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약속 특별판 - 영남의 어른 ⑫
오래된 약속 특별판 - 영남의 어른 ⑫
  • 강병규(안동 MBC PD)
  • 승인 2021.11.30 1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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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서 피어난 생활의 미’
자수장 김.시.인.

경상북도 곳곳에 널려 있는 유·무형의 전통 문화유산을 재조명해 보는 프로그램인 <정신문화 기획시리즈 오래된 약속>을 시작한 지도 벌써 7년째다.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 살짝 풀이 꺾이기도 하지만퇴직할 때까지 500편은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소재가 있으니나만 부지런히 달려가면 정말 야심이 현실이 될 수도 있으리라. 
전통문화유산을 다루는 프로그램이다 보니곳곳에서 매듭과 아름다운 문양을 쉽게 찾아볼 기회가 많이 생긴다. 
볼 때마다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한참을 뜯어보곤 했는데, 우리 지역에 무형문화재 자수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영남의 어른으로 모시고자 문경 산양에 있는 개성고씨 고택을 찾았다.

모시게 되어서 참으로 영광입니다. 선생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자수장으로는 무형문화재가 세 번째인데,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33호 자수장 김시인이라고 합니다. 평생 자수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죠.

무형문화재까지 되셨으면 어릴 적부터 자수를 하신건가요?

제가 어머니 아버지 결혼하신 지 10년 만에 태어났습니다. 귀한 자식이었죠. 그런데 어머니는 수를 좋아하셔서 옛날에 예단으로 받은 모본단(수자직으로 제직된 비단)을 삼층장에 넣어 놓고는 항상 목단 수 아니면 십장생 수를 놓고 하셨던 분이죠. 또 제가 어릴 때는 돌 조끼며 명절 때마다 수놓은 주머니도 만들어 주셨지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한복을 입었는데 옷고름에도 수를 놔주셨고 깃 끝동에도 수를 놓아주셨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수를 보면서 커왔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수와 가까워졌고 그게 시작하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죠.

자수를 일상적으로 접하다가 직접 놓아보기도 하셨겠군요?

맞습니다. 어머니 하시는 걸 보면 제가 그렇게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가 하시다가 나가시면 제가 바늘을 꽂아 보기도 하고 이랬는데, 그때는 뭐 물자도 귀하고 하니까 옥양목이나 포프린 같은 데다가 수를 놔서 가방을 만들어 들고 다녔어요. 특히나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가방은 요새 뭐 아무리 좋은 명품 가방보다도 더 이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옛날에는 십자수도 했었잖아요? 옛날에는 장롱이 그리 많지 않아서 양복 덮개를 만들어 수를 놓아두면 사촌 오빠들이 많이 뺏어가고는 했었죠. 하여튼 수를 참 좋아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뭐든지 좋아하는 걸 해야 되는 거다 이런 생각이 들고, 수를 좋아해서 그런가 눈도 안 나쁘고 제 나이에 비하면 건강한 편이죠.

어머니께서 하던 일을 망쳐서 혼나지는 않으셨나요?

처음에야 어머니 하는 수를 다 망쳐 놨지요. 그랬는데 야단을 안치시더라고요. 그냥 당신도 그랬던가봐 하하. 그래서 내가 “왜 야단도 안치세요” 물어봤는데 그냥 새로 또 하나 저더러 하라고 만들어 주셨어요. 6학년 때인가 뭐 하나 만들어 수틀에서 메꿔 주시길래 그냥 했더니 잘했다고 그러시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뭐 잘 했겠어요? 근데 또 베개를 만들어 주셨어요. 또 잘 한다 그러니까 진짜 잘하는 거 같지만 사실은 잘 했겠어요? 하여튼 어머니가 왜 그렇게 만들어 주셨을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 때는 그게 참 우리 때는 베짜는 것도 많이 했고 고치에서 실도 많이 뽑아 봤고 그런 일을 많이 했었죠. 그렇게 하다 보니 제일 재미난 게 자수더라구요. 지칠 줄도 모르고 그냥 좋아합니다.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규수가 수를 놓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었죠 마치 사극이나 영화에서 보는 것 처럼요?

