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을 우습게 보면 안된다 앙카드나"
"소백산을 우습게 보면 안된다 앙카드나"
  • 임기현
  • 승인 2010.03.19 10:1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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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역정기] 봄날, 소백산에서 식겁하다

 

▲ 눈 덮인 소백산 비로봉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리는 소백은 연화봉으로 이어진다. 우수도 경칩도 지났지만 소백산은 아직 한겨울이다.

우수도 경칩도 지났다. 후배와의 약속이 아니었으면 해가 중천에 오르도록 노곤한 휴일을 즐길 터이다. 봄나물 하러 가자고 조르는 아내에게 '아직 좀 이르지 않나'며 변명에 가까운 답변을 하고는 서둘러 배낭을 챙겼다. 현관문을 나서는 뒤통수에 '고런 식으로 해봐라'는 경고가 날아왔지만 봄날의 산행이 가져다줄 넉넉한 여유와 가슴 개운함을 생각하면 감당할 만한 일이다.

지역신문사에 다니는 후배 권군이 배낭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는 엉덩이를 조수석으로 들이민다. 소백산이 처음이라는 후배는 '최대한 짧은 코스로 가자'는 둥 '날씨는 괜찮겠냐는 둥' 잔뜩 오늘의 노고를 최대한 줄여보자는 수작을 건다.

"야, 소백산이라 해봐야 지리산이나 설악산에 비하면 거저 먹기지. 제일 빡센 코스래야 3시간이면 간다. 내려올 때는 다리만 살짝 살짝들면 돼!"
"아니, 형님 거 꼭대기에는 눈도 좀 남아있다 카던데, 괜찮을시껴?"

인터넷을 뒤져 본 모양이다. 그 말 끝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영상 10여도를 훌쩍 넘는 따뜻한 날씨에 눈이 있어봤자 대수롭지 않을 거라고 받아 넘기며 차를 출발한다. 목적지는 풍기에서 비로봉으로 오르는 출발점인 삼가동매표소. 안동에서 가자면 가까운 탓도 있지만 처음부터 후배에게 큰 소리를 쳐 놓은 터라 비교적 등산이 수월한 단양 어의곡코스가 아닌 제법 힘들다는 소백산 남사면의 삼가동코스로 내심 결정해 버렸다.

봄날, 아직도 소백산은 눈 속에 묻혀 있다

문제는 도착도 하기 전에 터졌다. 안동-영주 국도를 40여 분 달리자 저 멀리 소백산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 따스한 봄날에 소백은 한 겨울이다. 아니, 아예 히말라야를 연상케 하는 설산이다. 입 벌리고 경악하는 후배를 흘낏 쳐다보며 다음 할 말을 준비해야 했다.

"보기에만 그래. 올라가보면 별 거 아냐. 등산로는 사람이 많이 다녀서 멀쩡해. 안봐도 2차방정식이다."
"행님, 그래도 산은 깔보는 게 아이라던데. 거 뭐라카노 아이젠인가 뭔가 하는 거 있어야 안되겠능교?"

내친 김에 아이젠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가는 그랬다가 정말 등산로 상태가 심각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이 되어 조금 유연해지기로 작전을 바꾼다. 선배로서 최소한의 퇴로는 있어야 할 일이다. 사실 나도 소백산은 이제 겨우 두 번째다. 첫 소백산과 대면은 복학해서 대학 3학년 여름이었으니 만 20년이 넘은 셈이다. 실상 비로봉은 초행인데다 지금은 더군다나 저 멀리 보이는 소백에 눈이 허옇다.

"영주시내 들러서 아이젠 사자. 항상 대비는 해야지."
"야아, 뭐 개코도 아이라 카드만. 이 행님 뭐라카노?"

권군이 낌새를 차린 모양이다.  

▲ 삼가동에서 비로사로 오르는 조용한 산길에는 파릇파릇 봄의 물이 오르고 있다.

매표소를 지나 상가탐방지원센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짐을 챙겼다. 권군은 직업병인지 생수보다는 카메라를 준비하는 데 정성이다. 주차장 옆 야영장에는 따뜻한 날씨에 가족 단위로 천막를 치고 한낮을 즐기는 꾼들로 가득하다. 매점 아주머니 말로는 정상까지는 놀며 가도 3시간, 힘 좋은 장정은 2시간 남짓이면 간다고 한다. 하산 길은 좀 수월할 터이고 넉넉잡아 5시간이면 준비한 김밥도 먹고 사진도 찍을 여유는 충분해 보였다. 시계를 보니 정오, 비로봉을 향한다.

비로사까지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이 1.5km 정도. 따뜻한 날씨에 이마와 등에 땀이 배고, 괜히 겨울 등산복을 겹쳐 입고 왔다며 후배와 장단을 맞춘다. 점퍼를 벗어 배낭에 동여매고는 둘은 비로사에 이를 때까지 다가올 6월 지방선거 얘기며 지난 가을 봉정사에서 마신 국화차 얘기며 두런두런 수다 꽃을 피우며 걸었다.

