는 지구촌의 국가생태계에서 장기적으로 생존 번영할 수 있는 적자로 선택 받은 가장 경쟁력 있는 국가 체제는 다름아닌 민주공화국이다.민주공화국은 또한 경쟁이 만들어내는 승자와 패자의 명암차이를 완화하고 경쟁 기회의 불평등을 억제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것이 복지시스템이다. (p 91)…..인간이 지금까지 지구 행성에서 일어난 생물 진화의 최고봉이라면, 민주공화국은 호모사피엔스의 문명사에서 일어난 제도 진화의 최고봉이다’ (p 92)

유시민 퓨전 요리의 압권은 ‘양복 입은 침팬지’다.

유신헌법은 두뇌는 명석하나 심성은 혼탁한, 명문대학 출신의 법률 전문가들이 만들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양복 입은 침팬지라고 부르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남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다. 내 안에도 침팬지가 살고 있다. 이 침팬지를 제압하고 길들이지 않으면 문명이 야만으로 복귀한다. (P54)

침팬지 무리가 성문헌법을 도입한다면 이렇게 시작되는 게 합당하다. 제1조 우리나라는 전체주의 국가이다. 우리나라의 주권은 ‘짱’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짱에게서 나온다. 힘이 제일 센 수컷이 짱을 먹는다.(p 82)

왕국의 신민에게는 자애로운 국부와 국모가 필요하다. 그러나 공화국의 주권자에게는 대통령과 영부인이 필요할 따름이다. 우리 마음속의 왕을 죽여야 민주공화국이 산다. 대통령을 왕으로 생각하는 견해는 우리의 문화유전자 안에 남아있는 침팬지의 그림자 일뿐이다.(p 211)


유시민이 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대한민국에는 침팬지들이 득실댄다. 개 폼 잡는 권력자와 추종자들을 양복 입은 침팬지라고 조롱할 수 있다.

그 다음 일품 퓨전 요리는 국회의원을 토끼과의 호랑이, 사자과로 나눈 것이다.

‘토끼는 작은 풀밭 하나면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사자나 호랑이에게는 넓은 들판과 숲이 있어야 한다. 정치 생태계도 비슷하다. 어떤 정치인은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구 하나를 확실하게 지킬 수 있다면 언제나 행복한 마음으로 정치를 한다……지역구 유권자를 만나는 행사가 당과 국회의 어떤 회의보다 더 중요하다. 지역구가 서식지인 정치인은 거기에 맞는 정도의 스케일로 생각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범위에서 활동한다. 위험한 도전을 기피하며 모든 문제를 자신의 다음 선거 득표와 연관 지어 판단한다. 표를 얻는데 도움이 된다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언동마저 서슴지 않는다……지역구 밖으로 나가면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p 330)

내가 관찰한 바로는 토끼가 자라서 사자가 되는 일은 없다……사자는 처음에 작은지 몰라도 모양과 본성이 처음부터 사자다. 중간에 죽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시련을 이기고 자라면 큰 사자가 된다. 토끼과인지 사자과인지는 그냥 보면 알 수 있다…..지역주의 정치는 토끼가 너무 많거나 사자가 너무 적기 때문에 생기고 유지된다.(p 331)


중앙부처 국회 담당 공무원과 간부들의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가 상임위 법안 처리 의결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의원회관 사무실이나 의원 사우나, 여의도 일대 호텔 등에 흩어져 있는 국회의원들을 모시러 다니는 일이라면, 믿으시겠는가. 이렇게 사노라면 사람이 변하게 된다. 지성미 풍기는 대학교수도, 정의감 넘치던 386운동권도, 논리와 법리로 먹고 살았던 판검사와 변호사도 모두 원산지를 구별하기 어려운 비슷비슷한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어가는 것이다.(p304)

토끼와 사자는 유전자 자체가 다르지만, 토끼과 정치인과 사자과 정치인은 유전자가 완전히 다르다기 보다는 선거제도(소선거구제 단순다수득표제)와 지역주의와 비민주적 공천제도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토끼과 정치인을 질타할 것이 아니라 토끼과 정치인을 양산하고, 사자과 정치인을 멸종시키는 제도를 질타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유시민의 시각으로 본다면 국회의 권능 강화(이 최고의 형태는 의원 내각제 개헌이다)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지 명확하다. 그것은 사자과 정치인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선거제도 개혁이다.