어머니가 결혼하실 적에는 어느 집에 새색시가 왔다고 그러면 창호지 가지고 가셔서 본을 떠가지고 수를 얼마나 많이 이쁘게 잘 했느냐 이런 거 보려고 했었죠. 저도 그럴 때가 있었는데 어머니 때는 더 하셨지요. 그때는 자수가 규수의 가장 큰 덕목 중의 하나였어요. 수를 잘 해야만 인정이 됐던 때가 있었던 거 같아요. 제가 배울 때는 전통 자수가 아니고 병풍이 유행이었어요. 병풍을 결혼할 때에 예단으로 해가고 이랬었어요. 그리고 방안에 우풍이 심할 때라 장식용이나 제사용이 아니고 자기가 쓸 요량으로 수놓은 병풍을 많이 해가기도 했었죠. 어머니 때 자수 본은 조그만 골무라던가 베개 모, 액자, 돌 띠 같은 옛날 전통 궁중에서 쓰던 애기들 입히던 그런 옷이라던가 주머니라던가 이런 걸 만들고는 하셨죠. 처음에는 그래서 별 거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게 요즘은 굉장한 보물이 되어 버렸어요.

예전에는 중·고등학교 가정 시간에도 자수를 배우지 않았었나요?

여학교 다닐 때 일주일에 가정 시간이 네 시간 있었지요. 한 시간은 교과서, 또 한 시간은 요리, 재봉, 자수 이렇게 한 시간씩 나눠서 수업을 했어요. 그래서 자수가 좋으면 얼마든지 수를 배울 수 있었고, 요리든 재봉이든 다 할 수 있었죠. 그때 저를 가르쳐 준 가정 선생님이 참 대단하신 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셨죠. 
1997년인가 제가 대구의 대백프라자에서 개인전을 했었어요. 그때 일인데, 학교 다닐 때 가정 선생님이셨던 송성지 선생님을 수소문해서 찾아가지고 친구들이 연락을 했나봐요. 그랬더니만 송선생님께서 숨이 턱에 차도록 막 달려오셨더라고요. 그렇게 전시된 작품들을 보시더니 “아이고 나도 학교 선생 해가면서 교장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 자수 병풍을 많이 해 줬다”고 그러시면서도 “난 이런 수는 못 봤다”라고 그러시더라고요. 너무 좋아하시던데 제가 생각하기를 그 송선생님도 참 아이 길러가면서 학교 생활하면서 병풍에 수를 놓아 선물도 하고 그러셨나 싶은게 참 저만큼 수를 좋아하셨던 분이 아닌가 생각 되더라구요.

학창 시절 가정 선생님 말고 다른 분한테 배우신 적은 없었나요?

제가 64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수를 체계적으로 배우려고 서울을 갔어요. 그런데 자수학원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한참을 찾다가 신문 광고를 발견했어요. 무슨 자수연구소 이러면서 강습생을 모집한다는 광고였어요. 용산구 원효로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당장 등록하고 가서 배웠습니다. 김계순 선생님이라고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인천시 무형문화재였죠. 
근데 그분이 자수계에서는 아주 대가이십니다. 그래서 참 훌륭한 분을 만나서 장롱 같은 걸 배우게 됐습니다. 최초로 장롱과 수를 접목하신 분이에요. 김계순 선생님은 제가 만나기 전 아마 60년대부터 장롱에 대한 연구를 하셨던 것 같아요. 재주도 많고 아주 훌륭하신 분이었는데 제가 보기에는 자수를 그렇게 열심히 한 분은 아니셨던 것 같아요. 오히려 연구하는 걸 더 좋아하셨고 가르치는데 더 재주가 있었던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도안을 잘 하셔서 국회의사당에 있는 88서울올림픽때 바위에 앉아있는 봉황 8마리 자수가 그분의 그림이었습니다. 자수 작품을 많이 남기신 것은 아니었지만 제자들을 많이 가르치신 분이었습니다. 연구하기를 좋아해서 수를 접목한 장롱, 이불에다 수를 놓는다던가, 아얌, 화관 같은 것들을 연구하셨어요. 그래서 자수인들이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열쇄패도 김계순 선생님께 배운건가요?

