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으로만 남을 ‘구담5일장’ 을 가다
추억으로만 남을 ‘구담5일장’ 을 가다
  • 권기상 기자
  • 승인 2009.10.07 09: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도청 이전 지역을 가다. (1)구담마을 장터기행
안동에서 북서쪽으로 자동차로 30여분, 넓은 풍산들을 지나면 칠백리 낙동강 줄기가 유유자적 나그네 길을 재촉하는 곳, 풍천면 구담.

안동, 의성, 예천 3개 시군을 인접한 경계에 위치한 까닭에 조선시대 이래로 행정관할 지역이 세 번씩이나 바뀐 팔자 센 시골 동네다. 하지만 최근에는 참외, 수박, 메론, 마 등 원예작목반 활동이 왕성해 소득이 짭짤하다고 소문난 풍천면의 농업경제 중심지로 그 이름을 굳히고 있다.

지역민들의 구전에 따르면, 옛날 가뭄이 많이 들어 연못을 아홉 개를 팠다 해서 구담(九潭)이라 불렀다고 한다. 광산김씨와 순천김씨들의 집성촌이 있어 전통과 예로도 어느 지역에 뒤지지 않는다.

장마에 낙동강이 불어나면 어김없이 넘치던 좁고 낡은 구담다리도 이제는 높고 넓은 현대식으로 시원하게 다시 놓였다. 강을 사이에 두고 구담과 마주하는 기산리, 신성리 등 물 건너 마실을 잇는 다리다. 그 다리 아래로는 오랜 세월 자연습지가 조성되어 희귀 동ㆍ식물이 자라는 생태계의 보고를 이루고 있는데, 학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구담습지’다.

마을 뒷 쪽 한적하게 자리잡은 풍천초등학교는 점점 줄어드는 농촌인구로 예전보다는 학생수가 줄었지만 모습은 예전 그대로 세월을 지키고 서있다. ‘구담5일장’으로도 유명한 이곳은 경북도청 이전예정지로 이제 머지않아 지금의 모습들은 사라지게 된다. 아쉬움을 안고 기억으로만 추억될 이곳 ‘구담장터’를 가보았다.
▲4일, 7일 5일마다 열리는 구담시장

부산에서 소금배가 노 저어 오던 곳 ‘구담5일장’

구담은 겉으로 봐서는 여느 시골과 비슷한 작은 마을이지만 크게 다른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이 작은 마을에 반세기 넘게 5일장이 서 왔다는 것. 지방의 시골 장은 행정구역 상 읍이나 면소재지에서 열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구담마을은 3개 행정구역이 접하는 지리적 특성으로 조그마한 동네지만 오래전부터 4일, 9일 닷새마다 장이 열렸고 그 규모도 제법이어서 경상도 장돌뱅이들에게는 꽤 유명했다.

“장은 원래 아릇섬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오래 전에 지금 장터로 옮겨왔지. 그 때는 나룻배가 다녔는데, 소금배는 아마 부산에서 왔을 거고...노를 저어서 왔지.”

구담에서 식육점을 운영하며 구담 5일장의 역사와 함께했다는 토박이 김윤한(65)씨의 회고다. 처음에는 지금의 구담 다리부근에서 닭전이 열렸고 전이 커지면서 돼지에 소, 곡물까지 각종 난전과 모전이 늘어났는데 결국 장소가 좁아져 지금의 장터로 이전하게 되었다. 부산에서 소금 배가 들 정도로 당시에는 멀리 하류까지 물길도 이어져 있었다는 얘기다.

순천김씨 문중인 김씨의 선조는 이 곳 구담에서만 6백년을 이어왔다고 하니 토박이 중에서도 상토박이다. 또 웃대 어른이 초대면장을 지내기도 했단다. 김씨가 기억하는 구담장의 역사는 대략 70여년. 지난 193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풍천면은 풍남면과 풍서면, 소산리를 병합(倂合)하여 개칭되었고 그때 당시 구담은 풍서면이었다. 이때 처음 열리던 닭전이 발전해 구담장이 되고 현재 장터로 옮긴지는 50여년이 되는 셈이다.