유시민의 칼 솜씨

헌법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는 무기가 그득한 창고라면 유시민은 여기서 어떤 무기를 꺼내서 어떻게 썼을까? 몇 개만 보자.

제헌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1948년이 아니라 1919년에 건립되었다….이명박 정부가 2008년을 건국 60주년으로 규정한 것은 심각하고 중대한 헌법 유린 행위이다. (p21)

‘국가신인도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미네르바 사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표현의 자유는 오류를 말 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만약 오류를 말할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표현의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없다.(p 126) 표현의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지만 그 책임의 범위와 책임을 지우는 방식을 권력자가 정한다면 그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조만간 질식하고 말 것이다.(p 127)

대통령 탄핵 사유가 된 공직선거법 제9조(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는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를 헌법 제7조 2항(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로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에 준거하여 공직선거법에서 말하는 정치적 중립은 ‘국가(대통령)이 보장해야 할 공무원의 권리’에 속한 것으로 보면서 헌재의 판결과 위선을 공격한다.


대통령을 공직선거법 제9조가 명시한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에 포함시켜 선거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밝히는 것까지 위헌.위법 행위로 규정하는 것은 헌법과 법률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p204)……역대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여당의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좌우했고 여당의 총선 승리에 도움을 주기 위해 애썼다. 정치 중립은 고사하고 선거 중립조차 지키지 않았다. 중앙선관위와 헌법재판소의 견해를 받아들이면 그들은 모두 공직선거법 제9조가 규정한 공무원으로서 명백한 위법.위헌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들은 이 진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선거법 위반이라는 비난을 받지도 않았고 탄핵을 당하지도 않았다. 중앙선관위는 이 ‘만인공지의 비밀’을 모른 체 하며 넘겼다. 이처럼 명백한 정치적 위선이 달리 또 있을까?(p 207) 노무현 대통령은 이러한 위선을 거부하고 자기를 지지하는 정당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공개적으로 말했다. 이러한 의사 표현은 선거에 임하는 국민들의 정치적 판단의 대상 일뿐 사법적 단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상식이다. 그런데도 중앙선관위와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을 일반 국가공무원과 똑같이 취급하면서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을 선거법 위반으로 규정했고……단죄했다. 왜 그랬을까?......그 저변에는 모든 관료 조직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권력 극대화 욕망이 놓여있다….헌법과 공직선거법을 그렇게 좁고 경직되게 해석해야 중앙선관위나 헌법재판소의 권력이 커지고 ‘서식지’가 넓어진다. 그들은 ‘이기적 개체’로서 자기가 속한 집단의 권력 극대화를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한 것이다.(p 207~208)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평가에 대한 아쉬움

이 책의 주장 중에 선뜻 동의하기 힘든 주장도 없지 않다. 특히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민주당 등에 대한 평가에는 그런 주장이 많다. 예컨대 이런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시대적 과제에 잘 대응했지만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의 구조적 양극화와 보수 편향의 담론 시장, 미국의 패권주의적 외교 정책이라는 제약조건을 극복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사회자유주의적 정책 패키지를 만들어가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p 343)

열린우리당은 미국 민주당처럼 보수적 자유주의와 사회자유주의 세력이 제휴한 연합정당이었다.(p 344)

노무현 대통령은 자유주의자답게 권력의 힘이 아니라 말과 논리로 국정을 운영하려했다. 노대통령은 재래식 살상무기를 버리고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가운데 전쟁에 나섰다. 검찰, 국정원, 감사원, 국세청을 모두 청와대에서 독립시켰고, 야당과 보수 세력의 거센 정치공세에 시달리면서도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힘을 사용하는 대신 말을 사용하는 전투에서 대통령이 야당과 보수 언론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다. 말에 의존하는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은 정치적 적대세력의 집중적 타격 목표가 되었고, 그러면서 국민과 정부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정서적 토대가 파괴되었다. (p343~344)


