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안동 ② - 이원조의 「회향懷鄕」
문학 속 안동 ② - 이원조의 「회향懷鄕」
  • 신준영 이육사문학관 사무차장
  • 승인 2021.12.0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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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리 왕모산에 뜬 쌍무지개. 원천리는 1970년대 안동댐 건설로 수몰지구가 되었다. ⓒ신준영

저는 대구 비산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되던 해 의성의 ‘오롱골’ 친가로 들어가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살았습니다. 사람의 기억이 몇 살 때까지로 거슬러 갈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 기억의 ‘첫’은 네 살 이후의 ‘오롱골’, 거기서 부터입니다. 증조부모님, 조부모님, 부모님, 삼촌들, 막내 고모, 그리고 저희 세 자매까지 많을 때는 사대 열두 명이 한집에 모여 살았지요. 사람의 정서가 완성되는 것이 일곱 살 이전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론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치면 저의 모든 정서는 ‘오롱골’에서 완성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마을과 떨어진 외딴 집이었고 가족이 세상의 전부였으며, 이따금 담장 뒤에 숨어서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을 구경하던 곳. 퇴근하고 돌아오시던 할아버지께 잘 다녀오셨냐고 인사드릴 때 마다 아낌없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던 곳. 산과 강, 샘과 들, 나무와 짐승, 꽃과 어둠과 별, 삼촌들의 노래 소리, 그 모든 것이 우리들의 것이었던 곳. 가족의 죽음을 처음 겪은 곳이기도 하며, 가계의 쇠락과해체를 경험하기도 한 곳. 지도를 그릴만큼 생생히 남아 다시 걸어보고 싶고 뛰어보고 싶은 곳이지만 어쩌다 꿈에서나 한번 씩 다녀오곤 하는 곳. 그러고 나면 한동안 젖은 감정으로 살아지게 만드는 곳 말입니다. 그곳에는 장죽을 물고 나란히 앉아 계시던 사랑방의 증조부모님, 누에들의 뽕잎 갉는 소리를 들으며 잠드시던 큰방의 조부모님, 어린 세 딸을 나란히 눕혀놓고 아빠 발소리를 기다리는 엄마, 인조 속눈썹을 장롱 위에 몰래 숨겨놓고 한번 씩 꺼내보던 막내 고모와 버드나무에 걸린 달처럼 부풀어서 밤마다 유행가를 불러대던 십대의 삼촌들이 있습니다. 이렇듯 ‘슬픈 행복’의 감정을 불러내는 곳을 고향이라 이름해 봅니다.사실 고향 이야기를 하면서 ‘슬픈 행복’을 먼저 말한 사람이 일찍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평론가로 이름을 날린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출신 이원조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원조는 이육사 시인의 동생으로 더 알려져 있기도 한데 일설에는당대에는 오히려 이육사가 이원조의 형으로 알려져 있었을 만큼 이원조의 명성이 자자했다고도 합니다. 위당 정인보鄭寅普는 양주동梁柱東, 유진오兪鎭午와 더불어 이원조를 ‘장안의삼재’라 칭하기도 했는데 그런 이유도 한몫을 했는지 덕혜옹주의 6촌을 부인으로 맞는 국혼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이원조가 1937년 7월 『여성』에 발표한 「향토유정기鄕土有情記-낙동강洛東江의 요람搖籃」이라는 수필은 1938년과 1946년 조광사에서 나온 『한국문학전집 수필』에 「회향懷鄕」이라는 제목으로 재수록 됩니다. 이 글에서 이원조는 고향인 원천(당시 지명은 원촌)을 떠올리며 ‘슬픈 행복’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洛東江(낙동강) 七百里(칠백리) 허구만흔 구비에서도 
깍거 세운 듯한 王母城(왕모성) 뿌리를 씨치 雙峯(쌍봉) 
그림자를 감도는 사이에 페여진 적은 한 칼피가, 아직도 
내 어린 記憶(기억)을 자어내는 나의 故鄕(고향)이다. 
말이 故鄕(고향)이지 열다섯 살에 떠나와서 十年(십년)
이 넘도록 한 번도 다시 차저가지 못하였스니 情(정)이 드
럿기론 얼마나 드럿스며 못 닛치기로서니 무엇이 그다지 
애틋하리요마는 그래도 故鄕(고향)말이나면 문득 거긔가 
생각나는 것을 보면 한치도 못되는 짤분 記憶(기억)이나
마 그것을 여긔서 이야기하는 것은 또한 나의 슬푼 幸福
(행복)이기도 하다.