“배가 이리로 다녔어. 앞으로는 대장간이 있었고, 높이가 우리 키로 세길 이상 됐지.”
▲예전 성시를 이루던 시장은 장사꾼이 더 많다.

◆“막걸리만 하루 사오백말이 없어졌어”

장이 서지 않는 날의 구담장터는 쓸쓸하고 한산하기 짝이 없지만, 장날만 되면 적게는 삼십년에서 많게는 50년 이상 이 곳에서 장사를 하며 고향 장터의 명맥을 지키고 있는 분들로 구담장은 다시 생기를 찾는다.

장터에서는 주로 계절마다 인근에서 생산되는 보리쌀, 좁쌀, 쌀, 고추, 깨, 콩 등 곡물들이 많이 거래됐다. 지금은 약 100여개의 가게들이 다양하게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구담 토박이 김씨는 예 추억이 떠오르는 듯 예전 장터에 있었던 가게 품목을 손으로 꼽으며 읖조린다.

“소금, 석유, 국수, 막걸리, 엿장수, 대장간, 파리 빈대약 파는 곳, 기름방, 손두부집, 무명옷 물들이는 곳...”

구담 장은 다른 지역에 비해 물건 값이 싸고 양도 많아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장날에는 인근 시군에서 모인 장꾼과 장사꾼으로 각종 난전들이 많아 인산인해를 이뤘다.

“장날이면 걸어 다니질 못하고 밀려다닐 정도로 사람이 많았지. 오후저녁 때면 마구 술 취해서 구부르고 난리가 아니었어. 술 먹고 취해서 온 동네를 쓸고 다녔어...허허”

오십년 터줏대감이라고 불리는 구담한약방 할배도 김씨의 말에 맞장구를 놓으며 예전 성시를 이루었던 시절을 더듬었다.

“예전 장날이면 저기 주막에서 막걸리만 하루 사오백말이 없어졌어. 사람이 지고 가라믄 못가지만 먹고는 가거든. 그러니 얼마나 장꾼들이 많았겠어? 안그래?”
▲여름 홍수때나 강물이 많을때는 배를 타고 다녔다는 주민들

지금은 다리가 놓여 교통이 편리해 졌지만 강에 다리가 없었던 시절에는 아침나절에 낙동강을 건너오는 사람들로 보얗게 띠를 이루었다. 보따리는 머리에, 어깨에는 지게를 한 짐 지고 찾아오던 장꾼들로 시장에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할 때도 있었다고.

그 시절은 딱히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어 인근 상주, 예천, 풍산, 안동, 의성 등지에서도 보통 칠팔십 리는 걸어 다니며 장을 봤다. 그렇게 활기를 띠던 시장은 1985년부터 시내버스가 운행되고 1994년 안동?대구간 고속도로가 개통이 되면서 서서히 사람들이 큰 도시로 빠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지난 90년대 말 IMF 외환위기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는 시장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이제는 겨우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꼴이다.
▲시장 안쪽 이불전 아줌마 한산한 시골장터를 보여주듯 오침 중

이제 예전의 구담장의 명성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장날이면 빠지지 않고 이 한적한 시골장을 지키고 있는 장꾼들이 남아 있어 그 아쉬움과 정겨움이 공존하고 있다. 장터 입구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수북하게 쌓아올린 곡물앞에 상자를 뜯어 손수 쓴 ‘기장’, ‘찹쌀’ 이름표를 꽂아 놓고 흥정하시는 할매와, 시장 안쪽에는 빨래줄 걸어 철마다 바뀌는 최신패션(?)의 다양한 옷들을 널어놓고 칸막이 삼아 옷을 파는 아줌마 아저씨가 있다.
▲손님은 없어도 양푼이 한가득 비벼 나누는 점심식사는 즐겁게 보인다 


또 한쪽에서는 농기구 수리하느라 불꽃 튀기며 쇠 깍는 아저씨, 보자기에 강아지 서너마리 싸들고 나온 할머니와 실랑이 하는 아저씨, 동태, 고등어, 꽁치 등 다양한 어물에 소금치며 파리 잡으시는 아주머니 등 난전모습 모두가 아직은 넉넉한 시골장터 인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검고 굵은 주름진 어른들 드문드문 오가며 등 너머 할아버지 오랜만에 만나 악수하며 반가워하는 모습은 장터모습 그대로였다.

