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⑩- 진성이씨 노송정 종가 최정숙 종부
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⑩- 진성이씨 노송정 종가 최정숙 종부
  • 강병규(안동MBC PD)
  • 승인 2021.06.03 10:4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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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맞는 종부의 밝은 미소는 이방인들의 낯설음을 금방 잊어버리게 해주었다.

600년 가까이 오래된 집에서 그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품격과 격조, 그리고 가풍을 지켜온 분. 최정숙 종부의 온화한 미소는 얼마나 고된 삶이었는지 자칫 잊어버리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청해 듣는 내내 종부의 자리가 어떤 시간을 흘러오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열 차례 이상의 제사보다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 다시 종부의 삶을 이어갈 며느리와의 생각 나눔에 있어 종부의 지혜를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다.

노송정 종가는 어떤 곳입니까?

안동 와룡에 있는 주촌 종가가 제일 큰집입니다. 그 집의 셋째 아드님이 저희 18대 중시조이신 계繼자 양陽자 쓰시는 어른입니다. 그 어른이 혼인을 하고 분가를 하셔야 됐었다고 합니다. 예안 부포에 사셨는데 봉화 훈도로 부임하면서 신라재 고개에서 쉬고 계시는데, 그 골짜기에서 신음소리가 나더래요. 그래서 이래 보니까, 허기진 스님이 거의 기진맥진해 계셔서 일으켜서 보따리에 주먹밥을 먹이고, 물을 먹이고 난 다음 기운을 차리게 했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내가 분가를 해야 되는데, 집터가 하나 필요하다’고 했더니 그 스님이 이 자리를 점지해 주셨다고 하네요. 당대에 대과 급제하는 후손을 볼 것이라고 해서 여기에 집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퇴계 선생의 부친 식자 어른과 동생이신 송재 이우 선생을 낳으시고 길렀고, 퇴계 선생도 이 집에서 나서 34세까지 사셨다고 합니다. 훌륭한 어른을 배출하게 된 것이죠.

 

이 종가에 퇴계선생태실이 있죠?

네 바로 저기 튀어나온 방이 태실입니다. 요즘은 기 공부 하시는 분들이 많이들 찾아오세요. 이 집은 일곱 줄기의 기가 흐른다고 하더라구요. 이 태실 주위에 제일 큰 기가 흐르고, 방방 곳곳에 다 기가 흐른대요. 돌아보면 일제 강점기 때나 임진왜란 때나 환란이 많았잖아요. 그런데 한 번도 손실이 된 적이 없고, 18대 동안에도 대가 끊긴 적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이 대문을 닫은 적 없어요. 저희가 한 달씩 비워도 대문을 안 닫아요. 누가 한 번 어디 신문에 기고를 했는데, 어떤 도시 사람이 분재하려고 여기 기왓장을 하나 가져갔대요. 그런데 도저히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가져다 놨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중시조께서 그 스님을 구해준 게 큰 업을 쌓은 것 같아요.

 

친정도 종갓집인가요?

친정도 성주에서 불천위 종가집이에요. 저는 그 집 셋째 딸이에요.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이라고, 저희 13대 선조가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님 수제자고, 성주에 입향한 지13대 째입니다. 한강 선생님께서 ‘수하삼현’이라고 저희 선조를 칭하셨다 그래요. 서울서 벼슬하시다가 어머니와 함께 내려오셔서, 이 고장이 너무 좋고 한강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이렇게 터를 잡으셨다고 하네요.

 

친정에 계셨을 때부터 어머님께 종가의 예법 같은 것을 배워서 익숙했다 할 수 있겠네요?

네, 저희 어머니도 제가 참 많이 배울 수 있는 덕 있는 분이셨어요. 어머니는 아버지만큼 유식한 분은 아닌데, 생활에 굉장히 지혜가 있으셔서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저희한테 이건 하면 안 되고, 이건 해도 되고, 이렇게 가르치신 게 아니라, 늘 당신 하시는 일만 열심히 하세요. 저희가 거기에 안 따를 수 없을 만큼, 몸에 푹 젖어 들만큼 그렇게 사셨지요. 혼내거나 이렇지 않아도, 엄마를 거역할 수 없는 그런 덕을 갖추신 분이었었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요.

 

어머니한테 영향을 많이 받으신 거죠?

어머니한테 많이 배웠죠. 어머니는 “종갓집에는 누가 오더라도 빈 입에 보내서는 안 된다. 먹을 게 없으면 물이라도 한 그릇 떠서 입이라도 적셔서 보내야 된다.” 이런 말씀을 늘 하셨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죠. 이 집에서 왔을 때 할머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어머니가 딸만 다섯을 내리 낳았어요. 그래서 시어머님한테 구박을 많이 받았죠. 안 쫓겨 나간 게 다행이죠. 그래도 워낙 인품이 좋으셔서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다음 시간적여유가 있을 때 동네 사람들한테 인정을 많이 받으셨죠.

