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 ⑪- ‘길 위의 작가’ 김주영
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 ⑪- ‘길 위의 작가’ 김주영
  • 강병규(안동 MBC PD)
  • 승인 2021.10.2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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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자가' 김주영

선생님과의 인연은 10년이 훌쩍 넘었다. 회사에서는 지역 출신으로 나름의 일가를 이룬 분들을 인터뷰 하는 토크 프로그램을 원하고 있었고, 나는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청송 출신 소설가 김주영을 떠올렸다. 유려한 말솜씨의 전문 진행자는 아니었지만 수십 년 길 위를 섭렵한 소설가로 사람을 만나온 세월이, 인터뷰를 하는 토크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손색이 없겠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제작국장도 흔쾌히 승낙을 해준 덕에 1년이 넘는 시간을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있었다. 2004년 그렇게 탄생한 프로그램은 <김주영의 사람과 사람>이었다. 60대 후반으로 가고 있던 선생님은 180cm가 넘는 키에, 두주불사형의 호탕한 분이셨다. 2주에 한 번씩 서울로 가서 두 분의 인터뷰이를 만나는 녹화가 끝나면 진행자와 연출자 그리고 작가 이 세 사람의 발길은 늘 장충동이었다. 선생님이 즐겨 찾던 정갈한 밥집이나 맛난 고깃집 아니면 그 유명한 족발집에서, 세 사람은 선생님의 그날 출연료의 절반을 넘게 탕진하고 말았다. 그 이후 한동안 만나 뵙지 못했던 선생님이 고향인 진보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꼭 한번 인터뷰를 해야겠다 마음먹은 터였다. 그리고는 제작하고 있던 프로그램 <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 핑계로 두어 시간 <사람과 사람> 뒤풀이 자리에서 들었던 여러 이야기들을 청했다. 그날 역시 진보시장 골목 안 선생님의 단골식당에서 막걸리 한 말은 족히 비워 냈을 만 한 뒤풀이가 이어졌다. 지금 이 글을 정리하면서 찾은 기사에서 지난봄 오랜만에 신작 장편소설 『광덕산 딱새 죽이기』(문학동네)를 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님은 기어이 글을 쓰고 계신다. 참 고맙다. 이 인터뷰는 벌써 오래전 2018년 가을 청송 진보에 있는 객주문학관에서 이루어졌음을 알려드린다.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선생님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소설 쓰는 김주영이고요. 올해(2018년) 지나면 만 80이 됩니다. 이제 노후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지내는 나이가 아니냐, 그리고 지금은 혼자 살고 있고 대략 그런 형편입니다. 그런데요, 요새 신문이나 하여튼 이웃에서의 이야기들도 들어보면 보통 100세를 넘긴다고 그래요. 특히 할머니들이, 그걸 보면 나도 혹시 90까지는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욕심을 내 보는데, 그건 너무 과한 욕심이다 싶기는 해요. 뭐라고 할까요, 어릴 때를 비롯해서 청년시절까지 고생을 좀 했기 때문에, 몸을 막 내두른 거죠. 그러다보니 100세까지는 못살 것 같고, 한 90 가깝게 살면 아주 많이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운명을 누가 알겠습니까? 아마 더 장수하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길 위의 작가이신 선생님,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지금은 그 나이치고는 괜찮은데요. 매년 한 번씩 정기검진을 해보거든요. 근데, 별 이상은 없지만, 왼쪽 무릎에 관절염이 왔어요. 그래서 걸음을 옛날처럼 활발하게 내딛지 못하고 천천히 걷는 걸로 만족하고, 그냥 다리가 좀 덜 아프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무릎을 다친 것도 의학상식 같은 게 너무 없어서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옛날 50대 때, 태백산 능선을 8시간 안에 완주하는 프로그램에 제가 참여를 했었어요. 괜찮았는데 내려올 때 왼쪽 무릎에서 뼈가 마주치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그때 병원 가서 조치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한 30년 이상 방치를 해놔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상당히 좋은 상태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걷는 것으로 만족하고 하루에 한 시간 정도 걷습니다. 비오는 날은 자전거 타고, 비 안 오는 날은 걷고 이런 정도로 대충 건강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죠.

