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혹시 ‘이여송’의 후손인가?
우리는 혹시 ‘이여송’의 후손인가?
  • 임형진
  • 승인 2009.02.11 14: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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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지금 토목공사 중!

일이 일이다 보니 출장이 잦다. 가까운 곳도 있지만 주로 전국을 헤매고 다닌다.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여러 곳을 찾아다니게 되니 자연히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고, 많은 길을 만나고, 대개가 꼬불꼬불한 길이다. 길에서 만나는 것 가운데 아주 거슬리고, 심지어는 걱정스럽기까지 한 풍경이 하나 있다. 어디서건 만나게 되는 도로공사현장이 그것이다.

도로공사라는 것도 마을길이나 이 차선 길을 보수하는 수준이 아니다. 농지나 하천을 피해 주로 산을 끼고 이루어지는데, 잇고자 하는 두 점을 지도 위에 찍고 직선으로 곧게 그리는 식이다. 낮은 산은 깎고, 높은 산은 뚫으면서 거침이 없다. 장비 좋은 세상이란 말이 절로 실감이 난다. 거기에 자연이나 경관은 없다. 조화도 없고, 풍경도 없다. 갓 개통해서 아직도 시멘트 냄새 풍기는 곧고 너른 길을 달릴 때는 참 좋은 세상 만났다 싶다가도 절벽처럼 깎인 산모퉁이를 지날 때는 생각이 좀 복잡하다.

이여송을 추억함

벌겋게 깎인 산자락 절개면이나 높직하게 선 다릿발[橋脚]을 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역사적 인물이 있다. 여전히 우리네 전설 속에 선명하게 살아 있는 인물. 바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를 지휘한 ‘이여송’이다. 이여송에 대해서는 자료 찾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 포털싸이트 인물 정보에서야 보게 된다.

이여송(李如松,?~1598). 중국 명(明)나라의 무장(武將).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2차 원군으로 4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1593년 1월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을 격파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한 후 그해 말에 철군하였다. 1597년 요동 총병관(總兵官)이 되었으나 이듬해 토번(土蕃)의 침범을 받아 반격 중에 전사하였다.

그가 조선에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런데 1차 원군을 이끌었던 명나라 장수에 대한 이야기는 없이 온통 이여송의 이야기만이 전설 속에서 서슬이 시퍼런 원망으로 오롯이 살아 있다. 탁월한 무장으로, 조선을 구한 영웅으로 묘사되는 집권자의 기록과 극을 이루는 것은, 평양성 전투에서 벤 적의 수급에 조선 백성의 것이 더 많았다느니, 주둔 명군(明軍)들의 횡포가 왜군에 못지 않았다느니, 원군이었으나 변변한 전투도 없이 뭉기적거렸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외국 군대에 대한 원망을 낳고, 이것이 그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여송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조선의 산하를 다니며 ‘혈맥’(血脈)을 끊었다는 내용이다. 그는 조선에 당도하여 산천을 둘러보니 영웅이 많이 날 좋은 땅인 것을 보고, 뒷날 그 기운을 받아 뛰어난 영웅이 많이 태어나 명나라를 위협할까 두려워 무수한 혈맥을 칼로 끊어버린다. 그래서 그 뒤로 조선에는 인재가 태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이여송 이야기의 대개 골자다.

그는 단순히 혈맥만을 끊고 다닌 것은 아니다. 부석사가 있는 봉황산 맥을 자르고, 그것도 모자라 의상대사를 따라 불법을 밝히겠다고 스스로 석용(石龍)이 되었다는 선묘(善妙)의 현신도 자른다. 안동에 있는 제비원 석불 앞을 지나다가 말의 발이 붙어 움직이지 않자 석불의 목도 잘라 피를 흘리게 한다. 설마 그 많은 곳을 다녔으랴 싶은 곳곳에서 그의 칼질로 혈이 잘렸다는 산천을 만난다.