상례라든지, 혼례라든지, 가례에 대한 기본 상식이 충분하셨고, 솜씨도 좋으셔서 도포 없는 사람들 천만 구해오면 다 만들어 주시고는 했지요. 83세 돌아가실 때까지 늘 바느질을 하셨어요. 손이 갈라지고 눈도 나쁘고 한데 ‘엄마 그만하라’고 저희가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 해주고 간다” 하시면서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사촌에 육촌들까지 옷감을 구해오면 이만큼 쌓아놓고 하나하나 다 옷을 지어줬어요. 친척 집에 상이 나면 거기 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다못해 염습하는 것도 문 밖에 앉아서 무슨 옷을 입어라, 그 다음은 무엇을 해라 하면서 다 지도를 하셨죠. 그리 돌아가시니까 동네 사람들이 ‘누구를 의지하면서 사냐’고 그렇게 말이 많았어요. 제가 결혼하고 나서도 저희가 살던 대구에서는 성주가 가깝고 해서 혼자 계실 땐 자주 가서 뵙고 또 오시기도 하고 했지요. 이렇게 거기에 푹 익었다고 해도 될 것 같아요.

 

친정도 불천위 종갓집이라 상당히 엄한 분위기였겠네요?

어렸을 때는 저희 할아버지가 많이 엄하셨대요. 종손으로 계시면서 아들한테 엄청 엄하셔가지고, 아침에 할아버지께서 외출을 하시면 어디로 가셨는지도 모르는데 돌아오실 때는 항상 마중을 나가야 했습니다. 어두울 때 돌아오시는데도 마중이 안 되어 있으면 혼났다는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저희 삼촌이랑 세 분이 삼형제분이 계시는데 우애가 굉장하셨어요. 저희 막내 삼촌이 서울에서 고위직에 계시는데 우애가 굉장히 좋다고 소문이 났었거든요. 한 동네 교직에 계시는 삼촌이 한 분 있었는데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꼭 형님한테 문안하고 가시고 퇴근하면 또 오시고 하면서 그런 모습을 굉장히 피부로 느끼면서, 보면서 컸어요.

우리는 육남매였어요. 막내가 남동생이죠. 저는 셋째 딸이구요. 맏이가 결혼하면 둘째가 책임지고, 큰 말이 나가면 작은 말이 한다고 늘 그렇게 알아왔었어요. 당연히 하는 걸로 알고 있었어요. 내 친구들 데리고 방학 때 저희 집에 가면 좀 자랑스럽게 생각하곤 했죠. 친구들도 ‘얘는 종가집 딸이니까, 당연히 알아서 한다’는 분위기였어요.

 

학창시절 얘기가 나오네요. 그때는 어땠습니까?

여고 시절에는 글을 좀 쓰고 싶어서 문학반에 들어가서 공부도 하고, 친구들하고 고향에도 가고 하면서 문학 공부 한답시고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다 사치에요. 왜 그랬냐 하면 다른 일을 하다가도 뭔가 생각이 나고 하면 어디에다 적어 놓고 해야 하는데 적어 둘 여건이 안 되고 나중에 방에 들어가서 늦게 쓰지 하면 금방 잊어버리고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더라고요. 그런 차원에서 대학 갈 생각도 안했어요. 제 밑에 동생이 있기도 했고 또 시골에서 그때 여고 나오는 것만해도 굉장한 탈출이었어요. 초등학교를 43명이 졸업 했는데 중학교를 간 사람이 6명밖에 없었어요. 고등학교까지 연결된 사람이 3명? 그때는 다들 어려웠어요. 딸을 공부시킨다는 것은 별로 자랑스러워하지 않았거든요. 다행이 저희 친정아버지는 많이 깨치셨죠. 그래서 그때는 졸업하고 취직하려고 밤 새고 공부를 했었어요. 낮에는 집안일 하고 밤에는 내 방에 가서 호롱불을 써가지고 했었죠. 저희 할머니가 외기름 닳는다면서 호롱불을 끄라고 그러셨지요. 저는 방문에다 쳐놓고 공부하고 했어요. 문에 빛이 안 새나가도록. 어쨌든 할머니하고 여러 식구가 부대끼며 살았던 게 지금 사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여고까지 대구에서 다니다가 졸업하고 시골에 다시 들어가 있으면, 어디 잠수한 것처럼 푹 잠겨있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직장을 구하는 길 밖에 없었죠. 그래서 공부를 좀 했죠.

