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보] '그해 여름, 경북농민 고추제값받기 대투쟁 함성'
[화보] '그해 여름, 경북농민 고추제값받기 대투쟁 함성'
  • 유경상
  • 승인 2023.08.13 14: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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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영의 그때 그 풍경)

1988년 그 해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농산물제값받기운동

 

(사진/김복영, 글/유경상) = 1987년 12월 대선에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부는 외국농수산물 수입을 이유로 잎담배 종자 공급을 제한했다.

양담배 수입 불안 때문에 농민들은 대체작물로 고추를 심었다. 과잉생산은 필연적이었다.

건고추 600g에 2,500원 하던 것이 1,200원까지 폭락했다. 생산비의 3/1에도 못 미쳤고 흘린 땀을 무시당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생존권을 위한 당연한 요구였다. 고추 제값받기 투쟁이 터졌다. 8월 19일 경북의 오지(奧地) 영양에서부터 제1차 대회가 열렸다.

8월 20일 봉화, 8월 23일 예천 풍양, 9월 4일 영양 제2차 대회에선 2명이 구속된다.

봇물처럼 터진 농민시위는 청송 진보와 현서, 봉화 명호, 안동 길안, 의성 다인, 상주 사벌을 넘어서서 안동으로 집결되었다.

드디어 10월 2일 안동시군 고추 제값받기 대회에 5천여 명이 집결했다. 이날 안동역에서 대회를 마친 농민들은 안동군청 앞으로 몰려갔다.

최루탄이 터지고 각목과 곤봉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군청 유리창이 1백장 넘게 깨졌고 농민과 학생 다수가 부상을 당하며 29명이 연행되었다.

열흘 뒤 10월 12일, 안동에서 경북농민대회로 확대되었다. 11월 12일 제3차 농민대회를 치른 경북 북부권 농민들은 스스로 단결하기 위해 자주적 농민조직 건설에 착수했다.

  안동역 광장에 농민들이 집결했다.

안동역 시계탑 시침은 오전11시15분으로 기록했다.

“천만농민 단결하여 쌀생산비 보장받자”, “민주농협쟁취하자”, “고추제값받자”, “구속농민석방하라” 현수막 구호는 농민들의 절박한 희망이었다.

 

1988년 10월 2일 안동역 농민시위는 한국농민운동사에서 굵직한 한 획을 그었다.

고추제값받기 투쟁은 농산물생산비쟁취 투쟁으로 나아갔고, 농민생존권을 위한 대장정을 예고했다.

안동역광장에서 궐기대회를 마친 후 안동군청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시위대열은 대로를 점거했고 안동문화회관을 지나 군청을 향했다.

대규모 농민집회는 생존권을 갈구한 자발적 참여로 시작되었다.

농민의 분노어린 요구와 이해를 조직해 낸 농민운동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스며들어 있었다.

트럭 위에서 시위를 이끌던 활동가들은 그 후 어떠한 생애를 살았을까.

창공의 새들이 허공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듯 그들 생애 또한 무명(無名)이었다.

정치적인 구호까지 등장했고, 군청 앞마당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군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최루탄이 터졌다. 시내 곳곳에서 시위로 번졌다.

 

1988년 11월 12일까지 대규모 제3차 농산물제값받기투쟁은 계속되었다.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일직식당 간판은 그날을 기억할 것이다.

1960년부터 원도심의 중심이었던 안동역 광장은 전국과 지역의 이슈가 응집되고 발산되었던 우리 방식의 아고라 였다.

 

1988년 그 해 여름과 가을, 경북북부권을 뜨겁게 달궜던 농산물제값받기운동은 90년대 농민투쟁사에서 ‘아스팔트 농사’의 기원으로 명명된다.

각 시군에서 자주적 농민조직의 탄생을 알리는 서곡이 되었다.

 

[위 기사는 기록창고 18호(2023년 여름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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