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중국에서 안중근 의사를 만나다-1
호국보훈의 달, 중국에서 안중근 의사를 만나다-1
  • 김길홍(전 국회의원)
  • 승인 2012.08.11 13: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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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김길홍 (안동사랑운동본부 이사장. 제13,14대 국회의원)

조국위한 巨人의 발자취,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로 꽃 피워야

여행을 하다보면 자칫 여기 저기 거쳐 지나가는 주마간산(走馬看山)의 경우는 아주 흔한 일이다. 문화와 풍속이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는 더욱 그러하기 십상이다. 기억에 남지 않는 주마간산의 여행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방문의 주제와 목적이 뚜렷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행 목적이 분명하면 추억과 의미도 오래 간직하게 된다.
대한민국 헌정회 일원으로 이번에 중국의 동북 3성을 여행한 것이 바로 그렇다. 헌정회 제3차 방문단의 일정은 조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벌였던 선조들이 신산(辛酸)의 세월을 보냈던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만주 현장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은 이번 여행의 핵심중의 하나였다. 여행길에 오른 때는 마침 호국보훈의 달 6월, 조국광복과 국토방위를 위해 산화한 선열의 얼을 기리는 현충의 달이 아닌가. 여행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 대한민국 헌정회 일원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중국으로 떠나던 6월 26일 오전, 인천 공항 출국장에서 3박4일 동안 함께 할 방문단원들이 오랜만에 정겨운 인사를 나누었다. 부지런하기로 소문 난 권해옥 헌정회 사무총장이 일부러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 일행을 기쁘게 해줬다. 31명의 헌정회원을 인솔할 단장으로 추대된 신상식 의원은 훌륭한 인품과 덕망이 높다는 주변의 평가에 걸맞게 동행할 단원들을 하나하나 친절하고 반갑게 맞이했다. 우리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수행한 헌정회 사무처 양면승 과장도 바쁘게 움직였다. 일행 가운데 2008년 중국 황산을 같이 갔던 변우량(회장),정병학,송두호,정호용,천용택,김의재,김정부(총무)의원 등 황인회 멤버도 다수 동행해서 기뻤다. 참가한 회원 대부분은 백발이 성성한 원로들, 세월의 흐름이 무상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러는 지팡이에 의지한 회원도 있었지만 80대의 정정하신 다섯분도 여로에 동반하셨다.

가뭄으로 농민들의 속이 타들어가고 제19대 국회가 개원되지 않아 정국이 불안한데다 헌정회의 연로지원금 지속여부가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시기여서 단원들의 마음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를 중점적으로 돌아보는 여행에 대한 기대가 컸던 탓에 출국장의 화제는 풍성했다. 바로 하루 전이 6.25전쟁 62주년을 맞는 날이었던 탓에 방문단 멤버 중 참전용사가 화제에 올랐다. 포천전투에 육사생도로 참전한 양창식 의원, 소대장으로 참여한 박익주, 당시 사병으로 참전한 정호용의원, 유엔군 통역관으로 참전한 최고령의 정병학 의원 등은 처절했던 당시를 회상하면서 후세대가 투철한 애국심으로 조국을 튼튼하게 지켜주기를 소망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오른 아시아나 비행기 기내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드넓은 한강과 서해는 6월의 아침 햇살을 받아 유난히도 반짝이고 아름다웠다. 첫 행선지는 중국 동북지역 항구도시 다렌 이었다. 한 시간 남짓 지나 중국 땅 다렌에 도착한 다음 곧바로 버스를 타고 안 의사가 투옥과 재판을 거쳐 교수형이 집행돼 순국하기 까지 마지막 144일 보냈던 뤼순의 형무소와 관동법원으로 향했다. 중국 당국이 관광용으로 보존하고 있는 듯 뤼순 감옥은 일제시대의 형무소 모습 그대로였다. 안 의사가 갇혔던 한 평 남짓한 독방이 있는가 하면 5〜6명을 수용하는 좀 더 큰 방도 있었다. 형무소 한쪽 끝에 자리 잡은 교수형 집행실도 보여 주었으나 안중근 의사의 형 집행실은 별도의 장소에 보존되어 있었다. 안 의사는 2층 규모가 좀 넓은 고등법원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일제는 1909년 10월 26일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격살이 세계사적 사건으로 이목을 끌자 국제여론이 두려워 많은 사람들이 방청할 수 있는 이 고등법원을 사용했다고 한다. 안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순국한 5평 남짓한 교수형 집행실에서 일행은 경건한 묵념을 올리며 한동안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교수형 의자, 휑하니 아래로 뚫린 마루바닥, 형 집행 전 대기하던 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 옆엔 안 의사의 흉상이 모셔져 있었고 화환과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흉상 주변의 벽에는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우국충정의 유묵(遺墨)들이 100여 점 전시되어 있었다. 한 획 한 획이 피를 토하는 듯 애국의 열정과 조국독립의 한이 서려있는 듯 느껴졌다.