 

혼인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제가 직장 생활을 하던 대구에서 담수회라는 양반 어른들 모임이 있었어요. 약전골목에서 어른들끼리 모여 얘기하시다가 3년 전쯤부터 혼담이 오갔대요. 그런데 저는 ‘종갓집에서 컸으니까 종갓집엔 안갈 것이다’ 이렇게 하고 3년을 끌었는데, 저희 아버지가 자꾸 거절하기도 그러니까 선이라도 한 번 보고 마무리를 짓자고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인연이었는지 반 강제성이 있었지만, 선택됐던 것 같습니다. 선을 보는데 남편은 아버님이 안계셨으니까 시조부님하고 같이 나오시고 시어머님은 저희 혼사에 별로 관여를 못하셨던 것 같아요. 할아버님이 엄해서요. 시댁이 어려운 환경에 종가 살림을 맡아야 하는데 그 당시에도 시집가려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규수가 괜찮다더라 그런 말은 들었을 것 같지 않은데, 좀 엄한 집안에서 컸으니까 별로 망나니 행동은 안 하지 않겠나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선보고 난 다음 어떠셨어요? 종손이 마음에 들던가요?

처음부터 선이라는 이 한 번의 형식을 거쳐서 이 혼인은 끝을 낸다는 생각으로 갔으니까 당연히 안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저희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연세가 다 많았을 때인데, 나로 인해서 자꾸 걸음하고 고민하게 하는게 도리가 아니었던 것 같았어요. 선을 보고나서 아버지가 어땠냐고 물었는데 어땠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안동서 새벽6시 반 차를 타고 오신 어른들을 식사라도 대접해서 보내야 하지 않겠나라고 하셔서 밥을 먹었지요. 밥 먹을 때, 저는 이 혼인은 안 할거니까 얌전하게 보일 필요도 없고, 점심 시간에 나왔으니까 빨리 들어가야 되기도 해서 밥을 슥슥 비벼서 빨리 먹고 다시 직장으로 들어갔어요. 가니까 사무실에서 선배들이 밥 다 먹고 왔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렇다고 했더니만 그럼 그 혼인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말도 아니다라고 했는데 시댁에서는 그 규수가 밥도 시원하게 잘먹더라 이렇게 된거죠. 한마디로 작전 실패였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선보고 나서 2주 뒤에 집에 들어와 봐라 해서 가니까 ‘그 사람 소름끼칠 만큼 싫더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아무 상관없는 사람한테 그렇게표현할 필요는 없다 싶어 ‘아버지 남한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있습니까?’ 이랬더니만 그게 허락이라고 하면서 당신들끼리 날까지 잡은거예요 저는 모르고 있었구요.

직장 생활 14년을 했는데 내가 완강하게 거부하니까 시댁에서 직장생활 계속해도 좋다는 절충안이 나온거죠. 그렇게 한 3년 떨어져 살다가 교편 잡고 있던 남편이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와서 다시 공부를 했죠. 역사학 박사를 받고 교수가 됐습니다.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처음 이곳으로 신행을 오셨겠네요. 기억이 나십니까?

대구에서 11월에 신행을 왔는데 춥고 해도 짧고 이럴 때 였어요. 성주에서 출발해서 신행 짐을 싣고 왔는데 길이 너무너무 꼬불꼬불하고 여기 오니까 어둑어둑 했어요. 와서 어둑어둑한데 요샌 폐백이라고 하죠 헌구례를 들었어요. 마당에 사랑 어른들, 절 받을 사람이 너무너무 많은데, 그 절을 하고 이렇게 집을 둘러보다가 아, 나 이제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혼인 말 할 때는 과수원도 크게 있고 농토도 넓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오면 남의 땅 안 밟고도 집에 올 수 있을 만큼 여유롭다고 그랬었는데, 저랑 2살 차이 나는 시누이하고 저녁에 밖에 나가면서 어디가 과수원이냐고 하니까 가르쳐 주더라구요. 저기 과수원인데, 과수 나무가 요만해요 작년에 심었는가봐 이게 과수원이가 이러니까. 그렇다고 웃더라구요. 집안 어른들 모두 이 동네에 계시고 막내 시동생이 초등학생이었어요. 처음에는 전기도 없고 마루문도 없고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 신행은 여러 날이었을텐데 어떤 일이 있었나요? 아무래도 손님들이 많았겠죠?

