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의 기억-독립운동 도왔던 백태성 원장과 백병원 사람들
근현대의 기억-독립운동 도왔던 백태성 원장과 백병원 사람들
  • 조창희(아동문학가)
  • 승인 2021.06.02 17: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광현 목사와 최의숙 권사

안동교회 제7대 담임목사인 김광현 목사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거쳐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일본 고베시에 있는 중앙신학교에 전학했다. 졸업 후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할 때 안동교회(당시 안동중앙교회)의 초빙을 받아 1943년 1월 17일 부임, 1979년 조기 은퇴하여교회에서는 원로목사로 경안노회에서는 공로목사로 추대 되었다. 평양에서 공부할 때 교회 합창단에서 열심히 노래하던 최의숙 권사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교제하던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부산 초량교회에서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그 시절은 미국과 일본의 전쟁으로 세계정세가 혼란스럽던 때 였고 일제의 탄압도 극에 치닫던 때였다. 강제로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추방시켰고 신학교를 위시하여 각급 학교를 강제로 폐교시키고 선교사들이 설립한 병원도 강제로 폐원 시켰다. 서울 세브란스 병원도 폐원 되었고 안동성소병원도 폐원 되었다. 또한 학교에서는 조선사람, 조선학생이 조선말도 못하게 하고 조선글도 못 쓰게 했다. 오직 일본말만 하고 일본글만 쓰게 했던 시절이었다.

 

안동교회에 문을 연 백병원

안동에서는 성소병원이 강제로 폐원되니 부원장으로 몸담고 있던 외과의사 백태성 박사는 개인 병원을 개원해서 안동 백병원으로 변신하고자 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백태성 박사의 의중을 직감한 김광현 목사가 먼저 제안을 했다. “개인 병원을 하고자 해도 현재 마땅한 건물도 없는데 안동교회에 비어 있는 건물이 있으니 여기서 안동 백병원을 개원하고 적당한 대지와 건물을 확보 한 후에 이전해 가면 어떻겠나?” 김광현 목사의 제안을 좋게 생각하고 안동교회 안에서 안동 최초의 외과병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김광현 목사는 안동교회에서 안동 최초의 외과병원이 설립된 역사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고 늘 말씀해 주셨다.

이후 안동 백병원은 성소병원 큰길 건너편 광석동에 넓은 대지를 구입하여 병원 시설과 입원실을 갖추어 이전하면서 안동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도약을 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둘째 딸(백낙원, 1935년생)이 학교에서 일본말만 하게 하니 집에 돌아와 부모님 앞에서 일본말을 하게 됐다. 백태성 박사는 딸을 꾸짖으면서 “조선 사람은 조선말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튿날 학교에간 백낙원은 평소와 같이 조선말을 했다. 이를 본 일본인 교사가 “조선말은 하지 말고 일본말만 하라고 했는데 왜 조선말을 하느냐?”고 하면서 회초리로 때리기 시작했다. 백낙원은 일본인 교사에게 또렷이 답변했다. “아빠가 그러는데 조선 사람은 조선말을 해야 된대요.” 이말을 들은 일본인 교사는 머리끝까지 약이 올라서 어린 여학생을 더욱 심하게 때렸다. 온몸에 회초리 자국과 피멍이 들어서 집에 온 딸을 보고 백태성 박사는 약을 발라 주면서 안아주었다. “이제부터는 집에서는 조선말을 하고 학교에 가서는 일본말을 해라.” 이와 같이 가정교육도 철저한 조선 민족임을 가르쳤다.

일제의 예비 검속으로 일본군 헌병들이 갑자기 집에 나타나서 백태성 박사를 헌병대로 연행해 갈 때 백낙원은 겁에 질려서 “아빠, 어디 가는 거야? 아빠 가지마.”하며 울면서 대문 밖까지 뒤쫓아 나갔다. 이때 백태성 박사는 걱정하는 딸을 달랜 후 헌병대로 끌려갔다. 내심으로는 병원 직원 이주헌 씨의 독립운동이 발각되었나 하고 불안했는데 다행히 그 일은 발각되지 않았다. 백태성 박사는 특유의 배짱으로 일본군 헌병 분실장을 압도하여 당일로 모든 조사를 종결짓고 훈방 조치되었으나 이후 매일 병원 업무가 끝나면 일일 보고서를 헌병대에 제출해야만 했다 한다.