이곳 진보가 참 좋으시죠?

여기 청송 진보로 내려온 지 한 3년쯤 됩니다. 그동안 서울살이에 아주 잊어버렸던 것을, 이 동네 산책하면서 혹은 요새 젊은 사람들은 멍 때린다고 얘기 합디다만, 멍하니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옛날에 겪었고, 그동안 도회지 생활에서 잊어버렸던, 또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던 것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예를 들면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붉은 노을을 볼 수 있어요. 그냥 해 질 무렵 바깥에 나가면 저 산 능선에 붉게 물들어지는 저녁노을, 그걸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바라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걸 반딧불이라고 하는데, 옛날 어릴 때는 개똥벌레라고 그랬거든요. 사실 반딧불이가 낮에는 개똥이나 소똥처럼 습한 곳에서 지냅니다. 그러다 밤에 나와 활동하기 때문에 그게 반딧불이가 됐는데, 우리 어릴 때는 개똥벌레라고 그랬죠. 그런데 그런 똥이라는 이름을 가진 벌레가 관광상품화 됐습니다. 영양군에는 반딧불이 축제가 있거든요? 세월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또 개구리 우는 소리, 또 간혹 오솔길을 지나다니는 뱀 같은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어요. 또 있습니다 여기 청송은 사과가 엄청 유명하죠. 사과밭을 이렇게 지나갈 수 있다는 즐거움, 이런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에게 청송은 어떤 곳일까요?

청송은 제가 어릴 때 태어나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잠깐 벗어나 있다가 그 다음에 다시 또 여기서 중학교를 조금 다녔던 곳입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여기 있었습니다. 제 고향이죠 청송은. 내가 태어난 집도 복원되어서 저 장터 가에 있는데,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생각하기도 싫지만 어린 시절에 겪었던 가난, 또 외로움이나 혹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벌어졌던 갈등 같은 이런 것들이 나를 만들어준 기원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 내 소설의 어떤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청송은 내 영혼을 만들어 준 그런 장소입니다. 고향이라는 말 이상으로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쳐준 곳이 청송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동안 도회지 생활을 하시면서 청송을 조금은 벗어나 계셨잖아요. 약간의 그리움은 있으셨겠어요?

아닙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른데요. 청송을 벗어났을 당시에는 굉장히 속 시원했어요. 왜냐하면 청송에서 보냈던 내 어린 시절은, 그 당시로서는 생각하기도 싫었던 그런 시련이나 고통이나 혹은 갈등, 괄시, 소외받은 거, 외로움 같은 것들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는 게 속 시원했죠. 그런데 객지에 나가서 고향에서 겪었던 그런 고통이나 고생보다 더 큰 고생을 겪어 봤어요. 청송을 벗어나서 그런 것이 기다리고 있을 줄 정말 몰랐죠. 객지에 나가서는 어머니의 영향권 밖에 있었으니까 별별 일을 다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정도의 나이였는데 심지어 노숙도 해봤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있을 때는 하루에 두 끼 정도 겨우 먹고 살았는데, 벗어나서는 하루에 한 끼 먹는 날도 있었고, 굶을 때도 다반사였습니다. 어떤 사람의 관심도 받을 수 없었던 그런 생활을 했고, 그래서 떠날 당시에는 그냥 속 시원했는데 더 많은 고통을 겪고 고생을 했었죠.

그런 고통 속에서도 확고한 자기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지 않았나 싶거든요?