저희 아버지가 7남매 분이세요. 저희가 6남매고 저희 아버님 7남매고, 저희 할아버님 7남매고. 이렇게 식구가 대대로 너무너무 많아서, 그때는 와서 당일 가거나 하룻밤 자고 가거나 그러지 않아요. 제사나 행사가 있다면,기본으로 며칠씩 묵고 가시는거죠. 우리가 장보기 한 것을 다 먹고도 안 가셔서 참 곤란했었죠. 4월 열하룻날이 저희 시조부 76세 생신이셨는데, 내년에는 못할지 모른다고 제 아랫대부터 윗대 어른들까지 다 오세요. 또 잘해야 되고 하니까 푸짐하게 잘 차려드렸는데 장 본 것을 다 먹고도 안 가시니까 하루는 제가 4월 초에 뒤뜰에 새파랗게 나오는 풀이라도 베서 무쳐낼까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어요.

또 생각나는 게, 우리 시어머님께서 인품도 좋으시고 글도 좋으시고 굉장히 후덕하신데, 일을 별로 안하세요. 한 번은 정월 초이튿날이면, 시부모분들이 처가 세배를 오세요. 시부모가 세분인데 6시 반 막차로 오셨어요. 캄캄하잖아요? 날이 추워서 수동 펌프에 물이 얼까봐 아침에 쓸 물을 퍼놓고 물을 내려야 합니다. 단지 어디라도 물을 찰랑찰랑하게 담아 놓고 손 닦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손님들이 오신 거예요. 저녁은 잡쉈습니까? 이러니까 안 먹어도 돼 하시더라구요. ‘안 먹어도 돼.’ 저는 그 말을 지금도 싫어해요. 안 먹어도 되면 차라리 먹었다고 말씀하시면 서로 마음이 편할텐데 결국 안 잡쉈다는 얘기잖아요.

저희 어머님이 며느리를 봤으니까 나가서 밥해라 하시더라구요. 나가니까 전기도 없는 시절에 솥에 물은 가득해놨지 시집 온 다음 설 엄동설한에 너무너무 황당해가지고 문지방에 앉아 울었어요. 나는 그렇게 한참을 울고 있는데 어른들은 방에 앉아서 오랜만에 만났다고 반가워서 제가 울고 있다는 사실도 몰라요. 언제까지 울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솥에 담겨 있는 그 물을 다 퍼내고 밥을 했는데 가마솥에 밥을 하니 다 눌어 붙어서 다섯 그릇이 안 나오는거 있죠. 얼마나 서럽던지 허허.

 

신혼 시절 에피소드는 끝이 없을 것 같네요.

시집 온 그 다음해부터 제사를 대구로 모시고 갔어요. 저희 할아버님께서 어차피 너희가 지낼 제사니까 너희가 모셔가거라 하셨어요. 그러고는 갑자기 어느 날 종이에 제삿날을 써가지고 오셔서 ‘날짜별로 적었으니까 네가 지네라’ 이러시는데 제가 화낼 수도 없고 그냥 웃었어요. 어안이 벙벙해가지고 웃었더니 그게 할아버님 눈에는 그냥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셨나봐요. 그렇게 어거지로 훌륭한 며느리가 된거죠. 또 작전실패입니다. 네. 제가 실패한 일이 많아요.

 

종가니까 당연히 제사도 많죠?

제사가 13번 있었어요. 5대인데 기제사만 절에서 지내고 사대봉사가 13번이었어요. 제가 요새에도 어디 가서 종가에서 왔다하면 젊은 사람들이 제사가 몇 번이냐고 막 묻거든요. 그런데 저는 제사가 왜 문제가 되냐고 물어봐요 그러면 젊은 사람들이 제사 다가오면 그 달 초하루부터 머리가 아프대요. 그래 왜 머리가 아픈데? 제사는 메뉴가 정해졌어요. 메뉴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 딱 정해진 메뉴에 또 날짜가 정해졌어. 365일 중에 15일만 제사에 할애하면 350일은 제사가 아니잖아? 뭐가 머리아프노? 뭐가 문제고? 그리고 제사 음식을 조상님이 한 젓가락도 안 가져가시잖아? 다 우리가 먹잖아? 그럼 며칠 동안 장 안 봐도 돼. 근데 왜 고민 하냐 하면서 얘기를 합니다. 제사는 정해진 날이니까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안 돌아 오잖아요.