백태성 박사는 슬하에 9남매를 두었다. 장남 백낙호(1929년생)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재학 중 6.25 전쟁이 발발하여 바리톤 성악가 오현명 씨와 함께 인민군에게 잡혀서 강제 납북 중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훗날 모교인 서울대학교 음대에 교수로 부임하여 음대 학장을 역임하고 명예교수가 되었다. 차남 백낙승(1930년생)은 안동농고 재학 중 6.25전쟁이 발발해 학도병 1기생으로 참전하여 공군사관학교에 합격,전투기 조종사가 된 후 공군소장으로 공군사관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1945년 봄 광석동 백병원에서. 중앙에 흰 가운을 입은 이가 백태성 원장,
오른쪽 한복을 입은 이가 부인 조은희 여사.(ⓒ조창희)

이주헌과 독립운동

이주헌 씨는 안동 백병원에서 방사선실 과장으로 취업했다. 그는 극비리에 안동지역에서 일본군에 맞설 독립투사들을 규합하여 독립투쟁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독립투사들의 비밀 모임이 필요할 때면 백병원 방사선실에서 극비리에 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 중심에 이주헌 씨가 있는 것을 눈치 챈 백태성 원장은 어느 날 조용히 이주헌씨를 불렀다. 병원 하루 일과가 끝난 후 두 사람이 낙동강 제방 둑길을 걸으며 인적이 없을 때 이주헌 씨의 독립투쟁이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고 군자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후원 할 터이니 염려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이주헌 씨는 만약에 백태성 원장이 ‘입장이 난처하니까 백병원에서 비밀 결사 모임 갖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제동을 걸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도리어 협조해 주고 물질적으로도 지원해 주겠다는 원장의 말에 놀랍고 고마워했다.

이때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저항 세력 ‘조선회복연구단’이 극비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는데 꼬리가 잡혀 발각이 되었다. 이주헌 씨는 자신이 중심이 되어 몇 사람의 비밀 결사대원들이 있었으나 외관상으로는 조선회복연구단에 가입하여 한마음이 되어 독립투쟁을 펼쳤다. 그러다 조선회복연구단이 발각이 되어 핵심회원들부터 연행되어 조사받고 구속이 되는데 이주헌 씨도 1945년 2월경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안동형무소(현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 직후에 백태성 원장이 구금되어서 심문을 받았으니 모든 것이 탄로 난 것이 아닌가?하고 불안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회복연구단만 탄로 나고 백병원에서 모인 비밀 결사대 행적은 탄로 나지 않았던 것이다. 백태성 박사는 심문을 받고 훈방 조치되었으나 그 다음에 연행되어 구금된 김광현 목사는 안동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와 같이 안동에서의 저항 운동이 확산되자 일제는 위기감을 느꼈는지 안동에 일본군을 증파시켜서 안동교회를 징발하여 일본군 주둔 사령부로 삼았다. 교회당이 하루아침에 일본군 사령부가 되었고 앞마당에는 온통 일본군 천막을 설치해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안동교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서당골 뒷산에 있는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당하여 비어있는 선교사 관사를 임시로 빌려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필자의 부모를 비롯한 온 가족은 1944년 12월 5일에 강원도 철원에서 경북 안동으로 이주하여 아버지가 백병원 서무과장으로 취업했다.  따라서 1945년 초기 역사와 함께 했던 선친(조상국)은 몇 십 명 교우들이 주일에 선교사 사택에 모여서 앉을 자리가 비좁은 곳에서 선채로소리 없는 눈물의 예배를 드렸다고 했다. 백태성 박사는 필자의 큰 고모부가 되시니 아버지와는 처남과 매형의 관계가 된다. 필자의 선친께서 강원도 철원에서 살 때 금융조합(오늘날 농협은행 전신)에 근무하면서 월급 60원을 받았는데 안동 백병원에서 서무과장으로 일하면서120원을 월급으로 받았다, 그만큼 병원이 왕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주헌 씨가 구속되어 방사선실 과장이 유고 되었으니 임시조치로 서무과장인 선친께서 방사선실 과장을 겸직하게 되었다.

광복 전 소프라노 성악가 김천애 선생이 안동에 와서 조선의 젊은이들과 남녀 학생들을 한곳에 집결시켜 놓고는 노래를 몇 곡 부른 후 인사말과 강연을 하는데 ‘조선의 젊은이들은 징용에 자원해서 나가라’는 것과 ‘조선의 처녀들은 자원해서 정신대에 지원해 나가라’는 내용의 강연이었다. 이때 김광현 목사 사모 최의숙 권사는 처녀 시절부터 교분이 있는 김천애 선생을 모처럼 안동에서 만나 반가워했는데 친일파로선회하여 징용을 가라, 정신대로 가라하는 것을 보고 실망했고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하며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고 안동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김광현 목사, 이주헌 선생, 조선회복연구단 회원들 등 많은 민족 지도자, 독립운동가들이 석방되어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미일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므로 안동에 정착해 있던 일본인들이 일제히 본국 일본으로 떠나갔다. 따라서 안동여고에서는 교사 부족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때 안동교회에서는 최의숙 권사와 필자의 어머니(장민선)를 임시 교사로 안동여고에 파견하였다. 최의숙 권사는 음악교사가 되었고 어머니는 체육과 미술담당 선생이 되었다. 필자의 어머니는 평양 정의여고 다닐 때 정구선수로 활약하여 일본에 원정 경기도 다녀왔고 자수 놓는 손재주가 있어서 미술시간에 주로 자수 놓는 것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어머니는 일본 고베시에 있는 성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이후 안동여고에 정규 교사가 발령 나고 교사 부족 사태가 해결된 후에 최의숙 권사와 어머니는 안동교회로 복귀하여 교회 유치원 보모로 헌신하였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9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