이런 한 가지 예를 들 수 있는데요. 인도에 갠지스 강이 있지 않습니까? 갠지스 강에 위에서 쭉 내려오다가 인도 북부에 있는 바라나시에 도달하면, 그 갠지스 강물이 굉장히 오염이 심합니다. 그 바라나시에는 시체를 태워서 거기에다 버립니다. 그것도 반쯤 타다 남은 시체도 버리고 해서 그걸 어떻게 표현하면 강물이 아니고 걸쭉한 콩죽 같은 그런 흐름을 갖고 있거든요.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죠. 그런데 거기에 인도 전역에서 모여든 사람이 목욕을 합니다. 그 물에 몸을 씻음으로 해서 지은 죄가 씻겨나간다는 생각이 있거든요. 심지어 그걸 먹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물을 먹고 난 사람들이, 몸을 씻은 사람들이 피부병에 걸렸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봤어요. 그건 뭐냐 하면 바라나시를 지나는 갠지스 강물에 대한 어떤 종교적인 신념이 있기 때문에 피부병에 걸리는 사람이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신념이 병균을 이긴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여기를 벗어나서 외지에서 겪었던 고통이나 고생들이 알고 보면 나를 키워 준, 지금의 나를 구성해 준, 소설가 김주영을 만들고 구성해준 하나의 자양분이었다는 생각을 아주 늦게 하게 되었어요. 진작 하게 된 게 아니고요. 저는 그래서 늘 늦습니다. 제가 좀 둔합니다. 둔한 게 오히려 좋을 때도 있어요. 너무 예민하면 우울증에 걸린다든지 정신적으로 상당히 위태로운 상태까지 갈 수 있는데 나는 둔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것이 늦게 오고, 또 늦게 깨닫고 합니다. 그게 오히려 내 건강에 좋았지 않느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갠지스 강물에 목욕을 해도 피부병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아, 멋진 표현이셨어요. 어쩌면 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겠지만, 한번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셨던 삶이었다고요?

네, 그것도 나중에 생각하면 나한테는 하나의 자양분이었는데, 아버님이 계셨어요. 계셨는데 중학교 입학하기까지 아버님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아버님을 만나보질 못했어요. 어렴풋이 있었다는 걸 알았지만 못 만나봤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비로소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혹은 동생, 누나, 이런 단어에 대한 친근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아버지’에서 그걸 못 느꼈어요. 오직 두려웠죠. 왜냐하면 여기 고향에서 어머니하고 같이 살적에, 내가 굉장히 칭얼댄다든지 어머니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요구를 자꾸 한다든지 할 때 어머니는 어떻게 말씀하셨냐면 ‘너 그럼 아버지한테 보내버린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한테 보내버린다, 얼굴도 모르는? 나하고 한 번도 피부로 접촉이 없었던, 그런 사람에게 보내버린다는 어떤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단어, 아버지라는 단어 자체가 두려움이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만나게 됐는데, 역시 아버지라고 다가가서 손을 잡는다든지 얼굴을 기대면서 비빈다든지 하는 그런 것은 한 번도 못 해봤습니다. 두려운 존재인데 말하자면 개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에요. 어떻게 거기에 대고 볼을 부비고, 손을 잡고 할 수 있겠어요. 두려운 존재인데.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상당한 기간 동안 같이 좀 지냈지만 결국은 물과 기름으로 남았고 지금까지도 한 번도 어떤 애틋한 그런 감이 없었죠.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를 떠나온 이후부터 난 혼자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살고 혼자 결정하고. 심지어 학교 가는 거, 대학을 선택하는 거, 군대에 가는 거, 혹은 내가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거, 전부다 나 혼자 결정했습니다. 누구도 나한테 조언을 주지 못했어요. 어머니도 내 진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을 줄 수 없었어요. 어머니가 사실 내가 참 존경하고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이지만,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어요. 그런 양반이 나한테 어떤 조언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것을 나 혼자 결정했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러고 보니까 어떤 결과가 생겼냐면, 아무리 큰 시련이 앞에 닥쳐도 두렵지 않게 되더라구요. 알고 보면 그 모든 것이 교훈이었고, 그 모든 것이 나를 키워준 하나의 큰 바위 같은 그런 큰 덩어리였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살아나갈 수 있는 신념을 준 그런 대상이었다는 말입니다. 글 모르는 어머니, 또 나에게 두려움을 준 아버지, 그리고 항상 내게 어떤 그런 혜택보다는 가해를 가하는 어떤 내 주위의 환경들, 이런 것들이 오히려 나한테 나를 키워 준 자양분으로써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참 이런 식으로 고생하면서 살아도 되겠나’하며 자살도 생각해보고, 절벽 같은 데 선 게 한두 번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그때마다 하고 나면 나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주고 계기를 만들어 준 환경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나눠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아들이 아니었나 싶은데?