이원조(사진제공:이육사문학관)

이원조는 1909년(혹은 1907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881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인정이 많았으며 재기발랄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1926년 대구교남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31년 동경 법정대학 불문학과를 이수했습니다. 192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전영사錢迎辭」라는 작품으로 입선하였고 1929년에는 소설 부문에서 「탈가脫家」라는 작품으로 선외가작으로 뽑혔습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는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였다고도 합니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을 조직하여 민족문학건설운동에 앞장서 활동했는데, 초대 서기장이었습니다. 또한 『현대일보』와 『해방일보』의 주필을 역임하기도 하였고, 서울대학교 문과대학에서 「소설론」을 강의하였다고도 합니다. 월북직전에는 수필집 『문향첩聞香帖』의 간행 예고가 광고되었으나 출간되지는 못한 듯합니다.

大江(대강)의 流城(유성)이란 한구비도는 데마다 한 마을
식 남기는 것은 어데라도 다갓지마는 우리 마을은 강가이
면서도 江村(강촌)과 가치 卑俚(비리)하지 안엇든 것이 
나의 故鄕(고향)에 對(대)한 한 개의 프라이드이다. 뒤으
로는 連山(연산)이 둘니기를 弧形(호형)으로 되어서 그 산
기슭에 百餘戶(백여호)의 동네가 살고 그 압헤는 뽕나무밧 
조밧 담배밧치 平野(평야)와 가치 버러진데 다시 그 압흐
로 느러진 느틔나무 방죽이 하늘을 찌를드시 절녀섯다. 
그 중에도 제일 큰 느틔나무 두 그루가 방축한 가운데 서 잇
는데 이것은 한 百年(백년)이나 묵은 古木(고목)인지 여름
이면 그 나무 그늘 만해도 하로종일 빗 한 번 들지 못할 만큼 
큰 나무엿다. 그 나무를 우리는 당나무라고 부르고 여름철에
는 그 나무 밋헤서 글도 읽고 놀기도 하엿다.

저는 누군가가 ‘슬픈 행복’의 감정으로 그리던 그 산과 들과 강을 매일 보고 삽니다. ‘운’이라고 해도 좋겠고 ‘연’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뽕나무밭과 조밭, 담배밭은 어느 틈엔가 사라졌고 그 앞으로 늘어진 느티나무 방죽도 기세가 약해서 겨우 흔적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이 마을의 당목이었다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도 어느 해 속이 빈 채로 불에 타서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마을 어르신께 그 당나무의 위치를 물어본 적 있는데 지형이 바뀌어서 정확히 알기는 어렵고 대충 이쯤일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 어디에 빛도 들지 못할 만큼 큰 나무가 있었다 생각하자 그 아래서 글 읽고 노는 아이들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침 바람도 불어와 사라진 나무가 웅웅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습니다.

이 방축 압헤 맛치 비단을 빨어서 널어 노흔 듯한 잔디밧. 
석양나절이되면 그 잔디 밧헤서 말달니기를 한다고 모다 
옷고름을 푸러서 곱비라고 해가지고는 타는 사람은 업히고 
게다가 馬夫(마부)까지 끼워서 말 노릇 하는애가 당나귀 
소리를 치면서 다름박질을 치든 것은 제법 녯니야기 갓기
도 하다. 
다시 그 잔디밧 압헤 자갈밧이 잇서서 여름에 물이 지고 
난 뒤에는 怪石(괴석)을 줍는다고 해서 차돌도 줍고 鱗石
(인석)도 주엇스나 그것은 주서다가 무엇에 썻든고? 그 압히 
바로 洛東江(낙동강)이라. 그러니까 뒤의 連山(연산)은 
활체와 갓고 압헤 江(강)물은 활줄과 가치된 그 속에서 나
는 잘아낫다. 지금도 산보담 물을 더 조화하는 것은 물에서 
자라나다십히한 어린 때 印象(인상)이 그대로 趣味(취
미)가 된 모양이다.

