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여름- 여름, 탐구생활
기획특집 여름- 여름, 탐구생활
  • 백소애(기록창고 편집인)
  • 승인 2021.10.29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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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여름을 보내고 온 아이들은 까맣게 타서 돌아왔다. 더러는 벌겋게 목덜미 살갗이 벗겨져 있기도 했다. 선크림 따위는 없던 시절이다. 여름방학 동안 우리에겐 어김없이 ‘탐구생활’이라는 큰 숙제가 주어졌다. 개학 때면 각자가 채집한 곤충을 비교하느라 가축시장처럼 북적였고 솜씨가 야무진 친구들은 박제하여 스크랩해 오기도 했다. 밀린 일기를 쓰느라 기상청에 전화해 지나간 날의 날씨를 기록하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일기를 먼저 쓴 친구에게 날씨를 묻곤 했다.

1974년 여름, 신세동 골목길 ⓒ정현경

우리는따분한 여름을 산으로 계곡으로 강으로 돌아다녔다. 그 시절 내륙지방의 여름은 큰맘 먹고 떠나보는 것이 영덕 해수욕장 정도였다. 기동력이 없던 시절이라 떠나도 모두 동해안 언저리였다. 영덕에 가서 회 먹고 오는 것이 가장 값지게 보낸 여가생활 중 하나였다. 꾸불꾸불한 국도 34호선을 타고 떠났던 영덕은 고속도로 개통으로 이제 안동에서 한 시간이면 주행이 가능한 거리가 되었다.

1982년 지금은 사라진 길안면 용계리 도연폭포에서의 물놀이 ⓒ박석호

개학을맞이하면 때론 빈자리가 보이기도 했다. 여름 물놀이에 휩쓸려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아이의 자리였다. 잠시 슬퍼했던 우리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어렸으니까. 개미굴에 개미는 몇 마리가 들어가는지, 고추잠자리 날개 한쪽을 뜯어내도 잘 나는지를 지켜보는 데만 한나절이 걸렸다. 놀 시간이 모자라도 괜찮았다.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면 되니까. 집 전화도 없던 아이들이 있었다. 비상연락망에 간혹 ‘안집’이라 표시해 두는 아이는 세 들어 사는 아이가 주인집 전화번호를 적어둔 것이었다. 하루 종일 핸드폰 없이 밖으로 다녀도 부모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저녁을 집에서 먹는다는 건 그 시절 어린이들의 ‘국룰’이었으므로.

길안천골부리를 잡던 젊은 엄마와 지렁이를 미끼로 붕어와 잉어를 낚던 아빠의 젊은 날 모습이 기억나는 여름이다. 골목에는 리어카를 끄는 수박장수들이 목청껏 과일을 팔았고 사들고 온 수박에는 칼집 낸 세모꼴 미리보기가 필수였다. 

1986년 길안천의 골부리 잡기 ⓒ김인섭

모기향을 피운 들마루에 누워 깜빡 잠이 들면 옆집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는 오랜 시간 부채질을 해주었다. 런닝 바람에 배를 깐 아저씨들이 슬레이트을 떼와 이웃과 소주 한잔에 고기
를 구워 먹었다. 함께 했던 것이 가능했던 그 시절 골목 풍경이다.

사람들은 물 맑은 길안 다리 밑에서 개고기를 잡아먹기도 하고 천변에서 무람없이 멱을 감기도 했다. 가져온 수박은 계곡 바위틈에 담가놓고 얄쌍하고 납작한 돌은 프라이팬 대신 사용되기도 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나 춤추고 노래했다.

아이들은 돌 아래 송사리를 잡거나 자갈돌을 모으고 누군가 가져온 돋보기로 불씨를 일으켜보거나 얼음땡 놀이를 하곤 했다. 솥단지에 쌀과 고기, 술과 김치를 부리부리 싸 들고 때론 걷거나
때론 버스를 타서 도착해 한껏 여흥을 즐긴 뒤 다시 걷거나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여정을 기꺼이 감수했던 시절이다.

영덕 대진해수욕장 ⓒ권선천

2021년지금 여러분은 어떤 여름을 보내고 있으신지? 30도를 넘는 날씨에도 KF-94 마스크를 끼고 여전히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순수했던 유년의 여름을 잠시 떠올려 본다. 우리의 짧은 여름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11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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