내가 모르는 어머니의 과거가 있어요. 그걸 내가 살아 계셨을 때 물어보고 싶었어요.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만났는지, 혹은 만나기 전에 어떤 일이 어머니한테 일어났는지, 그런데 내가 그것을 못 물어봤습니다. 대강 짐작은 하죠. 어머니가 태어난 그 시절이 일제강점기였는데 엄청나게 가난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할 만큼 가난을 겪었던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만났을 때까지, 이걸 내가 못 물어봤습니다. 왜냐면 어머니께 상처를줄까 싶어서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정식 결혼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나의 탄생이 아주 불행한 그런 태어남인데,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나 하나를 위해서 무척 고생을 하셨어요. 일화가 있습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집에 아무도 없습니다. 근데 배가 고프죠. 그러니까 찬장이나 솥을 뒤져보면 먹을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물을 먹습니다. 그러면 한 30분 동안 배가 불러요. 나중에는 배가 고프죠. 해가 지고 나도 어머니가 나타나질 않아요. 집 툇마루에서 해질 때까지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너무 지쳐서 잠이 들어요. 잠이 들었다 깨 보면 부엌에서 삭정이 부러뜨리는 소리가 나요. 어머니가 어디 가서 한 됫박 되는 양식을 구해 와서 밥을 짓는 겁니다. 그래서 밥을 퍼주죠, 먹으라고. 어머니는 안 먹어요. 가만 보면, ‘난 먹었다' 하면서 남은 건 내일 아침에 나를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하루 종일 굶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그게 무척 가슴 아팠는데, 나중에 지나고 나니까 아, 어머니가 그랬구나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주영 선생님의 소설은 우리들 가슴에, 아니면 훗날에도 계속해서 읽혀지면서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를 바라는데요. 사실, 이런 얘기해서 좀 쑥스럽기는 합니다만. 요즘 책 안 읽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외지에 나갔다가 다시 여기서 중학교 한 1년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내가 책 한 권을 사기 위해서 어머니를 한 달 동안 졸랐어요. 그렇게 졸라서 책 한 권 값을 받아가지고 안동까지 걸어갑니다. 가서 책 한 권을 사가지고 걸어오면서, 그 책을 세 번 읽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도착을 해요. 그런 경험이 있는데, 그때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때 대게 책을 산 가난한 학생들이 전부 다 그랬습니다. 지금은 널린 게 책입니다. 근데, 요새 독서 경향이 어떠냐면,책이 부피가 좀 있다든지, 혹은 내용이 어렵다든지 하면 안 읽습니다. 이제 『객주』라는 소설책이 잘 안 팔립니다. 왜냐하면 안에 나오는 단어들이 너무 어려워요. 옛날 말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이를테면, ‘몽니를 부린다’든지 ‘히야, 쉬한다’든지 이런 말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사실 우리말이거든요. 사전에 다 있어요. 근데, 이 『객주』라는 소설을 읽으려면 사전을 옆에 갖다 놓고 읽어야 됩니다. 어떤 출판사에서 ‘김주영 씨 그러지 말고, 객주에 나오는 옛날 말들을 쉬운 말로 고쳐서 책을 다시 내자, 그 작업을 하는 동안 내가 돈은 다 댈게’ 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마다를 했습니다. 나 안 하겠다고. 그러려면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내가 왜 이 어려운 말 찾아서 했겠냐? 또 책 팔아먹으려고 어렵게 한 옛날 말들을 다시 뒤집어 쉬운 말로 고친다는 것은 내가 양심상 그럴 수가 없다. 그러고 말았는데, 『객주』를 읽은 사람 열에 아홉은 너무 어렵다 이거예요. 옛날 말이 많이 나와 가지고. 그런데 뭐 그런대로 아직까지도 적지만 팔리긴 합니다, 주로 이제 구매력이 적은 장년 노인층에서 많이 사가죠. 젊은 여성들이 많이 보는 책이라야 많이 나가는데, 이거는 나이 드신 분들이 사는 책이라서 잘 안 나가요 허허.