이원조 유학시절(사진제공:이육사문학관)

이원조는 필명으로 여천黎泉·청량산인淸凉山人·안동학인安東學人 등을 썼다고 합니다. 필명에서도 고향을 유달리 생각하는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학생 때인 1927년에는 ‘조선은행대구지점 폭탄사건’과 관련하여 형 원기, 육사, 원일과 함께 옥고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서로 자신의 책임이라 다툴 만큼 형제들의 우애가 남달랐다고 합니다. 이들 형제는 서로 간의 격을 없애기 위해 술과 담배를 통음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랐는데 평생 형제들이 가장 가까운 친구이며 동지이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 공유한 추억이 많은 만큼 정서적인 공감대가 두텁게 형성되는 건 당연한 이치일 겁니다. 이원조의 글에는 형제들과 함께 한 어린 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느진 봄철만 되면 우리는 江(강)에서 산다. 글은 안 읽고 놀
기만한다고 종아리 마진 것도 笞刑(태형)으로 친다면 十
年役(십년역)은 때운 셈이련만은 그래도 숭어색기 멧 마
리 잡히는 사발무지에 재미를 부처서 미끼로 쓰는 번데기 
어드러 동네집 도라다니든 일을 생각하면 극성스럽기도 
하엿섯다.
그러다가 잘 안잡히는 숭어색기에 情(정)도 떨어지고 날
씨도 더 더워지면 그적새는 우리가 모다 고기색기 가티 물 
속으로 드러가기 시작한다.
아침밥만 뜨고나면 버리밧 골로도 새여 나오고 뽕나무 그늘
로도 숨어 나온 一隊(일대)가 정해노코 가는 곳은 「붉은바
위」소이엿다. 그 바위소는 깁히가 얼마나 되는지 傳說(전
설)과 가티 내려오는 말에는 명주실타래를 멧치나 푸러
넛는다고 하지마는 바로 그 엽헤는 밋헤 모래가 갈니고 물
깁히도 얼마 되는지 안흐며 더구나 물결도 세지 안허서 아
마도 우리 조상이 그 땅에 드러오든 날부터 목감는 터으로 정
해 노앗든 것 갓헛다. 
낫전 낫후에 잘 감으면 일고 여덜 번은 예사로 감으니 지
금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는 몰으지만 목을 넘우 만히 감으면 
몸에 진액이 빠진다고 야단을 치고 말니든 어룬들의 말도 
거짓말은 아니엿든 모양이다.

원조와 육사 형제들이 물놀이 하던 ‘붉은바위 소’를 찾아 나선 적이 있습니다. 마을 어른의 뒤를 따라 풀을 헤치고 겨우겨우 찾아간 ‘붉은바위 소’는 원조의 글이 무색할 만큼 작고 얕았습니다.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붉은바위’라는 이름처럼 바위의 붉은 빛은 여전했습니다. ‘고기 새끼 같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물속에 반쯤 잠긴 나무들 사이로 청둥오리며 새떼들이 대신 자맥질을 하며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 중엽 안동댐 건설로 물길도 바뀌고 집들도 헐려 사람들이 떠나간 동네지만 이원조가 살던 어린 날의 원천리는 백여 호 남짓한 규모 있는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들로 변한 옛 마을 한가운데 옛 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가끔 그 길을 오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환영처럼 그려보게도 됩니다.

