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영가로, '웅부문화거리'를 누가 사랑할까?
영혼 없는 영가로, '웅부문화거리'를 누가 사랑할까?
  • 유경상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22.04.2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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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안동역~웅부공원 300미터 도로 정비, 영가로에 어떤 역사 문화성이 담겨있나
그린라인, 블루라인 중심 생태통로, 휴식공간? 어느 시민 인정할까 정말 궁금

[기록창고, 열네 번째 문을 열면서]
유경상(계간기록창고 발행인)
유경상(계간기록창고 발행인)

근현대 로컬리티 기록화에 관심을 갖게 된 지 약 10여 년이 흘렀다. 로컬리티란 개념이 조금 어려운 것 같지만, 어느 특정한 장소성을 단순하게만 바라보는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 깃들어 있는 자연과 사람, 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로컬리티 인문학이나 로컬문화를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도 장소와 시간에 대해 입체성과 구체성을 확보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옛 안동역~웅부공원 도로 구간은 90여 년 전 안동시내 원도심 시발점이자 구심축이었다

안동에서 첫 생활을 시작한 게 열일곱 살(1982년)부터이니 40년이 흘렀다. 예천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운흥동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렸고 안기동 자취방에 짐을 풀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때로 부터이니 강산이 네 번 바뀐 긴 시간이다. 대학시절 밤기차로 청량리역이나 부전역으로 출발하면 어김없이 다시 안동역으로 돌아왔다. 어느 겨울 역 광장에 내리니 흰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던 기억은 훗날 ‘안동역’ 노랫말로 연결돼 나만의 서정과 서사로 남았다.

운흥동 옛 기차역과 웅부공원(옛 안동군청터) 중간쯤인 영가로에 사무실을 얻어 입주한 지 5년이다. 영가(永嘉)라는 안동의 옛 지명에서 따내어 도로명이 명명된 곳이다. 운흥동에서 동부동까지 연결하는 되는 이 도로전체 길이는 266m이며, 4차선으로 도로 폭은 약 19m이다.

이 일직선 거리는 약 300미터 가량 뻗어 있는데 지난 5년 간 무슨 공사를 한다며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한두 살씩 나이가 쌓이다보니 큰 생각이나 이상보다 눈앞에 펼쳐지는 사소한 일상에 기뻐하거나 분노하는 일이 더 자주 생긴다. 매년 하수관로 공사를 위해 도로 옆 거리를 파헤쳤지만 2020년을 전후해 이 도로가 웅부문화거리로 조성된다는 풍문이 돌았다.

약간의 기대감이 생겼다. 당시 지역언론에서도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아름다운 거리를 조성한다고 보도했다. 안동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나타내는 문화공간, 가로공원, 야관경관 조성을 계획한다는 것이었다. 친환경 보행로에 그린라인(녹지 및 수목식재), 블루라인(보행수로 및 수공간)을 조성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옛 안동역~웅부공원 도로 구간은 90여 년 전 안동시내 원도심을 조성할 때 등뼈와 같은 역할을 한 시발점이자 구심축이었기 때문에 이 도로가 품고 있는 여러 기억과 가치가 재해석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오십대 중반인 내 입장에서도 이 도로와 거리엔 많은 추억이 깔려 있다. 1980년대 중반이후 이 도로를 둘러싼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다가오는 편이다.

그 기대는 벗어났다. 먼저 허리둘레 크기의 은행나무들이 모조리 잘려 나갔다. 땡볕아래 시멘트보도블록을 걷는 동안 잠시지만 그늘을 만들어주던 나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작은 소나무가 식재되었고, 도로 중앙에는 폭이 2~3미터 되는 화단설치용 석재 블록라인이 깔렸다. 이를 ‘친환경보행로’이며 ‘그린라인과 블루라인’ 중심의 생태통로이자 휴식공간으로 인정할 시민이 몇 명이나 될까 싶었다. 정말 한숨이 저절로 나오기 시작했다. 26억 예산을 투자해 공사를 곧 끝낸다는 이 도로와 거리를 그 누가 상권활성화구역을 위한 생활도로로 인정할 지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작은 골목길도 나름의 역사와 사연이 깃들어 있는데, 로컬리티 부재의 거리로 망쳐 놓지는 말자