“아이고 정수 아부지 아이껴? 오랜만에 대포 한 잔 하시더, 마!”
“그케 장날인데 기냥 갈 수 있나. 가시더, 허허허...”

▲50년 한약방 지킴이 김문한씨

장터를 가로질러 시장 서쪽통로 끝에 다다르면 오른 쪽으로 옛날 일본식 건물을 연상게 하는 이층집이 한 채 있다.

외벽에는 페인트칠을 새로 했는지 제법 말끔해 보이지만 한 눈에 봐도 꽤나 오래된 건물같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느 한의원이 그런 것처럼 한약냄새가 진동을 한다. 장터 오십년 지킴이라해서 연세가 많을 거라고 상상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젊어 보이는 김문한 할아버지(68)가 취재 일행을 맞이했다.

김문한 할아버지는 지난 60년대 정부에서 시행하던 ‘무의촌 한지의사시험’에 합격해 당시 병원은 고사하고 의사 한 명 없었던 이곳 구담에 처음 들어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 한약방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풍천면 전체에 모두 10여 곳에 한약방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혼자 유일하게 약방을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 시절에는 한의원이나 한의사 밑에서 일을 배우다가 18세 이상이 되면 무의촌 한지의사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고 한다. 요즘처럼 대학교나 학원에서 전문과정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만 18세부터 따라 다녔지 국가고시 쳐서 됐으니 지금 봐서는 천재났다고 하겠지... 안 그래? 국가자격이 쉬운 건 아닌데...허허”

나이 열여덟에 약방 일을 시작한 할아버지는 바람병, 중풍이 전문이라고 했다. 또한 환자를 치료하는 데 있어서는 세 가지 정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집에서 다려 먹었기 때문에 약을 다리는 사람의 정성, 또 먹는 사람이 믿음으로 끈기있게 금할 음식을 금하며 먹는 정성, 그리고 처방을 하는 의원, 이렇게 세 사람의 뜻이 한꺼번에 모였을 때 약효를 볼 수 있지. 의원을 믿고 정성으로 한 달을 쓰라하면 한 달을 써야 하는데 그게 며칠 먹고 고치려고 하니 그게 문제지. 우리 동양의학은 진통제가 없고 치료제기 때문에 효과가 늦어 그래서 환자의 끈기가 중요한 거야”

과거 약 20년 동안 장터가 활기로 넘칠 때는 종업원이 세 명까지 있었다고 한다. 산에서 약을 직접 캐오고 씻고, 말리고, 말려서 썰고 했다한다. 장날이면 밀려드는 손들로 정신이 없을 정도로 약방도 성시를 이뤄 세 사람도 부족했다고 O할아버지는 술회했다.

당시를 회상하던 할아버지는 지금의 한방의료계에 대한 못마땅함도 털어놨다.

“한약이 지금은 상품이 됐는 기라. 팔아먹으면 그만인 기라. 인술이라는 거는 병을 고치는 거를 목적으로 한약을 팔아야 되는 건데 돈 받는 거를 목적으로 팔아 먹는게 이기 문제인 기라!”

한참 한의원과 한약방에 대해 목청을 높이던 할아버지에게 오십년 한약방을 하면서 가장 즐거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즐거웠던 건 딴 게 없지 약을 써갖고 치료됐다 그러면 제일 즐겁지... 근데 치료가 안됐다고 그러면 안타깝지. 가만, 또 한 가지 뭐냐 하면 우리말을 들었으면 고칠낀 데 말을 안들어서 완치가 안됐을 때는 좀 안타깝지”하셨다.

한약방을 운영하시는 분을 한약업사라고 하는데 허가된 지역 안에서 기존 한의사의 처방이나 한의서 처방에 따라 한약 파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지역권이 해제되어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나갔다고 한다.

