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아카이브④-호외요 호외
발굴, 아카이브④-호외요 호외
  • 편집부
  • 승인 2020.09.08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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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창고 1호(2018년 12월 발간) ‘수집왕’으로 소개된 박상영 선생이 1960~90년대 빛바랜 신문 호외를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기증해 주셨다. 호외는 신문사가 통상의 정기 호 이외에 중대한 뉴스를 신속하게 보도하기 위해 임시로 발행하는 인쇄물을 일컫는다. 실시간 뉴스가 올라오는 지금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촌각을 다투는 큰 사건을 한시라도 빨리 전달하기 위해 타블로이드판 1장 짜리로 급히 찍어내곤 했다. 엄중한 시대, 격동의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사고를 배달했던 그 시절의 호외를 지난 호에 이어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1980년 2월 29일 한국일보 호외(ⓒ경북기록문화연구원)

1980년 2월 29일 한국일보 호외
오늘 687명 復權(복권) 단행

최규하 대통령이 29일 상오 10시 국무회의를 거쳐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문익환 씨를 비롯한 긴급조치 관련자 등 6백87명에 대해 복권 조치를 단행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 날 복권 조치된 사람은 일반복권 5백 75명, 특별복권 1백 12명이며 학생 3백73명, 정치인 22명, 종교인 42명, 교직자 24명, 언론인 9명 기타 2백 17명에 대해 복권조치를 한다고 보도했다. 복권대상자의 심사기준은 일반복권자의 경우는 긴급조치9호 위반자 중 형집행종료나 면제된 자, 특별복권의 경우는 긴급조치와 타 범죄 경합 수형자 및 일반 수형자를 대상으로 했다. 또 정부는 이같은 원칙하에 예외 규정을 두어 반공법위반자인 이영희 교수와 백낙청 교수를 특별 복권 조치로 구제했는데 반공법위반자가 특별복권 조치되기는 행형사상 이번이 처음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1980년 한국일보의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중학동, 우편번호 110으로 되어 있고 당시 신문 구독료는 월정 1,500원, 1부 80원이었고 전화번호는 두 자리 숫자 72국으로 시작했다.

 

1981년 1월 24일 한국일보 호외(ⓒ경북기록문화연구원)

1981년 1월 24일 조선일보 호외
非常戒嚴(비상계엄) 해제

정부는 지난 79년 10월 27일에 선포된 전국비상계엄령을 1년 3개월만인 1981년 1월 25일 0시부터 해제하기로 했다고 정무대변인 이광표 문공부장관 이 24일 발표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80년 10월 16일 취임한 전두환 전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24일 오전에 비상계엄해제 대통령 담화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1981년 조선일보의 주소는 태평로1가 우편번호는 100, 구독료는 월정 2,500원, 1부 120원이었고 전화번호는 두 자리 숫자 75국으로 시작됐다.

 

1982년 4월 27일 조선일보 호외(ⓒ경북기록문화연구원)

1982년 4월 27일 조선일보 호외
술에 만취 巡警(순경), 카빈銃(총) 무차별 亂射(난사)

1982년 4월 27일의 호외는 정치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총기 난사 사건이다. 전날 저녁 9시 50분쯤 경남 의령군 궁유면지서 소속 우범근 순경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34명이 사망하고 25명이 중상을 입는 전대미문의 총기 난사 사건으로 전국이 충격에 빠진 사건을 호외로 냈다. 술에 만취한 순경이 내연의 처와 다툰 후 지서에 보관 중이던 카빈 2정, 수류탄 7개, 실탄 180발을 들고 나와 불특정 다수의 시민을 향해 총기를 난사한 후 근처 우체국에 들어가 근무 중인 직원들을 향해서도 총을 마구 쏜 후 본인은 다음날 새벽에 수류탄으로 자폭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이 사건으로 서연화 내무장관이 사의를 표명 했다는 호외다.

 

1984년 8월 10일 조선일보 호외(ⓒ경북기록문화연구원)

1984년 8월 10일 조선일보
河亨柱(하형주)도 금메달

냉전시대 공산국가의 올림픽 불참이 있었지만 84년 LA올림픽은 어느 해보다 올림픽 열기로 뜨거웠다.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호외 타이틀은 '하형주도 금메달'인 것으로 보아 바로 전에도 금메달을 땄다는 것인데 바로 레슬링의 김원기 선수가 그 주인공. 하형주 선수가 유도 95kg급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내용이 호외에 실렸다.

 

1990년 1월 1일 경향신문 호외(ⓒ경북기록문화연구원)

1990년 1월 1일 경향신문
전두환씨 국회증언 끝내 중단

1990년 새해 벽두 호외는 5공 청산 작업의 최종단계로 전날 행해진 전두환 전대통령의 국회증언 중단에 관한 뉴스다. 이날 청문회에서 광주문제에 관한 전씨 의 증언에 불만을 품은 평민당의 정상용, 이철용, 조홍규 의원 등이 방청석으로부터 뛰어나와 격렬히 항 의하고 재차 정회가 선포된 직후 노무현 의원이 자신의 명패를 퇴장하는 전씨를 향해 던졌다. 이에 민정 당이 회의 참석을 거부하고 전씨는 자신의 국회증언 이 4당이 모두 합의하지 않는한 출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증언을 중단했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정치권의 1989년내 5공 청산 목표가 좌절됐으며 전두환 전대 통령은 민정당 의원들의 박수와 야당 의원들의 야유 속에 국회의사당을 떠나 백담사로 가기 위해 차에 오르는 모습의 사진이 담겨있다. 1990년은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자리한 경향신문의 전화번호가 730국으로 시작하고 구독료가 월 3,500원, 1부에 150원을 하던 시절이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4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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