아이젠까지 챙겼지만 무릎관절이..."행님 똥 마려운교?"  

▲ 비로사 초입을 지나 ‘비로봉 3.7Km'라 쓰인 안내판을 지나자 서서히 산길은 가팔라지고 숨도 따라 가빠진다. 눈이 녹아 내려서인지 온통 진흙탕으로 이어지던 산길이 중턱을 넘어서자 얼음발로 서걱거렸고 이내 반질거리는 눈길이 된다.

비로사 초입을 지나 '비로봉 3.7Km'라 쓰인 안내판을 지나자 서서히 산길은 가팔라지고 숨도 따라 가빠진다. 한 30여분을 씩씩하게 오르기는 했지만 속으로 '이거 장난 아니네'하는 마음이 절로 난다. 그래도 후배에게 내색은 못하고 그렁저렁 1시간 반을 올랐다.

나보다 4살 아래인 권군은 나이가 보약인지 지친 기색도 없이 잘도 오른다. 눈이 녹아 내려서인지 온통 진흙탕으로 이어지던 산길이 중턱을 넘어서자 얼음발로 서걱거렸고 이내 반질거리는 눈길이 된다. 10여분 더 올랐을 뿐인데 이젠 아예 눈길이다. 등산로 옆 숲으로는 한 뼘이 넘어 보이는 눈이 쌓여 있다. 우려가 현실로 변한 것이다.

"아이젠 신자. 안 되겠다."
"거 보소. 이거 안 샀으면 요기서 상황 끝 될 뻔했제."

쭈그리고 앉아 궁시렁궁시렁 아이젠을 차고 빠득빠득 눈길을 오른다. '비로봉 1.2Km' 표지판을 지나면서 다리 근력의 한계도 함께 지나고 있었다. 이런 지친 산꾼들의 노고를 덜어줄 요량이었던지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는 말끔히 꾸며져 있었는데, 나무계단이며 폐타이어를 가늘게 잘라 이어 만든 계단들이 연이어진다. 이 국립공원관리 당국의 세심한 배려가 나에게는 오히려 재앙이 되고 만다. 근력이야 쉬엄쉬엄 조절하며 갈 수도 있다지만 똑같은 높이의 계단을 똑같은 자세로 걷다보니 평소 약했던 무릎 관절의 생존을 위한 파업은 말릴 재간이 없다. 통증으로 어정쩡 구부려진 다리를 하고 등산용 폴에 몸무게를 얹으며 쭈그려 섰다.

"아이고, 얼매나 남았나?
"와 카능교? 거즌 다 왔는데요. 행님, 똥 마려운교?"
"무릎이 맛 갔나봐."
"내가 업고 가까? 마, 배낭만 아니면 업을 수 있는데..."

무릎을 감싸고 주저앉는 나에게 히죽히죽 던지는 농반 진반의 대꾸에서도 경상도 머슴아들의 냉정함과 다정함이 함께 묻어난다. 약을 올리는 건 분명한데 미워할 수가 없다. 한참을 쉬었다가 이를 악물고 비로봉 정상에 오르자 귓불을 에는 소백의 칼바람이 깔깔거린다.

 

▲ ‘비로봉 1.2Km’ 표지판을 지나면서 다리 근력의 한계도 함께 지나고 있었다.

 

▲ 삼가동코스의 깔딱고개라 할 수 있는 정상 700m전. 눈 덮인 비로봉이 코 앞에 잡힌다

칼바람 몰아치는 비로봉, 끝없이 이어지는 눈 덮인 영봉들

'해발 1439M' 정상임을 알리는 선돌 옆으로는 기념촬영을 하려는 산꾼들이 줄을 섰다. 다리는 아파도 기념사진은 찍어야 한다는 강박에 우리도 기웃기웃 차례를 기다린다. 정상에서의 사진은 만에 하나 훗날 제기될지도 모르는 '비로봉정복 조작설'에 대비키 위함이다. 권군과 나는 항상 의심과 장난끼로 의혹을 제기하는 아끼는 후배 B군을 동시에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번 소백산행도 그 음모주의자 B군의 제안이었다. 자신이 소백산을 여러 번 올랐고 선배의 체력을 고려해 비교적 짧고 완만한 '어의곡코스'로 안내하겠다며 너스레를 떨었었다. 그런데 정작 B군은 어젯밤 늦게 전화를 걸어와 개인적 일이 생겼다며 산행 취소를 통보했다. '제깟 놈 없으면 못갈까' 오기가 생겨 권군과 둘이 나섰던 것이다. 기념촬영을 하면서 '에이 형님이 비로봉에 가긴 뭘 갔다고 그래!'하는 B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입가에는 엷은 웃음이 돋는다.