종가에는 제사가 문제가 아니고, 예정에 있던 없던 손님 대접이 문제예요. 접빈을 해야는데 이렇게 차릴까? 소고기국을 하면 밥을 이렇게 할까? 이렇게 고민이 많잖아요. 그런데 제사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요. 메뉴가 정해졌으니까. 근데 제사는 정말 문제가 아니에요. 제사는 장보기 해서 다 해놓고, 온사람을 다 먹여야 해요. 오늘 낮에 먹었던 거, 오늘 저녁에 먹을 수 없으니까. 또 이 조카들, 질부, 종손자, 이런 사람들이 먹을 것도 없고하면, 인상 찌푸리면 다음에 안옵니다. 자기들끼리 통닭 한 마리 사놓고도 좋은데 오겠어요? 근데 그 사람들이 계속해서 여기를 정신적인 지주로 여기게 하려면 잘 먹어야 돼요. 저는 잘 먹이려고 생각을 합니다. 그때도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13번제사에 한 번 지나갔으니까 이제 12번 밖에 안 남았다. 그렇게 또 한 번 지나가고. 또 한 번 지나가고 이렇게 지나가는 걸로...

 

손님 치르는 일에는 이제 전문가 반열에 오르셨겠습니다.

지금은 전기밥솥이 좋잖아요? 예전에 비하면 밥도 많이 안 먹고. 예전엔 밥을 많이 먹었어요. 근데 밥을 많이 푸면 한 솥에 양이 다 떨어져요. 저희 할아범님 돌아가시고 9일 장례를 치렀거든요? 2월 초하루였는데 9일 장례를 치르는 동안 굉장히 추웠어요. 지금같이 편의시설 해놓았던 것도 아니고 마당에 마루에다 상을 놨어요, 행주로 닦아가지고 수저를 놓으면 수저가 미끄러졌어요. 또르르르 얼어가지고. 9일 동안 장례를 치르는데 사돈도 많지만 윗대 사돈도 다 많잖아요? 시삼촌, 친정, 처갓집, 시부모, 그 윗대. 그러니까 온 동네의 사돈을 다 모신 거예요. 사돈은 또 우대하잖아요. 마당에 마루에 모시면 거기에다 밥상을 들고 가야돼요. 밥상을 다 들고 날랐어요. 사돈은 다 외상으로 했어요.

 

지금까지 손님을 제일 많이 몇 명이나 치러보셨어요?

제일 많이 해본 것은 350명을 한 번 쳐봤는데, 그건 행사가 있어서 그랬죠. 원래는 퇴계종가에서 해야되는데, 종부가 안 계시니까 할 곳이 여기 밖에 없다. 그러면 해야죠. 점심을 했는데 수저가 한 350개 쯤 됐어요. 지금은 일회용 다 쓰지만, 그때는 일회용 하나도 안 썼어요. 저희는 지금도 일회용 안 써요. 숟가락이 바케스에 다 담겼어요.

 

종부님은 시집살이 안하셨어요? 시어머님이 후덕하다고는 하셨지만….

어머님은 저한테 잘못했다 소리를 전혀 안 하셨어요. 가끔은 미편하셔도 꾸중을 안 하셨어요. 그런데 60세부터 중풍이 와서 결국 회갑 잔치를 못했어요. 좀 나아서 거동하시다가 또 오고 세 번째까지 그렇게 오셨는데, 그때는 극히 소수만 요양 시설에 갔거든요. 비용도 엄청 많이 들고 해서 2년 6개월 쯤 제가 대변 처리까지 하면서 모셨는데, 시동생들이 우리가 돈 같이 낼 테니까 요양병원에 모시자 이렇게 제안을 했었어요. 그때 제가 고민을 했어요. 암 같은 병도 아니니 언제 끝날지도 모르잖아 하면서 고민하다가 결국 집에 모셨는데, 제 어깨가 다 내려앉고 그러니 시동생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목욕도 시키고, 착한 동서들이 그렇게 같이 모셨죠. 저는 지금 나이 들어서 거동 불편하면 요양원 갈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너 같은 며느리를 봐서 행복했다’ 그러시더라고요 그 한마디에 그간의 고생은 다 사라졌어요.

 

시어머님의 말씀에 울컥합니다. 혹시 종부님도 며느님께 그런 시어머니이신가요?

며느리도 사고가 저처럼 긍정적인 편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지 이래서 안 하겠다 이런 집에는 못살겠다는 얘기는 안해요. 며느리 친구들은 네가 그런 집 어떻게 사냐고 한데요. 그런데 안 하겠다는 생각은 안 하고 종가로 들어오겠다고 그러네요. 들어와서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겠다고 합니다. 사실 지금은 종가를 알아주는 편이잖아요. 그런데 16~7년 전에는 굉장히 어려웠어요. 종손은 장가 못 가는 줄 알았어요. 저희 아들도 그랬거든요. 두세 군데 구체적으로 좋은 혼담이 오가다가도 사돈되실 친정어머니가 반대를 하는 거예요. 좋은 말로는 내 딸이 종부의 재목이 못된다 이러면서 반대를 하니까 안되고 이랬는데, 지금 아들은 소개를 받아서 6개월 간 사귄 후에 결혼을 할까? 집에 말을 했대요. 하니까 그때야 친정아버지가 막 조사를 하시더니만 그 집에 들어가서 힘들어 못 산다며 반대를 했대요. 반대하던 이유도 종가집이라 아들을 낳을때까지 계속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서. 그런데 우리 새 아이가 잠깐 고민을 하다가, 아빠 다가오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 있습니까? 하면서 시집을 왔는데 아들 둘 낳았어요. 숙제는 했죠. 너무 부정적으로 사는 게 힘들지, 긍정적으로 살면은 덜 힘들어요. 저 역시 그런 며느리를 얻어서 복이 있는 편이죠.