언제부터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때 안동까지 와서 샀던 책 기억나십니까?

아, 잡지에요. ‘소년’이라는 잡지입니다. 그 잡지는 엄청 인기가 있었어요. 먼저 말씀 드리면 늘 혼자 모든 결정을 했어야 됐거든요. 중학교 다닐 때 ‘난 커서 나중에 뭘 할까?’ 그런 거 생각할 나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내가 생각하기를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게 뭐지?’ 했었는데 제일 자신있는 과목이 국어였어요. 국어로 뭘 할 수 있을까 하다가 글쓰기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 그게 소설가가 된 시작이었죠.

글쓰기가 어렵지는 않으시던가요? 처음에 시로 시작하셨다고 들었어요.

동시를 썼죠. 그걸 이제 선생님한테 보여줬습니다. 선생님이 너 동시 잘 쓴다 이거에요. 그때는, 그 어린 시절은 선생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선생님은 무심코 한 말인지 모르지만, 너 정말 동시 참 잘 쓴다 이 말 한 마디가 듣는 그 학생의 키를 키워준 거예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에 입학을 했는데. 그때까지도 시인이 되고자 했죠. 여름방학이 되기 전에 시를 11편을 써가지고, 그때 우리를 가르쳤던 박목월 선생님한테 보냈어요. 하늘과 같은 박목월 선생님께, 제가 시 쓴 겁니다 하면서 한 번 봐주십시오 했더니 고맙게 받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드리고 난 다음에 열흘이 지나도 아무 말씀이 없으신 거예요. 그래서 다시 찾아갔습니다. 선생님께 시를 보내 드렸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러니까 하시는 말씀이, 자네 운문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시는 거예요. 거기서 내가 눈앞이 하얘지는 거예요.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나고 알겠습니다 하고 얼굴이 정말 하얗게 되서 나가가지고 생각했죠. 아, 내가 멋모르고 덤벼들었구나하면서 하늘같은 분이 하시는 말씀이니까 그대로 수용을 한 겁니다. 이래서 내가 어쩐지 압니까? 학교를 그만둬버렸습니다. 군대에 입대를 했어요. 군에서 계속 고민을 했습니다. 시인 될 자격이 없다는데 어떡할까 하다가, 꿩 대신 닭이라는 말 있지 않습니까? 닭을 잡자, 그래서 수필을, 산문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그게 지금 내가 소설가가 된 동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두 번의 어떤 잘 할 수 있는 것을, 한 번은 중학교 다닐 적에 너 참 글 잘 쓴다, 동시, 그 칭찬 한 번 듣고 거기에 매달려서 시를 쓰기 시작한 거고. 그 다음에 박목월 선생한테 운문에 소질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는 고민하다 소설로 진로를 바꾼 거죠. 내가 글 쓰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방향을 바꾼 거죠.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내가 살아오면서 사고무친합니다. 저요? 친척이라고 없어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껴주시던 외삼촌 한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를 아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의외의 사람이 지금 나를 돕고 있어요. 지금 문학관 저 밖에 있는 조형물 있지 않습니까. 저거 1억 짜리입니다. 저걸 기업인 몇 분들이 돈을 내서 이 문학관에 기증해 줬어요.
 친척도 아니고 우연히 만난 분들인데 나를 좋게 봤어요. 왜 사람들이 나를 좋게 보고, 나를 도와주려고 애를 쓸까.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내가 지금까지 지켜온, 뭐 아무것도 아닌데, 지켜온 몇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존심은 지키되 겸손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켜라. 또 나머지 하나는 울고 싶어도 항상 웃어라. 이것이 저의 좌우명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거 참 어렵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제가 술 먹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비오는 날 차를 못 타고 트럭을 빌려 타고 현장까지 간 적도 있어요. 무슨 계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늘 만나던 친구 간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지나가던 트럭을 세워가지고 현장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냉큼 실어주더라고요. 돈 많이 준다고 하니까. 약속 지킨다, 겸손해라, 울고 싶을 때 웃어라. 저는 그게 좌우명입니다.