참 그분이 열쇄패 연구도 많이 하셨습니다. 열쇠패는 섬유로 만들어진 거라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어요. 아주 옛날 양반 사대부에서 쓰던 열쇄패에 대한 기록이 책에 좀 남아있었고, 박물관에 가면 드물게 한두 점 있었습니다. 세종대 박물관에 가면 궁중에서 쓰던 곳간 열쇠패가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열쇠패를 가르쳐 주신 거죠. 처음에는 열쇠패라는 걸 잘 몰랐어요. 김계순 선생님이 여기 저기 책을 보시고 연구를 많이 하신 겁니다. 그렇게 배워서 제가 열쇄패 재현을 많이 했습니다. 은에 칠보를 해서 열쇠패를 한 게 아주 희귀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선생님한테 배우고 책도 보고 박물관에 있는 옛날 물건들을 보고 그렇게 재현해 나갔습니다.

김계순 선생님께 배운 자수를 스스로 발전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자수인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거군요?

아마 1981년으로 기억됩니다. 주부클럽연합회라는 단체에서 경시대회를 했습니다. 자수, 한글 서예, 한문 서예, 그림, 글씨를 겨루는 경시대회였는데 거기서 제가 자수로 입상을 했어요. 그때부터 자수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총리 사모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수를 워낙 좋아하셨던 분이었죠. 결국 우리 집에 오시게 되었고 제가 해 놓은 작품들을 보시더니만 그냥 두지 말고 전시회를 하자고 하시더군요. 급하게 알아보던 중에 대구에서 누가 취소한 일정이 있어서 운 좋게도 대백프라자에서 일주일 동안 전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수가 말도 못 하게 인기 있었어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이 왔었죠.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나중에 운현궁에서도 지도를 하게 되었고 안동과 문경에서도 전시를 이어나갔죠. 그러다 보니까 그냥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러왔네요.

총리 사모님까지 도와주신 걸 보니 인복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주위에서 관심을 많이 받으셨겠어요?

40여 명이 회원으로 있는 선학회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83년도에 조직되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공부도 하는 단체이죠. 여태까지 해마다 한 해는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하고 또 한 해는 외국에 가서 전시회를 하고는 했지요. 보통 외국은 문화사절단으로 가기 때문에 큰 비용이 들지 않아서 비교적 수월하게 외국 전시회를 많이 다녀온 편입니다. 호주 이민 40주년 기념으로 전시를 했고, 아테네 올림픽, 북유럽 수교 50주년 때인가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에서 전시회를 한 적도 있습니다. 어디서든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노르웨이에서는 당시 최병구 대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한국과는 문화교류가 거의 없었던 나라라서 문화사절단이 가니까 너무 힘이 난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좋은 문화가 있었느냐고 노르웨이 사람들이 그러더래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얘기를 했죠. 우리는 반만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인데 이런 문화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랬더니 깜짝 놀라시더라구요. 보통은 도자기도 가고, 한국무용, 다도, 자수 뭐 이렇게 한 30명 정도 조를 꾸려서 가는데 자수는 유독 저 혼자였어요.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그래서 자수를 외국에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었죠 상대적으로. 일본에서는 2002년도 한일 월드컵 때인데 동경, 오사카, 마쿠아리 세 곳에서 전시회를 했었습니다. 완전히 인산인해였어요. 입장료도 비싼 전시였는데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더라구요.

안 가보신 곳이 없군요. 캐나다 왕립박물관에서의 에피소드가 있으시다고요.