 

며느리에게 고마워서 편지를 쓰셨다고요.

제가 참 안타까운 것은 며느리 볼 때도 많은 폐물을 주지는 못했지만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너하고 나하고는 노송정 가문에 동창생이라 할 수 있다. 30년 전후해서 내가 이제 시어머니로써 유세를 떨다가 나 떠나고 나면 네가 이 자리에 와서 똑같이 그런 사고를 가지게 될텐데 즐기면서 하자. 그런 마음으로 사연을 담은 편지를 썼었어요.

그렇게 잘 살아주는 며느리가 너무 고맙고, 또 폐물을 많이 해주는 것보다 내 마음을 전달해야겠다 싶었던 거죠. 지금도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그런 편지를 받아 본 사람은 자기 밖에 없을 것 같다며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어머님께 그런 편지를 받아보진 못했지만 잠깐 그런 생각이 난거죠. 며느리가 아주 소중한데 어떻게 화폐로 그 값어치를 계산할 수는 없고 내 마음을 담고 전해야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 2년 정도 있다가 며느리가 답을 써서 왔어요. 제 편지에 대한 답이라기보다는 이 집에 입문해 저한테 배운 것이라든지. 여하튼 동창생한테 잘 배우고 있다고 하면서 노송정 가문 동창생 선배의 가르침을 스펀지에 물을 먹듯이 잘 습득해서 배우고 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써 놓았더라구요.

 

종부로서의 삶이 50년 다 돼 갑니다. 그 많은 사연이 여고시절에 쓰고 싶었던 열망을 담아 내방가사로 옮겨간 건가요?

이거는 이제 제 이야기이고 친정어머니하고 살아온 그런 이야기니까 구전으로 전하기보다 뭔가 글로 남겨봤으면 싶어서 편지글로 썼었어요. 처음에는 수필같이 그렇게 썼었는데, 그걸 어디서 누가 보고 가사체로 한 번 옮겨보라고 해서 쓴거죠. 지금은 제가 바쁘잖아요? 제가 갈 데도 많고 오라는 곳도 많고 일도 많고 한데 점점 노쇠해지면 방 안에 앉아 있을 시간이 많게 될거잖아요? 그럴 때 뭔가 할 일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가사를 쓰거나 읽거나 이런 취미라도 하나 만들어야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노후 준비하라 하잖아요.

노후 준비를 해놓아야지 양로원에 가서도 너무 무료하지 않지 않겠나. 그리고 지금 저희가 하는 일이 손과 육체적인 일이 많고 머리 쓰는 일은 많지 않아요. 머리로 계속 움직이면서 노후에 제가 거동이 잘 안 되고 할 때에 방 안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있어야 되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직접 쓰신 내방가사 <종부소회가>에는 정말 종부로 살아왔던 내용이 들어가 있는 거잖아요? 그중에서 제일 애틋하게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다면요?

종부소회가에서는 저희 친정어머니에 대한 회상이 많고 제가 처음에 이 집에 와서 그다음 해부터 제사 지내고 직장 생활하고 시조모님까지 모시면서 대구 좁은 집에 열 세 식구가 살았던 적도 있었어요. 그런 이야기를 다 담아 놓은 거죠. 대구에서 열 세 식구 살면서 직장을 다녔는데 아침은 거의 전쟁이었어요. 그때는 세탁기도 없어서 퇴근하고 저녁에 와서 손빨래 다 하고 아침에 밥하고 시동생들 도시락도 싸고 그러고 살았죠.