『객주』라는 소설은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뗄 수 없는 분신 같은 소설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객주』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아, 이 얘기를 하자면 길어요. 난 그 책을 보지는 못했는데 제목만 기억납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 시절 때 배웠다’라는 그런 책이 아마 있었죠. 딱 그런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하고 저는 시장가에서 살았습니다. 장날이되면 장꾼들이 우리 집 마당에 와서 난전을 펴는 겁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이니까 양해도 안구하고 와서 전 펴놓고 장사하고는 갔었지요. 그 정도로 시장과 가깝게 살았는데, 그때는 초가집뿐이고 이런데, 장날이 되면 낯선 사람들이 와가지고 온갖 짓을 다 한다 이거예요. 욕도 하고, 막걸리도 먹고. 그런 것들이 어린 시절에 나한테 굉장히 신선하게 보였어요. 늘 똑같은 사람들 얼굴을 보다가 장날이 되면 낯선 사람들이 와가지고 사투리도 다르고 모양새도 다르고 옷매무새도 다른 사람들이 와서 북적거리고 장사하면서 싸우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뭐 이런단 말이죠. 말하자면 하나의 축제가 이루어지는거죠. 나한테는 축제처럼 보였던 그 장날 구경을 위해서 그날은 학교에 안 갔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챙기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장날이 되면 장 구경하고 다니면서 이런 농기구 같은데 붙여놓은 상표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걸 주어서 수집하는 거예요. 그날은 학교 안 가고 그 이튿날 학교 가죠. 그럼 선생님이 너 왜 학교 안 왔어? 이럽니다. 핑계가 뭐 배가 아파서 못 왔습니다. 아 그래? 때리지도 않고 벌도 안서고 그냥 들어가라는 겁니다. 다음 장날에도 그랬는데 그 다음에는 진짜 장날만 되면 실제로 배가 아픈거예요. 그 다음에 결석을 하면 선생님이 또 묻습니다. 너 왜 또 학교 안 왔어? 배가 아파서 못 왔습니다. 실제로 배가 아파서 못 왔는데 지난번에는 거짓말 하고 이번에는 실제로 참말 했는데 때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벌을 줍니다. 그만큼 내가 장날 보여주는 그 축제의 모습에 반했던 거예요. 내가 그걸 보고 나중에 작가가 된 다음에 어릴 때 봤던 그 장날의 광경, 이걸 소설로 한 번 써보자, 이렇게 된 거예요. 데뷔하고 난 다음에 보니 이야기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무턱대고 자료를 찾기 시작한 거예요. 난 단편 소설을 하나 써도 반드시 현장에 가보거든요. 내 소설에 「쇠둘레를 찾아서」 라는 70매 짜리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쇠둘레, 철원이에요. 철원을 우리말로 쓰면 쇠둘레입니다. 그 단편 소설 하나 쓰기 위해서 철원을 세 번 가봤어요. 그 정도는 현장답사 하거든요. 그런데 자료를 찾기 시작하니까 옛날 우리나라에 보부청이 있었던 거예요. 그걸 내가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이럴 게 아니다, 장편으로 써야 된다. 이래가지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거예요. 먹고 살아야 되니까 신문 연재를 시작합니다. 서울신문에서 대강 줄기 써 놓은 것을 보고는 해보자고 하더라구요. 5년 정도 했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렇게 『객주』는 시작된 겁니다. 그 소설 시작하고 끝맺을 동안 거의 집에 안 들어갔습니다. 거의 저 시골 여인숙에서 다 썼어요. 조선시대 이야기지만 현장, 산천은 안 변했거든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나 현재나 산이 무너지거나 그러지 않지 않습니까? 고목이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거지요. 냇물이 그때도 가고 지금도 흘러가는거죠. 그걸 보러, 장날을 보는거죠. 장이 서는 곳, 전국 장터 돌아다니면서 취재해가지고 여인숙에 가서는 엎드려 글을 써가지고 서울신문 지국에다가 원고를 갖다 주면 지국에서 그걸 받아서 본사로 옮겨줬습니다. 그 짓을 5년 동안 한 겁니다. 혼자 술 먹고, 혼자 울고.

