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삶터를 파괴한 대형 댐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네 삶터를 파괴한 대형 댐을 어찌할 것인가'
  •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22.03.1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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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잘라놓고 어떤 꽃잎이 화려하게 피워나길 기대할 수 있나?

[계간 기록창고-칼럼] 열두번 째 문을 열면서
유경상(계간 기록창고 발행인)

안동시 운흥동 천리고가교 남단에서 안동시청 앞을 지나 도산서원, 도산면까지 이어지는 국도35호선 34.6km가 ‘퇴계로’ 이다. 옛길에는 지역의 역사와 인물, 문화가 저장돼 있지만 일반도로는 차량이 그냥 씽씽 달릴 뿐이다. 그러면서도 이 도로와 함께 흘렀던 유장했던 강물과 우뚝한 산줄기를 기억해 본다. 이 도로를 오가며 느끼는 감정 중 하나는 안동댐에 대한 지독한 원망이다. 작금의 댐은 녹조로 변질되어 죽음의 호수에 불과할 뿐이다.

청량산, 도산, 예안을 휘감으며 와룡, 안동 고을을 향해 수만 년간 흘렀던 수려하고 장엄했던 낙동강물과 이 강에 인접한 산록에서는 얼마나 처절하고도 숭고한 삶이 전개됐을까 하는 상상도를 그려보곤 했다. 강과 산록에 기대어 농사짓고 마을을 이룬 누대의 삶과 숱한 생명체의 명멸에 다가가다 보면 단절과 반동의 안동댐이 먼 훗날 어떻게 평가받을 지 자못 두려워진다.

그러다가 잠시 떠올린 단상 중 하나가 ‘고창 병산전투’이다. 10세기 후삼국의 명운을 건 통일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에 잠시 마음이 머물렀다.

1천여 전으로 돌아가 보자. 이곳은 930년 고려와 후백제가 한반도의 통합을 둘러싸고 자웅을 겨룬 고창전투의 주요 전장터였다. 지리에 밝은 삼태사가 고을 백성을 이끌고 고려를 도운 결과 대승을 거두었고, 고려 왕건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고창 병산전투가 발생하기 3년 전인 927년 후백제 견훤은 신라 경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였다. 구원병사 5천명을 거느리고 뒤늦게 도착한 고려 왕건은 돌아가는 후백제군을 공산(八公山) 동수(桐藪, 대구 동구 지묘동)에서 공격했으나 휘하 장군 김락, 신숭겸이 전사할 정도로 대패했다. 두 세력의 전세는 후백제로 기울었고 929년 12월 견훤은 문소성(현재 의성)을 공격해 점령하게 된다. 후백제군은 곧바로 북상하여 고창군(현재 안동)을 공격했고 이에 맞서 고려군은 봉화를 거쳐 안동으로 오기 위해 예안을 향했다.

예안에 도착한 왕건은 장수와 논의할 때 ‘만약 전쟁이 불리하며 어찌 하겠는가’ 묻는다. 만약 불리하면 미리 도주할 샛길을 닦아 놓자는 의견이 나오자 장군 유금필이 ‘빨리 구원하지 못하면 고창군의 3천여 명의 백성들은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빨리 진군해 견훤군을 공격하여 고창성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고려군은 와룡에 이르러 가수천 북쪽 병산에 주둔했고 후백제군은 남쪽 석산에 진영을 꾸렸다.

가수천을 경계로 두 군대가 남북으로 마주 보게 되었고 그 거리는 500보 정도였다고 한다. 가수천은 안동 와룡면 이상리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이하리를 거쳐 서지리 가수내 마을에 이르러 동쪽으로 굽이쳐 흐르다가 중가구리에서 가구천과 합해져 남쪽 진모래(長沙)의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병산과 석산, 가수천은 낙동강 본류와 잇닿아 있어서 병산전투가 실제로 전개된 장소들은 낙동강가와 이를 둘러싼 산지로 추측할 수 있다.

왜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앞선 927년의 공산전투는 동수(桐藪)에서 발생했다. 동수(桐藪)는 오동나무가 많은 강가 숲이다. 산록지대에서 자라는 숲을 임(林)이라고 했고, 물이 고여 택(澤)이 될 수 있는 곳에 형성된 숲에서 물이 없어진 상태를 수(藪)라고 했다. 수(藪)에는 짐승과 새가 서식․번식하는 곳이자 땔감을 얻는 장소로 임(林)보다 초목이 훨씬 우거졌다고 한다.

