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게 말을 걸다②-애증 깊었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우뚝 선 산처럼, 휘감는 물처럼
사진에게 말을 걸다②-애증 깊었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우뚝 선 산처럼, 휘감는 물처럼
  •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20.09.0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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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 깊었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생전에 아버지는 늘 벽처럼 다가왔다. 추정해보니 내 나이 10살부터다. 어느 날 꾸지람을 듣는 태도가 불량 했는지 불같은 화를 내며 내 볼을 때렸다. 코피가 흘렀지만 아버지는 그냥 바깥으로 나갔다. 피를 닦을 생각도 없이 오기로 버티고 서 있는 나를 발견한 건 어머니였다. 이십대가 될 때까지 아버지가 싫고 미웠다. 가난한 생활은 아버지 탓이었고 어머니만 고생을 도맡았다고 판단했다. 멀리 일일노동자로 떠난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은 날들은 행복했다. 무수한 날을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21살, 대학생 시위 사건으로 짧은 수배생활을 한 적이 있다. 경찰이 수시로 고향집을 찾아왔고, 나는 한 달 넘게 집을 떠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친구 연락으로 안동시외버스터미널 뒤 허름한 식당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경찰서에 출두만 하면 해결 된다'고 설득했지만 난 거절했다. '고개를 숙이는 건 타협이고 패배'라고 주장 했다. 머리가 굵은 아들을 한참 바라보던 아버지는 소주잔만 기울였다. 밥 챙겨 먹고 다니라며 구겨진 만원짜리 다섯 장을 주셨다. 난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담배를 피웠다. 그때서야 농사지을 땅 한 평 없이 도지를 내어 반농반노(半農半勞)로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나는 그동안 죄송했다는 말을 겨우 꺼낼 수 있었다. 아버지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걸 훔쳐보았다.

1984년 8월의 아버지. 마루에서 푸짐한 식사중이시다.
1984년 8월의 아버지. 마루에서 푸짐한 식사중이시다.(ⓒ유경상)

얼마 전 새벽 잠결에 동생들과 아버지 생신상을 차리는 꿈을 꿨다. 돼지갈비에 양념을 버무렸고 술은 정종을 준비했다. 자식들이 준비한 맛있는 진수성찬에 술잔을 기다리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인 아버지의 얼굴을 잠깬 후에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한참을 우두커니 앉았다가 커피를 마시는데 울컥 올라온 뜨거운 기운이 눈물로 변했다. 아마 위 사진을 몇 번 본 기억이 투영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슬프고 화난 기억만 왜 유독 많은 걸까? 즐겁고 행복한 적이 많았을 텐데. 중학교 3학년 때 '책 읽는 걸 좋아하니 아무래도 기술계통보다는 관료가 되든지 선생이 좋을 거 같다'며 인문계통 진학을 적극 권유한 건 아버지였다. 집에서 키우던 정든 개를 팔고, 정관수술 후 받은 사례금이 내 고등학교 진학에 보태어졌다는 걸 돌아가신 후에 들었다.

1990년 7월 여름밤에 주무시다가 불현듯 돌아가신 아버지는 겨우 58세였다. 2007년 봄 18년 만에 아버지 산소를 이장하는 날 당신의 육신은 흙과 먼지로 풍화돼 있었다. 누워계셨던 자리 흙 색깔은 더 짙고 검었다. 정성스레 보자기에 쓸어 담았다. 살다 보니 2006년 가을에 어머니도 아버지를 뒤따라 떠나셨다. 아득한 외로움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어느 날 면도를 하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중년의 아버지 모습이 스며들어 있었다. 정한(情恨)이 묻어나는 내얼굴에 겹쳐지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진다. 꽃샘추위가 반짝 엄습하더니 봄기운이 천지를 휘감기 시작했다. 아버지 산소 옆에 가서 그냥 봄볕을 쬐고 싶다.

 

우뚝 선 산처럼, 휘감는 물처럼

내성천에 안겨 있는 학가산

산도 흘러내린다. 산 등줄기를 타고 함께 흘러내리던 한 두 물줄기가 도랑을 일궈 천(川)과 강(江)을 창조해 낸다.
학가산 최고봉 882m 너머 아래에 내성천이 흘렀다. 모래톱은 마치 거대한 흰 뱀이 구불렁거리듯 땅을 휘감아 기어갔다. 학가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내성천 광경에 눈물을 찔끔거렸다. 아~ 천혜의 산하를 몸으로 깨닫기 시작한 시점이다. 벗들과 함께 오르며 남겨진 1995년 즈음 이 사진을 볼 때마다 감탄이 흐른다.

1987년 이십대 초, 시인 이산하의 <한라산>을 읽으며 '분단의 역사'에서 죽임을 당한 자와 죽지 못한 자의 통곡에 분노했다. 청년시절 사람 구실하며 살고자 했으나 뒤돌아보니 추상과 관념이란 울타리에 갇혀 있었다. 2000년 8월 삼십대 중반, 시인 이성부의 <지리산>을 읽으며 '산하'와 '조국'에 대해 다시 통감했다. 내 가까이 우뚝서 있어서 언제든지 바라보고 오를 수 있는 학가산을 재발견한 계기가 되었으리라.

1995년경 필자의 모습. 학가산 아래로 내성천이 흐르고 있다.(ⓒ유경상)

백두대간 문수지맥에서 솟아오른 학가산을 안동인은 진산으로 꼽았다. 영주의 앞산이고 예천의 동산이었다. 수많은 승려와 선비가 드나들며 정진하며 유람으로 삼았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흰 모래톱 내성천에 의지해 세 고을의 민초는 마을과 전답을 일구었다. 이젠 물길을 거대한 댐에 가둬 썩히며 모래는 사막화 해 먼지로 날려 보내고 있다.

2011년 6월, 군 입대를 앞둔 아들과 학가산을 넘어 내성천에 갔다. '살아갈수록 이 땅을 알아야 한다. 이곳은 소백산의 정기가 흐르는 줄기이다. 내성천의 맑은 기운을 받은 대지다. 산줄기와 물줄기를 보고 만지며 이 땅의 사람으로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 들려주듯 중얼거렸지만 내 수준에서 가당찮은 일이다. 그러한 바람을 소망할 뿐이었다. 한 생을 산처럼 강 처럼 살아가고 싶은 욕심을 냈으나 헛된 망상에 머물렀다. 잠깐 살아보니 우뚝 서서 맞닥뜨릴 시절이 있고, 고비를 돌며 희노애락을 맛보는 유장한 시절이 있다. 서있으되 흘러가는 것이 인간사의 일부이다.

지나온 십여 년, 산 속 깊숙이 들어가 강물처럼 살고 싶었다. 내성천을 건너고 학가산 골짜기 그 언저리에 숨어살고 싶었다. 소백의 산줄기와 내성의 물줄기에서 살아갈 날이 곧 오리라는 상상만 키우던 시간이었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3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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