『객주』의 주인공 ‘천봉삼’이라는 인물은 어떤 존재인가요?

『객주』의 천봉삼이는 가공인물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 수 있어요. 류주현 선생의 『대원군』이라는 소설에 보면 대원군이 양광시절에 한문으로 ‘양광’이라고 하는데. 뜻이 뭐냐면 거짓 미친 척 한다 이거죠. 그럴 적에 길거리에 주색잡기를 하고 다니면서 가난하니까 술값은 없는데, 기생치마에 난초 쳐주고 그걸 술값으로 대신하고 그런 대목이 나와요. 그런데 그렇게 떠도는 사람의 심중을 아는 사람, 저 사람의 가슴 속에 뭐가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기생 하나가 있었어요. 그 사람 이름이 초선이에요. 그 소설을 읽어보면 초선이라는 인물이 없으면 하나도 재미없는 소설이에요. 초선이라는 인물은 기록에는 없는, 작가가 만들어 낸 가공인물입니다. 그런데, 류주현 선생이 초선이라는 기생을 하나 만들어서 그 소설에 중심을 잡아가는 겁니다. 대원군이라는 미친 척 하는 사람의 가슴 속에 뭐가 들어 있다는 것을 초선이라는 기생 하나는 딱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 얼마나 중요한 인물입니까? 『객주』의 천봉삼이도 제가 만들어 낸 인물이에요. 정의로운 사람, 배신하지 않고 신의를 지키는 사람, 장사꾼이지만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나는 천봉삼이라는 인물을 하나 만들어 낸 거예요.

선생님은 『객주』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셨지만 사실 그게 굉장히 어려운 일 아닙니까?