맞습니다. 캐나다 토론토 총영사관에서 전시회를 마련해줬는데 하태원 총영사관이 준비를 해주셨습니다. 캐나다 왕립박물관에서 전시를 했습니다. 큐레이터에게 전달하기를 한국에서 아주 훌륭한 자수장이 직접 만든 작품 전시를 할 텐데 박물관 측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를 고르면 기증하겠다고 했어요. 동양관 큐레이터였습니다. 오픈하는 날 오셔서는 아얌에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다. 아얌이 뭔지 모르시죠? 생소하실 텐데 머리에 이렇게 해가지고 꼬리가 나오는 모자를 아얌이라고 합니다. 그게 그렇게 신기했나 봐요. 그거 뭐냐고 묻길래 양반집 규수나 새색시들이 마실 다닐 때나 친척들에게 인사드리러 다닐 때에 쓰고 다니는 거라고 그랬더니 좋다고 그걸 가져가겠다고 하시더라구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생존해 있는 사람의 작품이 그 박물관에 들어가기가 정말 힘든가 보더라구요. 그런데 캐나다 왕립박물관에 제 작품이 전시가 되고 아주 성황리에 진행됐었습니다. 한 달 전부터 현지 신문에다 광고를 냈다고 하더라구요. 그걸 보고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찾아 주신 겁니다.

대영박물관에서도 전시회를 하신 걸로 압니다.

어떻게 운이 좋은 건지 제가 북유럽 전시회 문화행사를 다녀오니까 대영박물관에서 편지가 와 있더라구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만 제가 잘 아는 분이 제 작품을 박물관 측에 기증하셨다는데 카드도 만들고 책도 만들어야 하니 저작권을 허락해 달라고 연락이 온겁니다. 편지를 받기 전에 영국에서 공부를 하는 제 딸아이 친구가 전화가 왔더랍니다. 너희 어머니 작품이 대영박물관에 있다면서요, 그러고 난 이후에 편지를 받았으니 진짜 사실이구나 했죠. 지금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은 제가 만든 대형 장롱 세 통과 다른 분이 수놓은 십장생이 있습니다.

해외 전시를 많이 하면서 보람 있는 일도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이 두서없이 됐지만 93년도에 선학회라는 모임에서 프랑스 한국문화원 전시회를 했어요. 그런데 선학회라는 모임 회원들은 외국에 다니면서 자기 작품을 기증을 하고 다닙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재능기부죠. 93년도만 해도 프랑스에 한글학교가 없었다고 합니다. 40명 되는 회원들이 자기 작품 하나씩을 다 기증했었거든요. 저는 당의보를 액자에 넣어 미리 보냈더니만 제일 먼저 팔렸다고 하더라구요. 기증한 작품들을 팔아서 프랑스에 한글학교를 만드는 기초를 세웠다고 당시 이철종 교민회장님이 그러시더라구요. 무척 보람되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수가 한국에만 있는 문화는 아닌거죠?

맞습니다. 중국에도 자수가 있고 서양에도 자수가 있습니다. 중국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서양은 우리랑은 매우 다르죠. 우리는 선이 굵고 투박하고 그러면서도 아주 감칠맛 나는 자수죠. 우리는 옛날 궁중에서 하던 생활 자수가 많았던 것 같아요. 옛날 통일 신라 시대가 자수가 가장 융성할 때인데 그때는 불교 자수라고 탱화를 수놓아서 훌륭한 품질의 자수 문화가 융성했었죠. 우리 자수는 참 다양합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자수가 우리 생활과 밀접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생활자수라고도 말씀하신걸 보면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돌아가실 때 까지 필요한 게 자수입니다. 사람이 아름다워지고 싶은 마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두 똑같잖아요? 옛날에 고려시대 때도 중국 사신들이 와서 보면 그 긴 옷에다 수를 놓아서 왕비가 입고 다녔다는 그런 걸 봤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활옷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아이가 태어나면 돌 때부터 그 꽃버선에다가 수를 놓고 또 갓신에 수를 놓고, 모자 조바위에나 주머니나 어디든 자수는 없는 데가 없었어요. 심지어 돌아가실 때에는 관 뚜껑에도 수를 했어요. 무덤에서 출토된 유품들을 보면 자수 관 뚜껑도 나오거든요. 
자수라는 게 하나 하나 해내는 지구력, 인내와 끈기인데 저 같은 경우는 그렇게 인내심 많은 사람이 아닌데도 이것만 있으면 밤을 새워도 잘 몰라요. 책을 좋아하는 선비는 바깥에 홍수가 져서 다 떠내려가도 잘 모른다는 옛말도 있잖아요? 저한테는 이 자수가 그런 일입니다. 저는 이 수가 휴식입니다. 이게 취미고 즐거움이고 행복이고 그래요. 이 자수가 제 모든 것이에요. 수가 없으면 재미없는 인생이었을 겁니다. 내가 외국에 많이 다니는데 그러면서도 자수가 머리에 왔다 갔다 합니다. 고된 일이기는 하지만 저한테 자수는 그렇게 고된 일이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열두 시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수가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평생을 해온 자수, 자제분들도 관심 있어 하나요?