이런저런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서너살 배기와 어머니, 할머니가 한 분 기다렸다. 젊은이들이 고향을 뜨면서 한동안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던 갓난아이들이 근래에는 다문화가정이 많아져서인지 종종 볼 수 있다는 말을 남기며 할아버지는 손님을 맞으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37년째 장날마다 난전에서 생닭파는 아주머니

신도청이 확정된 지역에서 유일하게 5일장이 열린다는 풍천면 구담장터. 최소한 토박이, 터줏대감이라고 알려진 사람들 중에는 오랜 세월 생닭만 팔아 온 아주머니가 있다.

구담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곳. 시장입구 조그마한 사각 탁자에 빛바랜 노란색 장판을 깔고 생닭 몇 마리가 얹어져 있었다.  손님이 뜸한 틈을 타 곡물파는 이웃 난전 할머니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아주머니(64)가 “아이고, 어서 오이소!”하고 한달음에 달려와 웃음으로 반겼다. 객이 뜸한 장터에 귀한 손님인줄 알고 달려왔다가는 장터취재 왔다는 말에 조금은 심드렁해 졌다.

“아줌마 여기서 장사 얼마나 하셨어요?” 하고 묻자, “뭐라꼬?... 내가 육십너이니까 한 40년 가까이 됐지 뭐. 근데 그건 와 묻니껴?”라며 퉁명스럽게 되받던 아주머니는 시장 인심이 다 그렇듯이 이내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해 되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들의 타래를 풀어놓았다.

평소에는 치킨가게를 하지만 장날에는 둘째아들이 치킨가게를 지키고 아주머니는 장날만 난전을 펴서 생닭만 판다고 한다. 그렇게 생닭과 씨름한 세월이 벌써 37년 째.

끼니 걱정에 몹시 힘들었던 시절 살갑게 지내던 이웃집 아주머니 권유로 시작한 닭장사로 어느덧 반평생 세월을 보냈다. 그 긴 세월 끝에도 풍요함과 태평함은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은 번듯한 직장도 없고 장가도 못간 노총각 아들내미 걱정에 잠 못 이룬다고 한다.

“딴 건 할라 카이 할 수 없고. 오랫동안 하니 질리기도 하고... 나도 이젠 자식들 결혼하면 손 놓고 애들한테 맡겼으면 좋으련만... 근데 우선 장가를 가야지. 어디 좋은 처자 있으면 소개 좀 시켜 주이소. 어디 소개 좀 해봐요!”껄껄 웃으며 하는 말인데도 짐짓 절박함이 묻어났다. 할머니는 그렇게 인터뷰 내내 졸라댔다.

“옛날에는 시장이 붐벼서 발디딜 틈이 없었지. 지금은 이래 한산해도 옛날엔 장날이면 정신이 없었어.”

옛날에는 젊은 사람들과 장꾼들로 활기가 넘쳐 장사 할만 했던 장터 모습이 지금은 장사꾼들이 더 많다고 한다. 그러니 손님하고 흥정하는 시간보다 전을 편 장사꾼끼리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 더 많다고 한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바껴서 주문하면 닭을 갔다 주지만 그전에는 아침 일찍 손으로 다 잡았어. 마구 물 끓여가지고 또 마구 손으로 잡아 뜯고... 장날에는 혼자 힘들어가 학교 가기 전에 아들 둘을 붙들어놓고 대강이라도 뜯어주고 가라고 난리를 지겼어”하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늘 매출을 묻는 기자의 말에 생닭 60마리 가져와서 몇 마리 못 팔았다며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한 스무마리에서 삼십마리나 팔까. 남의 밭에 가서 일한 요량하고 일당 이만원, 만오천원 번다고 생각하고 하는게지 뭐”

이런저런 생각에 쌓인 듯 생닭을 이리저리 뒤집어 쌓던 할머니는 때마침 현장 수불을 나온 신협직원에게 거스름 돈으로 쓸 잔전을 바꿨다. 만원 두 장을 내밀고 천원권 스무장을 받아 전대에 밀어 넣은 할머니는 “그래 이쁜 처자 소개나 좀 해봐요”라고 또 졸라대며 환하게 웃어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