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의미를 되새기는 10월과 정론직필
소통의 의미를 되새기는 10월과 정론직필
  • 김부환
  • 승인 2009.10.22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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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의 진정한 의미는 대화가 아닌 소통

소통(疏通)은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하거나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을 말한다. 이쯤 되면 소통은 막연한 물질의 소통이 아니라 사람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을 뜻하게 된다. 의사소통의 대표적인 매개체가 언어와 문자다.

10월은 563돌을 맞는 한글날이 들어있는 달이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말과 글이 만들어진지가 563년 전이라는 이야기다. 나라의 문자를 만든 과정과 인물 그리고 공표한 날이 정확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경우는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한국어 사용 인구는 약 7740만 명으로 세계의 언어 중 13위에 이르며 세계지식재산권기구는 한국어를 아홉 번째 국제 공개어로 채택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했으며 인도양의 섬나라 스리랑카에서도 한국어학교가 생긴다니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국가브랜드를 높이는 문화상품이며 글자가 없는 민족에게 의사소통의 매개체를 만들어주는 최적의 문자중의 하나가 한글임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꿈의 알파벳’으로 칭송받아도 부끄럽지 않을 한글인 셈이다.

그런데 한글날 전후로 노벨 문학상수상자 소식이 들어왔다. 노벨문학상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올해도 아직 우리의 기대는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 잊혀진 동구권 독일계 소수민족의 실체와 소통한 독일여류작가 헤르타 뮐러가 그 영광을 안았다. 1999년 귄터 그라스의 ‘디 블레크토롬멜’(Die Blechtrommel : 양철북)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지 10년 만이다.

양철북은 교양소설과 악당소설(惡黨小說)을 바탕에 깔고 성장을 멈춘 주인공의 눈을 통해 반세기에 걸친 격동의 역사를 소통한 작품이다. 이처럼 문학도 따지면 인류와의 소통이며 독자와 사회와의 의사소통에 다름 아니다.

의사소통은 사람의 의사나 감정 그리고 진실 등 심리적 정신적 교류 말하는 것으로서 흔히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나누다’의 의미를 가진 라틴어 코무니카레(Comunicare)에서 유래됐으며 단순히 전달한다, 알린다는 뜻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무엇인가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데 머물지 않고, 심리적에서부터 사회적으로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이 공감되도록 전달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은 대화가 아니라 소통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소통, 의사소통에도 능력이 존재한다. '의사소통 능력'이라는 말은 델 하임즈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의사소통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하임즈는 언어와 문장을 구성하고 문장을 사용하는 방법만 강조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회문화적인 상호의존성으로부터 자신이 속한 사회에 적절한 대화를 이끌고 다른 형태의 소리 없는 문화적 지식과 함께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방법들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의사소통능력이란, 인간이 특정 상황에서 메시지를 전달하고 해석하며 인간 상호간에 의미를 타협하게 해 주는 능력이다. 즉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아는 능력이다. 어떤 배경에서, 말해도 좋은 대상과 아닌 대상은 누구인지, 말을 해야 할 때와 침묵을 지켜야 할 때,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하는지 등등의 사회적 진실을 구별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사회적 진실!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의사소통의 능력’을 설파하는 하임즈를 보노라면 언론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언론 중에서도 신문이다. 인간이란 원래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문의 경쟁력을 수려한 미사여구와 대중의 심리를 미묘하게 노리는 치밀한 전략으로 생각한다면 착각도 엄청난 착각이다.

▲김부환 발행인
‘정론직필’을 생각해 본다. 뜻은 있지만, 형태도 모양도 없는 어려운 단어다. 중앙언론도 지역 언론도 저마다 정론직필을 지향하지 않는 언론은 없다. 정론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언론들도 없지 않다. 중앙언론도 그렇고 지역 언론도 그렇다. 정론직필이란 단어는 이런 점에서 신문사들의 전유물도 아니며 그 의미에 대한 신문사들의 자의적 판단사항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번뜩이는 칼날, 추상같은 서릿발, 그 도도한 흐름을 읽어내는 오직 독자와 사회의 몫인 것이다.

지난달 재 창간으로 이제 완전히 새로운 걸음을 시작한 영남신문, 신 도청 새신문의 슬로건을 내건 영남신문이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진정한 ‘의사소통의 능력’이 과연 어디서 샘솟는 것인지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부환/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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