탁 트인 산 아래로는 운무가 깔렸고 좌우로 펼쳐진 능선을 따라 국망봉과 연화봉이 내닫는다. 둘러쳐진 나무난간 아래로는 눈어림해도 정강이까지는 빠질 듯한 눈들이 수북수북 봉우리를 덮고 있다. 멀리 보이는 연화봉 너머로 내리면 '깔닥고개'를 지나 희방사 계곡으로 들 것이다. 20년전 중앙선 열차를 타고 희방사역에서 내려 펄럭펄럭 써클기를 휘날리며 연화봉을 향했던 영상들이 어지럽게 꼬리를 문다. 오방진 가락처럼 맴돌다 이내 크게 흩어진다.

▲ 비로봉 정상 산행을 나섰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정상을 밟아야 한다는 마음에 용을 쓰고 오르긴 했는데, 내려가는 일 또한 만만치기 않다.

'하산이 문제다' 이젠 어이할꼬?..."산을 깔보면 안된다 앙카다"

산행을 나섰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정상을 밟아야 한다는 마음에 용을 쓰고 오르긴 했는데, 내려가는 일 또한 만만치가 않다. 설악산의 설악동-오색코스 등 몇 번의 힘들었던 산행 경험을 되짚어보면 무릎이 좋지 않을 때마다 하산이 나를 괴롭혔었다. 오색약수로 하산하면서 바로 내려딛지를 못해서 아예 뒷걸음질로 내려왔던 기억이 선명하다. 불행하게도 우려는 정확했다.

"아이, 진짜로 마이 아파요? 이래 가지고 해 저물기 전에 내려갈라나..."

몸을 옆으로 하고 아픈 오른 다리를 길게 늘이며 한 발 한 발 내려딛는 꼴에 권군의 걱정도 늘어진다. 뒤따라 하산하던 이들이 걱정스런 눈빛을 건네며 속속 우리를 앞질러 간다. 그나마 아이젠이라도 없었으면 꼼짝없이 구조대라도 부르든지 해야 될 판이다. 눈길이라 권군이 어찌해줄 도리도 없어 보인다.

▲ 근력이야 쉬엄쉬엄 조절하며 갈 수도 있다지만 똑같은 높이의 계단을 똑같은 자세로 걷다보니 평소 약했던 무릎관절의 생존을 위한 파업은 말릴 재간이 없다.

그렇게 힘겨운 하산길에 예쁜 새집 같기도 하고 우체통 같기도 한 나무로 만든 '구급약품함'을 만난 것은 의외였다. 나에게는 야전병원인 셈이다. 올라올 때는 분명 그 자리 있었는지 인식도 못했는데 지금은 그 상자가 집채 만해 보였다. 스프레이 진통소염제를 뿌리고 압박붕대로 무릎을 동였다. 사용대장을 기록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한결 견딜 만한 것이 하산은 문제없겠다는 자신이 생긴다. 이래서 인간을 오만한 동물이라 하는가 보다.

그렇게 하산길의 절반을 지나며 아이젠도 풀었고 점점 눅눅해지던 산 공기는 결국에는 비가 되어 내린다. 매서운 날씨에 정상부터 줄곧 쓰고 왔던 털모자도, 장갑도 흠뻑 젖고 방수복 위로 빗물이 흘러내린다. 질퍽거리는 산길은 이제 진흙탕이 되어 미끈미끈 힘겨운 다리를 농락하고 있다. 참 거지꼴이 따로 없다. 영락없는 패잔병 꼴이다. 오만함에 대한 소백의 꾸지람이라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하지만 오늘 단단히 배우고 간다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해 본다.

압박붕대를 감은 오른쪽 다리는 주차장이 가까워지자 마치 석고붕대를 한 듯 뻣뻣하게 느껴진다. 삼가탐방지원센터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안도감에 참았던 긴 한숨이 터져 나온다. '휴~ 다 왔다'고 혼잣말을 하고는 웃옷 속주머니를 주섬거린다. 잊었던 담배 한 모금이 갑자기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성급히 불을 붙이려는 나를 권군이 만류한다. 아직은 등산로이니 금연이란다. 그래도 아쉬워 빈 담배를 물고 걸었고 주차장 매점에 들어서며 불을 당겼다.

"야~ 참 꿀맛이다."
"행님아, 오늘 참 할 말 많겠다. 그지요? 그러기에 산을 깔보면 안된다 앙카다."
"시끄럽다, 빨리 가자 안동으로. 막걸리는 내가 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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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 2010-03-21 19:22:43
중앙선을 타고 희방사역에 내렸다... 나도 85년 12월, 20살 끝자락에서 여자동기 3, 남자동기 4명과 겁없이 올랐다가 조난을 당해 눈비탈길에서 울고불고 하는 여자동기를 업고 내려온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르네. 그 때 희방사 여관방에서 계란탕을 맛있게 끓여 주었던 언니들아, 잘먹고 잘살고 있나.

포데로사 2010-03-21 16:04:18
비로봉 인증샷은 뽀샵이다.
나날이 좋아지는 뽀샵의 기술이 놀라울 뿐이다.
연기력도 일취월장이고... ^^;;

두 분 고생하셨고 글과 사진도 좋습니다.
이 글의 '컨셉'은 '엄살'인가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