공산 동수전투에 이어 930년 고창전투 또한 병산 아래 가수천에서 벌어졌다. 936년 고려가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투도 일리천(一利川, 구미 낙동강 상류)에서 끝을 맺었다. 그렇다면 1천여 년 전 안동지역을 관통해 간 낙동강 물줄기는 어떤 상태였을까?

고려 말 조선 초에 숲의 상태는 산림천택(山林川澤), 산림천수(山林川藪), 산림수택(山林藪澤)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수(藪)는 넓고 빈 땅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전투를 치르는 요지로 충분했을 것이다. 넓고 평평한 땅에서는 군대가 서로 맞서 싸울 수 있었다. 2017년 김동진이 발간한《조선의 생태환경사》에서 위와 같은 대목을 발견해 흥미롭게 읽었다.

후삼국 통합을 위해 맞붙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곳은 습지와 무너미, 완만한 산록의 숲이었다. 당시까지 산림천택은 야생의 공간이자 영역이었다. 이러한 큰 강가의 습지와 무너미 땅, 산록의 숲에서 1만 명에서 10만 명 규모의 대전투가 벌어진 장면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후삼국에서 고려 건국으로 이어지던 10세기의 낙동강에는 다수의 집단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기엔 아직은 어려운 야생의 세계였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4세기 말 고려시기 한반도에서의 최대경작지는 약 100만ha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은 민본을 근본으로 삼으며 곡물 생산량을 높이는 중농정책을 추진했다. 황무지와 산림천택은 조선 건국 이후인 15세기부터 농경지로 개간이 본격화된다. 이 정책이 천방(川防)과 화전(火田)개발이다. 천방은 냇가를 막아 관개함으로써 하천에 연한 저습지와 무너미를 논으로 바꾸었고, 화전은 산록에 위치한 숲에 불을 질러 광범위한 땅을 새 경작지로 개간했다.

15~16세기 냇가를 중심으로 한 천방 중심의 논과 밭의 개간은 안동과 예안 일원의 사족을 크게 확장시켰다. 천방 개간으로 땅이 부족해지는 17세기 무렵부터는 산지에서의 화전개발이 급속하게 진행됐다. 이 전후에 안동고을 상류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서 지역에 새로운 땅을 일구어 낸 적정 규모의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또한 천방이 설치된 작은 지천에서는 다양한 물고기가 등장했다. 한반도 연안 바다에서 최상류까지 올라온 은어는 다른 지류에 비해 훨씬 컸기에 예안 일대에서 잡힌 은어는 진한 수박향과 함께 최고의 맛을 자랑했다. 마치 은어가 삼대(麻)같이 많이 잡혔다고 기록되고 있다.

안동부(安東府)가 위치한 지대도 마치 강물을 베고 있는 형국이었다. 낙동강과 반변천의 물은 생명수이지만 장마철에는 큰 해(害)가 되었다. 두 강물은 주기적으로 안동부성을 휩쓸었고 하류 풍산평야에 수마의 상처를 입혔다. 치수(治水)와 관개(灌漑)는 필수적이었다. 두 개의 큰 제방인 포항제(浦項堤, 낙동강 홍수를 막기 위해 임청각 밑 개목다리에서 옥야천을 지나 영호루 아래까지의 제방)와 송제(松堤, 반변천 물길을 막는 맛뜰 제방)에는 유실과 중수가 반복되었던 파괴와 건설의 시간이 녹아 있다. 송제비는 선어대 절벽 바위에 세워져 있다가 지금은 선어대 생태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관통해 흐르는 1천3백리 낙동강 상류유역인 안동 땅은 치수와 관련해 뿌리에 해당했다. 뿌리의 흉폐가 영남의 안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었다. 그러나 1976년 안동댐은 수 만년의 강과 인간의 역사를 물속에 생매장시켰다. 뿌리를 잘라놓고 어떤 꽃잎이 화려하게 피워나길 기대할 수 있을까 싶다. 남북으로 휘달리는 태백산맥과 남서의 소백산맥 가랑이 밑에 자리 잡은 산간벽지, 첩첩산중에서 오로지 낙동강과 그 지류를 생명수로 삼아 대동의 인문정신을 꽃피웠던 강의 문화와 역사는 안동댐과 임하댐으로 파괴되었다. 유일무이한 환경생태와 지역적 삶을 파괴한 안동댐과 임하댐을 어찌 할 것인가? 먼 훗날이라도 두 개의 댐이 사라지는 그날만이 온전한 역사의 복원이요 출발점이자 연결점이 될 것이다.

[위 기사는 계간 기록창고 12호(2021년 가을호) 칼럼으로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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