나는 참여정부가 자신의 정책 기조를 사회자유주의나 진보자유주의로 잡았다고 해서 시대적 과제에 잘 대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참여정부의 오류는 유시민이 말한 ‘후불제 민주주의’와 ‘문명 역주행’이라는 말 속에 다 나와있다. 참여정부는 한국 사회(민주주의)가 갚아야 할 외상값이 얼마나 큰지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참여정부는 대통령이 도덕적 신뢰를 회복하고,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권력기관을 청와대에서 독립시키고, 시장지배적 언론을 부당하게 협박, 통제하지 않고, 분권과 자율의 원칙으로 국가를 운영하면 대충 다 갚는다고 생각 했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는 2007년 대선과정의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의 치졸한 작태와 이명박 정부의 문명 역주행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갚아야 할 외상값의 크기에 대해서는 참여정부 뿐 아니라, ‘노까’들, 민주노동당, 시민단체, 진보 언론, 진보 지식인들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또한 열린우리당은 보수적 자유주의와 사회자유주의 세력 외에도 (연성)사민주의 세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요소(지역주의, 의원기득권 집착 등)들이 크게 작용했다. 이와 관련된 비판은 엄청나게 길어질 수 있기에 다음 기회로 미룬다.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현재의 민주당에 대한 유시민의 평가는 이 책의 주제와는 거리가 멀지만, 향후 새로운 진보개혁 정치를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차대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북한산 암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신세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8월 30일 민주당 경남도당 전진대회서 격려사에서 ‘정치인이 정치를 안 하면 강연이 본업’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 말은 ‘강연보다 좀 더 중요한 일이 미디어’(민주주의 2.0)라는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낙선한 정치인이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면서, 정치활동을 해 가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글(칼럼, 책)과 말(강연, 방송 등)을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다. 그래야 국가경영 경륜을 지속적으로 축적할 수 있고, 동시에 대중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확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같으면 회전문 기능을 하는 훌륭한 민간 연구소 연구원으로 사는 길도 하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연구소가 사실상 없다. 칼럼리스트로 먹고 사는 것도 어렵다. 정치인이 되면 대중 매체에서는 오히려 기피 대상이다. 정말 글과 말을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진보 지식사회도 진보 정치인이 먹고 사는 문제 내지 진보 정치 생태계 개념 자체가 없다.(재벌대기업 아니면 노동조합에 빌 붙지 않는 존재는 다 죽어야 한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 아닌 지 모르겠다) 그래서 감히 이런 도전에 나서는 정치인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국가가 독점권을 보장한 자격증을 가진 전문직(변호사, 의사, 치과의사, 약사 등), 자리를 확실히 굳힌 전임 교수, 부모나 배우자 잘 만난 사람, 간혹 시장 지배력이 있는 튼실한 기업의 오너 출신이 아니면 낙선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정치활동을 해 나갈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하는 정치활동이 건강 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글과 말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정치활동을 하겠다는 유시민은 화강암반 투성이의 북한산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유시민은 이 무모한 도전에서 가장 생존 가능성이 높은 정치인 일 것이다. 이 하나만으로도 유시민의 도전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살아남아도 비비꼬이고 왜소할 수 밖에 없지만, 한국 사회에 태어난 숙명인데 어쩌겠는가? 어쨌든 나 역시도 이 무모한 도전에 떨쳐 나선 새끼 소나무다. 생존 가능성이 유시민 보다 훨씬 불투명한!

국가가 집이라면 헌법은 집의 초석이자, 기둥이자, 대들보이다. 한마디로 국가의 기본 틀이다. 우리 연구소식으로 말하면 사회디자인의 최고 형태가 바로 헌법이다. 나는 19세기 조선 역사와 일본 역사를 들춰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1882년 권력의 정상에 섰을 때 -권력이 그렇게 공고한 반석 위에 올라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바쁘고 엄중한 시기에 일본제국 제헌 헌법 연구를 위해, 또 헌법 논의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무려 1년 6개월간 유럽을 순방하면서 헌법을 연구했던 것이다. 당시 독일 수상 비스마르크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당시 독일 최고의 헌법 학자를 붙여주었다. 아마 이런 탁월한 안목이 현대 일본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국회, 정부(대통령 포함), 법원, 헌법재판소 등에 대해 서술한 헌법 조문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은 키가 180센티미터 이상의 큰 아이들이 즐비한데, 집은 좁고 낮은 오두막으로 설계되어 잠 잘 때는 발이 방 밖으로 튀어나오고, 오가면서 문지방에 이마를 부딪히고, 자면서도 다 큰 애들이 남의 다리를 긁어면서 서로 신경질 내는 모양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현행 헌법에 대한 학습, 토론은 문명 역주행에 대항하는 무기도 많이 제공해 주지만, 무엇보다도 정치적 상상력을 해방하여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시하던 시대적 사명을 다한 국가의 기본 질서(권력구조, 선거제도 등)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해 준다. 한마디로 새로운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를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유시민의 책이 수십 만부가 팔려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헌법 읽기가 유행한다면, 나아가 헌법에 기초하여 어떤 정치사회적 사안을 판단하는 것이 대중화되고,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디자인 할 것인지에 대한 대중적 논쟁이 벌어진다면, 또 권력기관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살과 이면까지 꿰뚫어 보는 눈이 확산된다면 유시민은 여태까지 그가 해 온 정치활동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크고 의미 있는 정치활동을 하는 것이다.