세상 모든 일, 뭐 건축이든 노동이든 경영이든 모든 일들은 많은 실적이 쌓이면 나중에 쉬워지죠. 말하기 그렇습니다만, 시각장애인도 한 길을 계속 다니다보면 나중엔 더듬거리지 않더라도 비교적 익숙하게 갔다 올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많은 연습, 실적이 쌓이기 때문에 그런데, 문학만은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할수록 어려워져요. 지금 내가 조그마한 동화 한 편을 쓰고 있는데요. 3개월이 걸려요. 너무 어려운 거예요. 내가 젊은 시절, 데뷔한 지 1년 지나고서는 하룻밤에 단편 하나를 썼습니다. 그것도 한 80매 정도 되는 소설을 하룻밤에 썼습니다. 그 열정 혹은 가지고 있는 에너지 같은 게 작용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게 있다고 해도 못 씁니다. 왜냐하면 생각할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이렇게 쓰면 안 되지, 저렇게 쓰면 안 되지, 이게 많이 작용하는 겁니다. 다른 학문도 있지만 문학만은 할수록 어려워요. 그건 정말 실제로 그래요. 엄살이 아니고 할수록 어려운 게 문학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걸어오시면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글쎄,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많은 배려를 받고 살고 있거든요. 아까도 조금 말씀 드렸습니다만, 전혀 나랑 관계없는 사람들이 나를 많이 도와줍니다. 이건 배려에서 나온 거거든요. 그렇다면 나도 다른 사람 위해서 배려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내가 소설 속에 약자를 주인공으로 삼는 것도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가지자는 내 나름대로 목표가 있죠. 그래서 사람한테 제일 중요한 게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신심이 깊은 그런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게 한 서너 분 되는데, 그분들은 전부 다 신앙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었어요. 이 양반들이 마지막 남긴 말이 뭐냐면, ‘인생 살아보니 아무것도 아니더라‘ 이거에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숱한 굴곡을 겪었을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처럼 남긴 말들이, 세 분 모두 허무하단 얘기죠. 어떤 분은 자기 막내딸에게 시집 갈 때 물려주려고 모은 돈을 몽땅 떼여 버린 거예요. 근데, 그걸 신앙심으로 극복하더라고요. 원망하지 말란 말이야. 그게 내 운명이다, 이거야. 그런 딸이 아직도 시집 안 가고 늙어가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분은 그 사람 원망하지 않더라고요. 그 사람도 내 돈 떼먹으려고 했던 게 아니고 실패했기 때문에 떼먹은 거 아니냐는 겁니다.

후대에 김주영 선생님께서는 어떤 사람으로 기록되거나 남았으면 싶으십니까?

다른 건 별로 안 바라고 그냥 잘 웃는 사람으로 남았으면 싶습니다. 나중에 뭐 기억 안 하겠지만, 혹시 아는 사람이 있다면 ‘옛날에 그 김주영이라는 작가, 그 사람 잘 웃었다 그러더라’ 그랬으면 좋겠어요. 한 1년 전 얘긴데, 신문에 박스 기사로 났던 얘기입니다. 공식적인 기록은 아닌데 캄보디아에서 120살까지 산 할머니가 있었어요. 왜 공식적이 아니냐면, 이 양반이 출생신고를 안 했어요. 이웃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120살 먹어서 죽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 할머니 살아 있을 적에 기자가 가서 장수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랬는데 아주 간단해요. 뭐냐면 ‘오래 살려면 많이 웃어라. 그리고 남의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 다음에 이빨 관리를 잘 해라’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일종의 무슨 좌우명 같은 건데요. 아까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난 울고 싶을 때 웃습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게 수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울고 싶을 때 많이 우는것도 좋지만, 그냥 울고 싶을 때 웃으면 수명은 더 늘어난다 이겁니다. 그리고 이빨, 치아 관리를 잘 하라고 하더라고요. 난 그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걸 물으셨는데 내가 너무 쉽게 대답했는지 몰라도 나중에 누가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객주』를 쓴 김주영이라는 작가, 그 사람 잘 웃었다 그러더라. 그렇게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노총각일 때 진행자와 연출자로 만나 십 수 년 인연을 맺어 왔으면서도 난 선생님의 바람이 그저 죽을 때까지 글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늘 호탕한 웃음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껄껄거리시는 모습에 어쩌면 우리 시대 마음 좋은 아버지 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김주영의 사람과 사람>의 서작가는 정말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재로 김주영 선생님을 만나왔다고도 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만난 선생님은 흰머리가 훨씬 많아졌고 더 듬성해져 보였다. 한동안 찾아뵙지 못해서 어쩌면 조금 낯설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내게는 훤칠한 키에 넉넉한 웃음뿐이었던 선생님이었는데. 갑자기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조만간 신간을 들고 진보시장에서 막걸리 한 사발 청하며 저자 서명을 받아야겠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11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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