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김방경을 다시본다’
‘충렬공 김방경을 다시본다’
  • 유길상
  • 승인 2012.04.23 16:1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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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29일, ‘충렬공 김방경 탄신 800주년 경모제전’ 열린다

 

▲충렬공 김방경 영정(1212~1300). 2009년 윤필구 화가 제작.

안동김씨대종회(회장 김봉회)는 안동시와 함께 충렬공 탄신 800주년을 맞아 오는 28일과 29일 2일간 ‘격동 800년, 희망천년 정란구국공신 김방경을 다시본다’라는 주제로 ‘충렬공 김방경 탄신 800주년 경모제전’을 개최한다.

이번 경모제전은 28일 오후 6시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에 위치한 공의 묘소인 음수재에서 고유제를 시작으로 다음날인 29일 오전 11시부터 안동 낙동강변 탈춤공연장에서 지역 유림단체를 비롯한 전국 각계 인사 약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렬공 김방경 탄신 800주년 경모제전 기념행사’가 개최된다.

충렬공 김방경 탄신 800주년 추모사업추진위원회는 “최근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역사왜곡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면서 “이러한 시기에 일본 정벌업무를 수행한 충렬공을 추모하는 제전을 거행함으로 저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충렬공의 구국충정(救國忠情)을 되새기는 한편 공의 위업(偉業)을 선양(宣揚)하고 위상(位相)을 제고(提高)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이번 행사의 의미를 밝혔다.

충렬공 김방경(이하 공)은 선안동김씨 시조인 신라 경순왕의 아들 김숙승의 후손으로 1212년 고려 강종1년에 한림학사 김효인의 아들로 태어나 무과에 급제했으며, 공의 나이 16세에 산원(散員), 식목녹사(式目錄事), 감찰어사를 거쳐 서북면 병마판관을 역임했다.

특히 병마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얻었으며, 원군의 침입에 군민을 규합해 맞서는 등 공을 인정받아 1263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승진, 상장군에 이르렀다.

당시 무신정권으로 인해 오랜 기간 정권은 극도로 혼란하고 백성은 피폐한 가운데 원의 침입으로 무신세력의 전세가 악화되자 1270년 무신 배중손 등이 또다시 새로운 왕으로 온(溫)을 추대하고 삼별초를 이끌어 난을 일으키는데, 이에 공은 원종의 명을 받들어 진압하기에 이른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정벌업무를 수행해 상락군 개국공이 됐으며 충선왕 때 벽상삼한삼중대광에 추증됐다.

공은 원의 간섭이 극에 달한 국란시기에 30여 년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친원파들의 모함과 지배욕으로부터 왕권을 지켜내는 큰 공을 세웠는데, 고려 왕실은 공에게 충렬왕과 같은 충렬(忠烈) 시호를 내리고 고려 제왕신위가 모셔진 신전에 신위를 모셨다. 안동김씨 문중에서는 공을 중시조로 삼고 세수(世數)를 정(定)하고 있다.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諱 方慶, 1212(강종1)~1300(충렬왕26)]
자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 신라 경순왕의 후손, 한림학사 효인(孝印)의 아들. 고종 때 음보로 16세에 산원(散員)이 되어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고, 감찰어사를 거쳐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이르렀다. 이때 몽고병이 침입하여 주민들과 함께 위도(葦島)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 등 농토를 개간, 농사를 짓게 했다.

▲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 능골에 충렬공 김방경의 음수재 재실과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1263년(원종 3)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승진하였고, 뒤에 상장군으로서 남경 유수로 좌천되었으나 전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서북 여러 성에서 진정이 있어 다시 서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를 거쳐 1269년(원종 10)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猖)을 세우자 원나라 황제 세조가 보낸 맹격도의 2천군사와 함께 임연을 치려고 동경에 이르렀으나, 왕이 복위된 것을 알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

1270년에 장군 배중손(裵仲孫)등이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삼별초(三別抄)를 이끌어 난을 일으켜 진도로 들어가 연안을 침범하자 이듬해 몽고의 장군 흔도(炘都)와 홍다구(洪茶丘)등과 함께 진도를 함락시키고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적장 김통정(金通精)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에 들어가서 성곽을 쌓고 항거하자, 1273년(원종 14)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원나라 장군 흔도,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또다시 제주도에 들어가 삼별초를 쳐서 이를 완전히 평정했다.

▲ 2009년 충렬공 묘소 사초 작업 시 출토된 묘지석(좌)과 탁본해 제작한 모사본(우) 

그 후 시중(侍中)이 되고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로부터 금안 등을 하사받고, 돌아와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더 받았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서 합포(合浦:馬山)에 정동행성을 두고, 일본을 정벌할 때 중군장으로 출정, 2만 5천명의 여원 연합군 과 함께 쓰시마섬(對馬島)을 친 다음 본토로 향하는 도중 풍랑으로 패하고 돌아왔다.

1278년에는 앞의 일본 정벌 중에 좌군수 김신이 익사할 때 이를 구하지 않았던 부사 위득유(韋得濡)를 파면하고, 진도의 삼별초를 공략할 때 전투를 소홀히 하고 재산을 약탈한 낭장 노진의(盧進義)의 가산을 몰수케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들로부터 '국왕과 원나라 공주 및 다루가치를 제거하고 강도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이에 흔도, 홍다구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고 나서 청도로 귀양 갔다가 충렬왕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1281년(충렬왕 7) 원나라가 다시 일본 정벌을 할 때 고려군 도원수로서 종군, 일본 이끼조를 거쳐 하까다에 이르러 승리를 거두었으나 태풍과 적의 기습을 당하여 참패하고 돌아왔다. 그 후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에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치사(致仕)하고, 상락군 개국공이 되었다.(上洛郡開國公-'郡'은 고려 五等爵의 하나. 종2품으로 국공(國公)의 아래. 식읍(食邑) 이천호(二千戶)를 봉하는데, 公은 식읍(食邑) 일천호(一千戶), 실봉(實封) 삼백호(三百戶)를 받음).

충선왕때 공은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 正一品)으로 추증됐으며, 89세에 훙(薨)하고 안동(安東)에 묘(墓)가 있다.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시다. 公을 안동김씨(安東金氏)에서는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세수(世數)를 정(定)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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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호 2012-04-25 23:50:22
고려 정란공신 충렬공 김방경 탄신 800주년 경모제전을 거행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더욱이 후손으로 자부심을 갖습니다. 현재와 같은 난세에 우리 할아버님이 계섰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