원조와 육사 형제들이 물놀이 하던 ‘붉은바위 소’를 
찾아 나선 적이 있습니다. 마을 어른의 뒤를 따라 풀
을 헤치고 겨우겨우 찾아간 ‘붉은바위 소’는 원조의 
글이 무색할 만큼 작고 얕았습니다. 실망스럽기는 했
지만 ‘붉은바위’라는 이름처럼 바위의 붉은 빛은 여전
했습니다. ‘고기 새끼 같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아이
들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물속
에 반쯤 잠긴 나무들 사이로 청둥오리며 새떼들이 대
신 자맥질을 하며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습니
다. 1970년대 중엽 안동댐 건설로 물길도 바뀌고 집
들도 헐려 사람들이 떠나간 동네지만 이원조가 살던 
어린 날의 원천리는 백여 호 남짓한 규모 있는 마을
이었다고 합니다. 들로 변한 옛 마을 한가운데 옛 길
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가끔 그 길을 오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환영처럼 그려보게도 됩니다.

생둥이 할 것 업시 손에 걸니고 발에 닥치는데로 그대로 
휩쓰니 한 번만 지나오면 외밧치고 무엇이고 그대로 修羅
場(수라장)이 되고 만다. 잘못해서 들켜 밧댓자
「가을에 버리 도주로 바다가렴」
하면 그만이니 고십도치 보담도 더한 이 惡童(악동)에게 
弊農(폐농)하게 된 원두쟁이가 마을에 가서 무엇이라고 
寃訴(원소)를 하엿든지 한 번은 運命(운명)의 날이 닥처 
오고 마럿다.
어느 하로ㅅ날도 목감는 日課(일과)를 마치고 모다 물 속에
서 나와보니 버서노코 드러갓든 옷이 하나도 업시 되엿다. 
아모리 차저 보아도 눈에 뜨이지 안코 지나가는 樵童(초동)
들에게 무러보아도 알지 못하엿다.
九龍淵(구룡연)못에서 목감든 仙女(선녀)가 옷을 일헛다
는 傳說(전설)은 나종에 드러 알엇지마는 그때 우리들의 
愁殺(수살)한 光景(광경)이란 결코 그런데 比(비)할 것
이 못되엿다. 허는수 없이 물 속에 드러갓다가는 모래밧
헤 나와 볏도 쪼이고하면서 서로 옷차질 궁리를 해보앗스
나 아무런 計策(계책)도 나오지 안코 해는 점점 기우러저 
볏살조차 얄버가니 寒氣(한기)가 드럿다. 바로 그 마
을에서 우리한테 제일 미움을 밧는 벼락장군가튼 老人(노
인) 한 분이 칙넝쿨로 우리 옷을 묵거 들고 뒷산 바위틈으로 
내려오면서 
「요놈들 모도 나오느라」
하며 호통을 첫다. 처음에는 엇지나 놀낫던지 엇던 애는 물 
속으로 드러가기도하고 엇던 애는 다라나기도 햇스나 結
局(결국)은 一網打盡(일망타진)이 되어서 집으로 붓잡혀 
드러갓다.
그 結果(결과)는 連 接屋(연창접옥)한 집집마다에서 
笞刑(태형), 笞刑(태형), 笞刑(태형). 그 이튼날 모혀보니 
一黨(일당) 中에 하나도 免訴(면소)된 사람이 업섯다.

이원조 형제가 태어난 생가 육우당 유허비 ⓒ신준영

이 대목에 이르면 물 건너 마을 외밭 주인의 억울한 심정이 되어 울긋하다가, 졸지에 옷을 잃어버린 벌거숭이 아이들의 심정이 되어 다시 불긋해지기도 합니다. 하필이면 아이들에게 가장 미움을 받던 벼락장군 같은 노인의 손에 일당의 옷이 들려있을 건 뭔지요. 그날의 그림이 눈앞의 일인 듯 생생하게 그려지는데요. 따져보면 백년도 더 된 이야기여서 시차를 앓는 사람처럼 멍한 기분이 들다가, 다시 백년 뒤 누가 이 이야기를 알아서 이 자리에 서게 될까 싶어 아득해지기도 합니다.