그렇게 살다가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가 됐어요. 초등학교 입학 때 따라가니까 A4 반절 되는 종이를 선생이 나눠주면서 읽을 수 있는 사람 손들어라 하는데, 그때 한 50명 중에 우리 아이까지 합해서 서 너 명이 손을 못들어요. 한글을 몰라서요. 너무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적은 봉급에 우리 부부 먹고 살아야죠, 아들 둘 장가보내야지, 적금 들어서 시누이 시집보내야지 그러고 나면 시동생 보내야지 그렇게 쪼들리면서 살았는데 아이까지 초등학생이 되도록 한글을 못 읽었던 거예요. 이러다가 내 아이 바보 만들겠다 싶어서 그 길로 직장을 그만 뒀어요. 15년이면 장기근속 수상을 하는데 그걸 못 채우고 14년만에 그만뒀어요. 그 아이가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에서 ‘푸른 하늘’이라는 낱말을 못 써서 2학년 때까지 씨름을 했어요. 그러던 아이가 5학년 6학년 때 부회장, 회장을 해오더라구요. 그래서 혼자 벌어도 이렇게 사는 즐거움도 있다 위로하면서 살았는데, 중학교를 가니까 영어공부가 또 안되더라고요. 한 번은 아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됐을 때 새벽 두시쯤 되었을겁니다. 자다 깨서 나와보니까 아이 방에 불이 켜져 있어서 불 끄러 들어가니까 공부를 하고 있더라고. 놀랐죠 그렇게 시작해서 공부를 하더니만 나중에는 과기대를 가고 스물아홉에 박사를 끝냈어요. 그걸로 나는 우리 아이가 할 효도는 다했다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가사 중에 햅쌀 나기 전에 제사가 돌아오면 하는 내용도 있던데요?

저희 친정에는 들이 많고 해도, 여기는 안 그래요. 햅쌀이 나기 전에 제사가 오고 하잖아요. 그러면 일꾼한테 한 단이라도 베어 온나 해서 밤에 수수깡가지고 다 훑었어요. 요즘같이 정미소가 없잖아요? 그걸 빻아가지고 다시 쪄야 찹쌀밥이 돼요. 그걸로 인절미 해서 놓고, 술도 제사가 다가오면 새로 담가요. 새 단지 해서 청주 떠서 제사 지내고. 이렇게 하시더라고. 그런 거를 엄마는 왜 힘들게 하냐고 딸들은 불평을 했는데, 제가 살아보니까 저희 집에도 좁쌀 술이 있거든요. 그래서 새로 술을 담가요 왠지 먹던 거를 제사에 쓰는 거는 불경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쓰신 내용 기억나십니까?

그럼요 기억 나죠. 한 번 읊어 볼까요? 햅쌀이 나기 전에 제사가 다가오면, 일꾼들의 닭에서 찹쌀 한단 베어오라 하여 수수깡 반으로 접어 호롱불 켜놓고, 호롱불 심지 켜도 수수깡 반을 접어 찹쌀 덮어 오두방 쪄서 디딜방 찌어서 찹쌀 인절미를 만들어 제사상에 올렸다. 뭐 이정도입니다 하하.

 

최근에 노송정 종가에 경사가 있었다면서요?

2018년 11월에 저희 집이 지방문화재가 되고 33년 만에 국가문화재가 됐어요. 지금 국가문화재가 되어도 혜택이 피부로 다가오지는 않은데 저희는 굉장히 감회가 깊어요. 이 집에 대한 자긍심이나 후손들이 생각할 때 그래도 우리 집은 국가문화재라는 자부심이 있죠. 저희가 2년 전부터 집안 8촌 모임을 하는데, 처음에 모임을 계획할 때는 제가 힘들까봐 안동 식당에 모여서 하자는 계획을 세웠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다들 서울, 부산 이렇게 멀리 사는데 1년에 한 번 그냥 얼굴 보는 것도 좋지만, 식당에서 밥 먹고 서울 부산 가는 거는 그렇잖아. 그래서 집으로 와라 이 집 마당이 크잖아요? 모두 다 와서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다 불렀어요. 8촌 친척들이 모이니 1백 명이 넘더라구요. 그 모임을 해마다 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더 많이 와요.

 

그래서 그 일로 가사를 쓰신 건가요?

우리 집이 국가문화재가 되고 난 다음에 거기에는 우리 후손들의 기쁨을 표현했죠. 아이들이나 친척들이 도시에 나가서 살아도 자기 큰 집에 대한 애향심들이 굉장하더라고요. 제가 여기 이 집에 와서 70을 넘고 이렇게 살아오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요? 주위에 이웃들이 도와주고, 멀리 나가있는 집안 분들도 도와주고 이 기쁨을 다같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성인이 태어나신 집에 33년이 흘러서 이런 영광스러운 게 있으니까 제가 생각할 때 가슴이 뭉클한 거예요. 이 집의 가치가 그만큼 되니까 그런거겠지만 ‘저의 노력도 한 몫을 했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가슴 뭉클했어요.

 

제사도 13번이나 지내고, 그렇게 모이면 1백 명이 넘고 계속 일이 쌓이는거네요 그럼?

