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소백산 연화봉 등산 역정기
가을 소백산 연화봉 등산 역정기
  • 배오직 객원기자
  • 승인 2009.02.09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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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병시절 고난행군을 떠올리며 다시 올랐다

학교에서 교양과목으로 야외레저가 있었는데 산행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필자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사람이라 또래는 아니지만 학생들과 산행한다는데 아주 들떠 있었다. 매번 산행을 철퍼덕의 달인 임모 형, 다람쥐 운동하듯 실내에서만 운동하는 권모 형과 함께 다니며 졸(卒) 신세를 면치 못했던 나는 아주 아침부터 상쾌했었다.

금강산에서 신었던 등산화를 단단히 고쳐 매고, 일행과 함께 손을 내밀면 쪽물이 들것 같던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 소백산 연화봉이 그리 만만한 코스이랴! 그래도 소백산이 자랑하는 봉우리 중 하나인 것을... 이날 나는 결국 사점(dead point)의 뜨거운 맛을 보고 말았다.

이에 그 등산 역정의 한순간을 훈련병 시절 행군을 떠올리며 한번 써 볼란다.

‘야! 119번 훈련병! 얼마 남지 않았다. 넌 니가 스스로 이곳에 오기로 한 놈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숙영지에 도착해야만 돼.’ 나는 내 어깨와 목을 조여 오는 군장과 총을 사수하기 위해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교관에게 총을 넘겨주지 않았다.

8월의 칠흑 같은 눈물고개도 거뜬히 올랐건만 행군의 밤은 두터운 외투만큼이나 깊고 어둡다. 목이 마르다. 준비해간 물은 행군의 중간 기점에서 이미 바닥이 났고 타는 목마름은 하늘의 습기를 마셔 겨우 버텼다.

물은 될 수 있으면 마시지 말라는 교관들의 말과는 상관없이 26번 훈련병과 번호가 흙더미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다른 소대의 동기들이 쏟아지는 잠 속에서도 용케도 찾아낸 논 수리를 온몸으로 핥는다. 이전투구 같은 동기들의 모습에 나도 목을 짓누르던 철모를 벗어 비릿한 농약내가 나는 논물을 받아 마신다.

이러기를 10여 초, 어디서 들리는 지도 알 수 없는 둔탁한 구타소리와 거친 욕지거리에 나와 동기들은 잠시 흐트러졌던 전열을 다시 가다듬고 목을 조여 오는 군장과 총을 다시 멘다. 터지는 가슴과 그리운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선뜻선뜻 지나가고 서러움과 눈물의 의미를 뒤로 한 채 그저 흐르는 눈물을 혓바닥으로 닦아 낸다. 이 밤 거문불납(拒門不納)의 문을 뚫기 위해 이제껏 살아온 교성들이 한 여름 밤 논바닥에서 노니는 개구리의 그것과 같이 부풀어 하늘로 올라간다.

'선두 제자리' 라는 구령에 맞추어 전 중대원들은 성능 좋지 않은 차의 제동장치처럼 미끄러지듯 서고 '십 분간 휴식' 이라는 구령에 그만 쓰러져 눕고 만다. 아까 마신 논물 때문일까? 나는 점점 더 의식이 흐릿해진다. 그러면 그럴수록 중대를 뒤따르던 구급차의 요란한 엔진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다. 사위는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가고 내가 기다리던 새벽은 여전히 암흑 속에서 별빛 하나 비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맞지 않는 군화 때문에 속살이 훤히 보이는 발뒤꿈치는 이미 양말과 한통속이 되어 떨어질 줄 모른다. 만일을 위해 준비해간 활동화로 갈아 신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흑 빛 하늘로 빨려들 듯 걷는 우리에겐 흩어진 정신만큼이나 되돌아오는 것은 앞 사람이 날려 보낸 흙먼지뿐이었다. 그러나 흙먼지 마시기가 정점에 이를 무렵 숙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잠 속에서 잠들지 않은 채 새벽을 맞은 전 중대원들은 간밤에 몰아쳤던 죽음의 하이에나들이 이젠 물러갔음을 평화로이 아침을 여는 농부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하늘이 열리고 시원한 바람이 불 때 쯤 어디선가 나타난 매미 한 마리가 애끓는 소리를 낸다.

한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을 이 곳 소백산의 연화봉에는 잠 속에서 잠들지 않은 채 맞이한 새벽과 같이 기다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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