오늘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2년 전 폐점한 옛 안동역 광장 앞을 서성거리다가 웅부공원 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2020년 4월에 발간한 <안동역 90년의 역사-그곳에 역이 있었네>를 기억하며 역 광장에 서서 영남산을 바라봤다. 10대 소년시절 내가 살던 산골마을은 뒷산이 500미터가 넘었고 마을 건너 우뚝 솟은 봉우리는 700미터에 육박했다. 그러다보니 안동사람들이 영남산을 언급할 때 ‘어디야?’란 궁금증이 일었다. 나중에 안동 원도심을 배경으로 병풍처럼 둘러싼 야트막한 250여 미터 야산줄기가 영남산이란 걸 대충 알았을 뿐이다. 한반도의 작은 촌락들마저 배산임수(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로 터전을 잡았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안동원도심의 지세는 대단한 명당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 채는 것으로 내 아둔함을 인정했다.

1910년대와 1930년대 안동시가지 지도를 비교하며 도시공간구성의 변천을 살펴본 적이 있다. 김기철 박사 논문(안동 도시공간구성의 변천에 관한 연구/대구대,2014)에 따르면 “1910년대에는 시가지를 기준으로 북쪽은 주거지가 남쪽은 경작지가 분포하는 전통적인 도시공간구조를 가졌으나, 1930년대가 되면 추가적인 시가지도로의 개설과 안동역의 조성으로 남쪽으로 시가지가 확대되었다”고 사료했다. 안동시가지 도시계획도로의 시작은 1914년부터 시작돼 1930년대를 거치며 추가조성이 되었고, 1941년 시가지계획령에 의해 조성된 도로가 현재까지 안동원도심 주요 도로망을 형성했다고 분석했다.

1931년 예천~안동 경북선 구간이 개통되며 안동읍내 낙동강변에 들어선 ‘경북안동역’이 안동도시공간구성의 변화에 중심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안동역이 개통되며 영남산 아래 위치해 있던 기존 도심은 서쪽 평화동과 낙동강변까지 확장되었고, 역의 물동량 증가와 인구이동으로 상업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안동역에서 영남산 사이에 모든 공공시설이 이미 설립됐거나 설립이 추진되고 있다. 1934년 당시 공공시설을 살펴보면 안동역에서부터 도보로 5분~10분 거리에 ‘경찰서, 읍사무소, 우편국, 세무서, 군청, 법원지청, 전매국출장소, 도립병원’ 등이 위치했다. 교통중심인 안동역과 행정중심인 공공시설을 사이에 두고 상업공간화도 이뤄졌다. 1933년 ‘안동신시장’ 설치와 1934년 ‘안동교’ 준공은 상업과 교통의 큰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상징적인 코드이다.

현재 ‘홈플러스’ 부지에 1931년 10월16일 ‘경북안동역’이 영업을 개시한 후로부터 약 90년의 시간 속에는 안동원도심 변화와 발전의 궤적이 스며들어 있다. 1942년 중앙선(청량리~안동~경주) 개통식, 1950년 안동철도국 신설, 한국전쟁 때 파괴된 안동역사의 신축(1960)을 거쳐 1980년 말 마이카 전성시대가 도래하기까지 안동역과 안동군청 도로구간에는 안동인의 집단적 추억과 흔적이 스며있다. 분단시대 산물인 승공탑과 문화극장, 갈비골목으로 변한 경상섬유 공장터와 높다란 굴뚝, 1970~80년대 안동문화회관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주화의 숭고한 흔적을 고스란히 재생시키자는 게 아니다. 단지 몰역사적, 비장소성으로 점철시키는 단순한 도로정비사업을 웅부문화거리 조성이라는 허언으로 둘러대지는 말자는 거다.

거리를 차량 중심에서 보행자 중심으로 바꾼다는 걸 반대하는 게 아니다. 작은 골목길도 나름의 역사와 사연이 깃들어 있는데, 정신문화의 수도를 자처하는 이곳 안동의 근대성이 담긴 시가지 중심축을 난데없는 로컬리티 부재의 거리로 망쳐 놓지는 말자는 것이다. 크던 작던 도시에 모여 살며 함께 향유하는 공공시설과 SOC에 제발 온갖 재생사업이랍시고 철따라 부수고 베어내고 덧붙이는 영혼 없는 개발행위를 어찌할지 모르겠다. 영혼 없는 텅 빈 거리와 이 도시를 과연 어느 누가 사랑할까 걱정이 앞설 뿐이다.

[위 기사는 계간 기록창고 14호(2022년 봄호) 칼럼으로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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