왜 쌓여요 지나가는데? 도시에 사는 엄마들이 매달 모임을 하잖아요? 그렇게 모임을 가다보면 한 달에만 해도 열 번은 될거예요. 그것과 뭐가 다릅니까? 젊었을 때 일이 생각나네요. 제가 친정아버지한테 ‘아버지 나 힘들어, 일하다 죽을 것 같아’ 이런 말을 한 적 있어요. 그러니까 친정아버지가 ‘일하다 죽는 일은 없니라’ 하시면서 ‘네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일이 주어지는 것이지, 할 수 없이 더 과하게는 오지는 않는다.’라고 하셨어요. 다 지나고 보니까 결국은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지내는 거예요. 할 수 없으면 안 해요. 내일이라도 병이 덜컥 나면 못 하잖아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거예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게 저도 편하고 상대방도 편하고, 누가 상을 준다고 해도 제가 할 수 없으면 못하는거죠 뭐.

 

종부 모임도 하시죠? 모이면 다들 걱정하시지 않나요? 이런 전통이 과연 이어져 나갈지?

맞습니다 영남의 종부들이 모여서 늘 걱정을 해요. 우리는 이게 운명이다 하면서 하는데 언제까지 이어지겠나 하면서 염려스러워들 하죠. 그런데 저는 옛날에 공자님 하신 말씀이 세상이 말세다 말세다 했어도 말세가 안됐거든요? 끊어지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이어질 거예요. 조금 변화가 있더라도 절대로 말세가 안 와요. 지금 제사상이 조금 변해서, 고춧가루만 안 쓰면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그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 쓸 수 있잖아요? 그렇듯이 조금씩 조금씩 변화해도 이어질 거예요. 이 집을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누구라도. 그죠?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 50년 노송정 종부로서의 삶을 되돌아보신다면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근데 제가 이 집 종부가 안 되었더라면 뭐를 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가끔 하거든요? 근데 생각해보면 별로 해놓은 일이 더 없을 것 같아요. 종부가 안 되었더라면 평범한 집에 며느리로 가서 아내로 엄마로 살았으면 좀 더 편했겠지만, 더 편하다고 안 아픈 것도 아니고, 일을 한다고 해서 뼈가 빠지는 것도 아니고, 지내고 보면 괜찮은 직장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아직도 뭔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네, 앞으로 10년을 보면 손자들이 여기 내려오는 걸 좋아해서 지들끼리 고속버스를 타고 오기도 해요. 그런 것을 보면 아이들 마음에 잘 새겨지는 방향으로 교육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사실 종부로 와서 집안일을 천 원어치 하면, 만 원어치 대우가 왔거든요? 제가 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대우가 와요. 그거에 비하면 뭐를 해도 제가 노력을 더해야 하죠. 제가 나가서 잘 다니는데 다닐 수 있을 때까지는 누구한테라도 이런 걸 계속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고 만약 못 다니게 되면 앉아서 글로라도 남겼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못 다한 말이 있으시면 더 해주시겠어요?

저희 종부들 모임에서 이 전통이 계속 이어질지 모두가 전전긍긍하거든요. 지금 힘들어 죽겠다 생각하는 사람은 잘 없어요. 지금 주어진 일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저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고 그랬어요. 직장으로 본다면 퇴직도 없고 중년도 없고 언제까지나 이 집에서 쫓겨날 일도 없고 또 집을 비울 수도 없잖아요? 사는 데 왜 안 이어지겠어요? 종손은 타고나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위치잖아요? 그런데 종부는 자의든 타의든 선택해서 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잖아요? 그걸 부정한다면 본인도 힘들고 주위도 힘들어요. 그러지 않으려면 긍정하는 수밖에 없어요. 받아들이는 수밖에. 받아들여서 손해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내내 얼굴 가득하게 풍기고 있는 온화한 미소가 대하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고 있었다. 그런 미소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임하는 종부의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생각되었다. 남들은 숱하게 걱정하는 종가집의 열 번이 넘는 제사나, 시도 때도 없는 접빈을 오히려 전통을 이어가는 좋은 방법으로 여기는 종부의 마음 씀씀이 600년 가까운 역사동안 종가를 단 한 번도 비우지 않고 ‘사람이 사는 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했다. 엄청나게 어려운 시어머니, 그것도 종부의 따스한 손길에서 노송정 가문의 동창이라 여기며 잘 가꿔 나가자는 편지글이 종가를 일궈가는 힘이 아닌가 생각했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10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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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6-03 14:26:27
@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http://blog.daum.net/macmaca/2967

윤진한 2021-06-03 14:25:57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 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왜곡.
http://blog.daum.net/macmaca/3131

윤진한 2021-06-03 14:25:11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제사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 @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