▲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은 관동 고등법원.

안 의사 동상 옆에는 이곳에 한때 투옥됐던 신채호, 이회영 선생의 흉상도 나란히 자리 잡고 있어 참배의 기회를 가졌다. 중국 당국은 가까운 별도의 장소에 중․일 전쟁 당시 이곳에 잡혀왔던 중국 공산당 독립운동가의 사진과 유물도 전시하고 있었다. 중국이 뤼순 감옥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일본과의 항일투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도 한 몫을 한 듯 했다. 중국지도자 주은래수상이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해 “중․일 갑오전쟁 이후 중국 인민이 일제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은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으로 부터 시작했다”고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안 의사의 순국현장에서 우리는 아직도 안 의사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안 의사는 “내가 죽은 다음 나의 유골을 하얼빈 공원 옆에 묻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회복한 뒤 조국에 이장하기 바란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일제는 안 의사의 형을 집행한 뒤 사람 키보다 작은 나무통에 시신을 구겨 넣어 형무소 주변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아직도 안 의사의 유해는 찾지 못하고 있다. 서울 효창공원에 마련한 안 의사 묘소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허묘(虛墓)에 불과하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원통한 일인가.

안중근의사 사상에는 자유와 평등, 공존의 보편적 가치 있어 

우리는 뤼순감옥에서 짧지만 비장한 인생을 마감한 안 의사의 조국사랑과 거인의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거인의 위대함은 순국의 현장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안 의사는 순국 직전까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미완의 이 글에서 안 의사는 근대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궁극적으로는 인류평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안 의사는 실천방안으로 청․일․한 3국이 공동주체가 되어 독립․평등․공존을 기본으로 삼는 다국적 지역공동체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1세기 전 이미 미래의 동북아 정세를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한 혜안과 선견지명이 놀랍기만 하다. 안 의사의 사상과 주장에는 인류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자유․평등․공존의 보편적 가치가 포함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안목이 높게 평가될 것으로 보인다.

▲ 고등법원 방청석에서 재판과정을 설명듣고 있다.

안 의사가 짧은 인생을 마친 뤼순 감옥을 뒤로한 일행은 버스로 5시간 걸리는 북․중의 최단거리 국경인 단둥을 향했다. 버스 안에서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자기소개를 겸한 친목의 시간을 가졌다. 신상식 단장은 제일 먼저 이번 역사탐방 코스는 헌정회가 새로 개척한 것이라면서 건강하고 즐거우며 추억에 남는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했다. 김석준 간사의 사회로 회원 한사람씩 버스좌석 앞으로 나와 방문소감과 간단한 덕담을 나누었다. 헌정회의 직전 사무총장을 지낸 이윤수 의원이 요즘 시비가 되고 있는 연로지원금 존속의 타당성을 설득력 있게 조목조목 설명하자 모두들 감명을 받은 표정이었다.
늦은 저녁나절 어둠이 짙게 깔릴 때 단둥에 도착했다.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북한 쪽 강변은 희미한 전등이 띄엄띄엄 몇 개 보이는 적막강산인데 비해 중국 쪽 단둥은 휘황찬란한 건물에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을 발해 대조적이었다. 단둥은 10여 년 만에 한가한 농촌에서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공업, 무역 도시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개벽을 했지만 바로 2〜3백 미터 거리의 북한 쪽은 옛날 그대로라고 안내원이 얘기했다. 내일 밝은 날에 북한 쪽을 보기로 하고 압록강 변 중국 강변에 자리한 크라운 호텔에 여장을 풀고 첫 밤을 보냈다.