유시민의 어깨에 걸터 앉아 세상을 보는 맛

유시민은 대권 주자 반열에 올라간 사람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철학, 가치, 비전, 정책을 대중 저술로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사실 신이 아닌 이상 아무리 글 잘 쓰고 말 잘하는 사람도, 글 많이 쓰고 말 많이 하면 허점이 수두룩 노출된다. 몇 년 전에 한 말과 지금 한 말의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팩트가 틀린 말도, 기본 상식에 어긋나는 말도 많이 나오게 되어있다. 앞에서 잠깐 소개한 참여정부와 민주당 관련 틀린 주장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적대적 언론이 악의적으로 거두절미하거나 말을 비틀어버리면 대중적 분노를 살 주장도 많다. 그래서 글과 말에 관한 한 달인의 경지에 있어 뵈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 조차도 하버드 로스쿨 시절부터 정치적 반대자들이 꼬투리를 잡을 소지가 있는 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 당연히 글과 말의 허점을 노리는 정치적 저격수들이 수두룩한 한국에서는 일정 반열에 올라선 정치인들은 책을 거의 쓰지 않는다. 솔직히 엄청난 내공이 있지 않고서는 책은 안 쓰는 것이 좋고, 말도 길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박근혜처럼! 이는 개인적으로는 현명할 지 모르지만 공동체 전체에는 불행이다. 대중들의 정치의식이 고양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시민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가난하고 또 정치적 주변부로 몰려 있기에 책을 안 쓸 수가 없고, 말을 많이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는 대중들에게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유시민은 최근 몇 년 동안 치열한 정치적 전투의 중심에 있었다. 개혁당 창당의 중심,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재선의원,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 당내 격렬한 반발을 무릅쓰고 된 보건복지부 장관(되고 난 이후에도 그를 노리는 존재들이 많았다),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 경선 1차 통과자, 대통합민주신당 탈당, 대구 출마와 낙선 등 중심과 주변을 오간 파란만장한 역정이 그것을 입증한다. 이런 경력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한국 사회의 전체상과 속살이 비교적 선명하게 보이게 되어있다. 어떤 고명한 교수의 눈에도, 어떤 언론인의 눈에도, 어떤 관료의 눈에도, 5~6선 의원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유시민에게는 선명하게 보인다. 여행에서도, 현실 체험에서도, 독서에서도 사람은 아는 만큼 보고, 예민한 만큼 느끼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많이 알고, 치열하게 실천도 했고, 게다가 예민하고, 표현도 잘하는 유시민이 쓴 이 책은 불과 14,000원에, 한국 사회의 어떤 분야의 최고봉에 올라가서 천하를 내려다 보는 맛을 느끼게 해 준다. 내 생각에는 필부필남이 유시민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자신의 정치적 내공을 비약적으로 강화시킬 수 있는 비결은 유시민의 이 책을 다섯 번이고 열 번이고 비판적으로 읽어서 완전히 소화시켜버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사상이념적 내공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비결은 헌법 조문의 한 단어, 한 문장의 철학적, 역사적 배경과 현재적 의미를 파헤치는 학습이 아닐까 한다. 이는 역사학자, 헌법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정치인, 법관, 헌법재판관 등의 경험과 지혜를 녹여내야 가능한 것인데, 아쉽게도 참고 도서도 없고, 학습을 지도해 줄 사람도 없다. 사회디자인연구소가 여력만 된다면 교회에서 성경공부 하듯이 사회디자인의 최고의 형태인 헌법을 공부하는 강좌 내지 모임을 하고 싶은데 아쉽다. 언제 이런 날이 올런지.......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