토목공사 : 21세기가 만드는 훗날의 문화유산

지금 대한민국은 토목공사 중이다. 국토의 균형발전과 지역개발,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등등등. 그러나 그런 토목공사는 어찌 보면 21세기의 유적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옛날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크고 작은 문화유산 앞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설명을 늘상 듣는다. 물론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조화를 꾀했는지, 장비가 없어 불가항력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사실 단언키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오랜 시간 연구를 통해 만들어 놓은 방법으로 문화유산이 갖는 문법을 읽고, 그 속에서 ‘조화’를 읽었다면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은 21세기 토목유적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런 대규모 토목공사를 했다고 말할까. 21세기 유적을 보면서 우리를 어떻게 이해할까. 만약 그때도 산천의 혈맥을 자른 이야기가 남아 있게 된다면 최소한 그 주인공이 ‘이여송’은 아닐 것이다. 그때는 21세기에 산천의 혈맥을 자른 이로 ‘이여송’을 대신해 누구를 가리키게 될까.


희망의 노래 : 이여송의 몰락과 혈맥의 복원

전공이 민속학인지라 이여송에 대한 얘기는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입에서 들은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말하는 이의 감정까지도 함께 실려 있다는 점에서 ‘읽는다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 우스개 소리를 하시던 분들이 이여송 대목에서 내뿜는 분노와 안타까움은 이미 전설이 아니다. 나는 혈맥의 절단으로 영웅이 탄생할 싹을 잘라버렸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외국 군대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패배감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우리에게 희망이 사라졌다는 자괴감이다.

꽤 여러 번의 설화 조사에서 이여송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는 능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여송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느긋하게 그를 기억하게 되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여송의 몰락이다. 수많은 혈맥을 끊고 의기양양 돌아가는 이여송을 조선의 설화는 두고 보지도, 곱게 보내지도 않는다. 이야기는 이렇다.

사실 이여송의 오랜 조상은 명나라에 귀화한 조선인이었다. 그러니 이여송은 중국인으로 자라 입신양명하였으나 본래 그 근본은 조선인 셈이다. 그 사실을 모른 채 명으로 돌아가던 이여송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참으로 뛰어난 혈맥을 발견하고 예의 버릇처럼 그 맥도 잘라버린다. 그러나 그 맥은 바로 자신을 탄생시킨 맥이었고, 그러므로 당연히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두 번째 이야기도 비슷한 시기에 들은 듯하다. 지금은 이름도 가물거리고, 마을 풍경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여전히 이여송은 그 마을도 지나갔고, 마을 뒤 고개를 넘으면서 그곳의 혈을 잘라버렸다. 잘린 곳에서는 몇날 며칠 동안 피가 흘렀고, 마을에는 더 이상 영웅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얘기 끝에, 지금도 잘린 모양으로 남아 있느냐고 물었다. 그냥 그렇게 생긴 지형이 이여송 이야기와 만나 오래도록 기억으로 남는 것. 그것이 전설이니깐. 그런데 어른들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웬걸, 지금은 거의 다 없어졌지. 옛날에는 자른 흔적이 뚜렷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거기에 돌을 던졌어. 소를 몰고 가면서도 던지고, 나무를 하러 가고 오면서도 던지고, 고개를 넘던 사람도 던지고. 이제는 돌이 쌓여서 거의 옛날 모습 다 됐어. 얼마 안 남았어.”

나는 그 기막힌 반전에 말을 잃었다.
역사적 상처, 상징적 상처를 치료하고 끝내 극복해 나가는 모습.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언젠가 꼭 그 곳을 가보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지척이었을 그곳을 끝내 가지 못 했고, 지금은 그 마을조차 가물거리지만, 나는 믿는다. 이제는 작은 돌멩이 모이고 쌓여 이미 맥을 이었고, 그 곳으로 피가 울컥울컥 흐르면서 죽었던 생명이 꿈틀대며 일어서고 있으리라는 것을.

언젠가 보게 될 것이다. 그 힘을 받아 태어난 희망이 우리 앞에 그 의연한 모습을 찬연히 드러내리라는 것을. 사람과 사람을, 문명과 자연을, 하늘과 땅조차도 더불어 살게 하려고 오리라는 것을, 반드시 올 것이라는 것을. 그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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