이 대목에 이르면 물 건너 마을 외밭 주인의 억울한 심정이 되어 울긋하다가, 졸지에 옷을 잃어버린 벌거숭이 아이들의 심정이 되어 다시 불긋해지기도 합니다. 하필이면 아이들에게 가장 미움을 받던 벼락장군 같은 노인의 손에 일당의 옷이 들려있을 건 뭔지요. 그날의 그림이 눈앞의 일인 듯 생생하게 그려지는데요. 따져보면 백년도 더 된 이야기여서 시차를 앓는 사람처럼 멍한 기분이 들다가, 다시 백년 뒤 누가 이 이야기를 알아서 이 자리에 서게 될까 싶어 아득해지기도 합니다.

이원조는 해방 후인 1947년 말에 임화林和·김남천金南天 등과 함께 월북하였습니다. 북쪽에서 중앙본부 선전선동부 부부장의 직책을 맡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한국전쟁 남하 때는 『해방일보』의 주필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북쪽에서 활약한 경력은 확인할 수가 없는데 북쪽에서의 그의 저서는 어떤 이유로 출간되자마자 곧 비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1953년 8월 남로당 숙청 때 임화·벽정식薜貞植 등과 함께 ‘미제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투옥되어 1955년에 옥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원조에게는 아내 이해순과 딸 혜정, 영소, 소영, 진영 그리고 아들 동명, 동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남쪽에 있는 친척들이 소식을 알아보려 애썼지만 자식들의 생사마저 전혀 알 길이 없다고 합니다. ‘역사의 아픔’이 아니면 달리 뭐라 표
현할 수 있을까요.

그러든 故鄕(고향)을 떠나온지 또 十年(십년)이 넘엇다. 
가치 자라든 애들 중에는 이미 子女(자녀)를 가저 成家
(성가)를 햇다느 니도 잇고 엇드니는 滿洲(만주)로 갓다는 
사람도 잇스나 그 뒤에 하나도 만나지를 못하엿다.
昨年(작년) 가을에 마침 南行(남행)을 하엿다가 마을 
父老(부노)를 한 분 만나서 故鄕(고향) 이야기를 무러보앗
더니 마는 昨年(작년) 물에는 느틔나무 방축도 반이나 떠
내려갓고「붉은바위」소도 터무니 업시 되엿다고 하엿다.
아직도 故鄕(고향)에 도라갈 期約(기약)이 업건마는 도
라간대야 딴 나라와 가틀진댄 차라리 내 搖籃(요람)이
든 넷 故鄕(고향)을 인제는 내 마음의 搖籃(요람) 속에 간
직하여 둘 수박게 업는가 부다.

이 글 발표 후 그가 고향을 다녀갔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의 고향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고향을 소환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의 저장소 한가운데 저마다의 고향이 있고, 거기에는 우리가 기억하는 공간과 시간과 사람이 있습니다. ‘있었던’ 기억으로 사람들은 지금 없는 무엇을 견디고, 살아낼 힘을 얻습니다. 무거웠고 가벼웠던 마음의 요람, 옛 사람의 행복한 슬픔의 저장소를 거닐며 오래 생각에 잠겨봅니다.

어제 떠난 사람의 부음과
오늘 도착한 사람의 소식이 함께 왔다
불의 날을 지나 물의 날을 건너
사람은 가고 사람은 온다
무거웠고 가벼웠던
겨울 빈들에서 보았다
강둑에 즐비하던 시무나무며 
느티나무 아래 글 읽던 노인과 
아이들이 사라진 옛 마을 자리엔 
기억을 버리고 온 새들과 바람이
일가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눈 맑은 형제들이 멱 감고
참외 서리하던 그 강변과 들녘에
시차를 두고 오래 서보았다
새들이 거처를 옮겨가며 기록하는 언어와
억새밭에 둥지를 튼 바람의 문자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넘기지 못한 한 장의 달력을
강 저편에 걸어두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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