우리 딸한테 강요는 안했어요. 저는 옛날에 자기가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시키지 않겠다 이렇게 늘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진심으로 자기가 좋아하면 하는 거지 뭐 강요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다행인지 딸아이가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앞치마도 만들고 치마저고리도 만들고 하더라구요. 자수는 힘이 훨씬 더 많이 드니까 어렵지 않겠나 했지만 이제는 곧잘 하더라구요. 
우리 큰집 형님이 “옛말에 상놈은 발 덕이고 양반은 글 덕이라더니 자네는 자수 덕에 별의 별 곳을 다 다니고 그러니 참 좋겠네” 하시더만요. 처음에는 많이 말리셨거든요. 골병든다고 말리셨는데 사흘만 안 하면 좀이 쑤시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하게 됐어요. 자식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 아무도 못 말리는 거 같아요. 사실 저는 문화재가 되겠다 뭐 이런 마음도 없었거든요.

그토록 어렵게 만든 많은 작품을 문경시에 기증하셨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제가 문경시에 작품 86점을 기증했어요. 활옷은 한번 만들려면 1년 정도 걸리거든요. 그만큼 시간과 공이 많이 드는 작업인데 그 활옷까지 기증했어요. 사실 그렇게 기증하고 나니 좀 시원섭섭하다고 할까 그런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저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 섭섭함도 이제는 사라졌지요. 가끔씩 전시관에서 작품을 본 사람들이 연락 옵니다. 그렇게 전화를 받으면 받을수록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형문화재가 된 것도 제 작품을 본 안동대학교 교수님이 강력하게 권유해서 서류를 집어 넣었어요. 그랬더니만 이렇게도 영광스런 무형문화재가 되었습니다. 그게 2006년도입니다.

여성들에게 자수는 어떤 의미일까요?

여성들은 남자보다는 섬세함이 있는 거 같아요. 타고난 섬세함이 자수를 남자보다 더 잘하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남자들한테도 필요한 게 많아요. 옛날에 선비들이 활을 쏠 때 쓰는 완대도 있구요. 완대는 도포자락을 넣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과거보러 갈 때 붓 주머니에도 수를 놓아서 줍니다. 풍댕이라는 덮어쓰는 모자도 있구요. 안경집에도 수를 놓고 무궁무진 합니다. 옛날 여성들은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수를 놓으면서 교양을 쌓은 것 같습니다. 앉아서 수를 놓는 것이 바로 정신교육이었죠. 어쩌면 남성들이 도학을 공부했듯 여성들은 이 자수를 통해서 수양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딸자식이 자수를 놓는 것을 보고는 어머니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어머니도 좋아하셨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너무 여기에 집착을 하니까 건강 걱정뿐이셨어요. 아이를 낳고 곧바로 자수를 하려고 했을 때도 어머니는 삼칠일은 참아야 한다며 말리셨죠. 그 덕분에 아직은 건강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어머니께서 제 전시회 오픈 때도 오셔서 축하해 주시고 그러셨죠. 저를 이렇게 만들어 주신 분이라 지금도 마음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자수장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 평생 바늘과 실을 손에서 떼어 놓지 않았을 그 손이 한국의 아름다움을 모두 담아 만들어 냈다는 생각을 하니 더 위대해 보였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 걸려도 가만히 앉아 끝내 해내고야 마는 김시인 자수장의 집념과 성실함이 해외 유수의 박물관에서 극찬을 받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작은 바늘과 가느다란 실로 엮어낸 김시인 자수장의 일생이 진정한 장인의 삶이 아닐까?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12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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