27일 새벽 5시 일찍 눈을 떴다. 60년대 중반 함께 정치부기자로 국회를 취재했던 신경식 의원과 룸메이트가 되어 이른 아침 같이 압록강 하류의 강변을 1시간동안 산책했다. 중국의 단둥과 북한의 신의주 사이를 흐르는 강폭은 2〜3백 미터에 불과했다. 사람과 건물과 나무가 손에 잡힐 듯했다. 단둥이 신흥공업도시인 탓에 강 주변은 오수로 지저분했다. 오물 냄새가 풍기는 것을 참으며 강 건너 북한 쪽을 살피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50년 대 우리가 보았던 낡은 건물이 띄엄띄엄 보일 뿐 인기척도 없고 고요했다. 죽음의 마을이라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압록강의 신의주, 위화도, 월량도를 유람선으로 돌아보는 일정을 시작했다. 새벽 산책 때와 달리 남루한 차림의 인부가 군데군데 보였다. 강변에는 낡은 경비정이 한 두 척 정박해 있었으나 군인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공장도 몇 개 보였으나 최근 전혀 가동되지 않은 듯 쓰레기만 쌓여 있었다. 중국 단둥과 북한 신의주 양안을 비교해 보면 번영과 빈곤, 활력과 정적이 교차했다. 북쪽은 빛과 기운을 잃은 동토의 땅 같았다.

허물어져가는 낡은 공장 벽에는“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선군 조선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라는 선전문구가 중국단둥 쪽을 향해 을씨년스럽게 붙어 있었다. 헐벗고 굶주린 북한 동포들이 남 보지 않는 곳에서도 그렇게 생각할까 하고 생각이 미치자 안쓰러운 마음이 지나갔다. 북한이 압록강 중간에 자리 잡은 위화도와 황금평을 경제특구로 개발한다고 수년전부터 별렀지만 아직 아무런 진척이 없다는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보니 북한도 사정이 매우 어려운 것 같았다. 40여분 동안 유람선을 타고 북한 국경을 최단거리에서 바라본 느낌은 답답함과 우울함 그 자체였다. 하루빨리 남북통일을 이루어 북한 동포들도 발전과 번영과 자유와 평화의 혜택을 누렸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했다.

3대의 독재세습과 인권유린으로 반세기를 지탱해온 북한, 정권은 존재하되 국민을 무시하는 땅, 국가이기 보다는 왕조이기를 바라는 나라, 주민에게는 희생을 강요하고 집권층은 선택된 제후이기를 바라는 나라, 지구촌의 일원이기를 거부하는 대신 불가능한 독자생존의 길을 걸어가는 어리석은 나라,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거부하고 부자유와 불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는 나라. 북한이 추구하는 탈지구적(脫地球的) 체제유지의 유산이 지금 북한의 모습이며 현실이다.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적인 삶을 위해 공산주의 동토(凍土)를 탈출하는 주민이 갈수록 증가하는 것은 북한이 자유의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여러 가지 신호 중의 하나이다. 이제 북한은 변해야 한다. 번영과 활력이 없는 곳에 자유와 번영과 인권의 씨앗은 자라지 않는다. (계속)

▲ 안중근 의사의 흉상앞에 선 필자.

 

▲ 뤼순감옥 내부 모습.

 

▲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집행당한 교수형 집행실.

 

▲ 신채호 선생의 유적도 함께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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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기 2013-06-30 08:01:19
박익주의원님 김의재의원님 변우량의원님 건강하신 모습 반갑습니다 변의원님은 고향선배 중학2년섭배시고 박익주의원님은 저가30대 성산동동장시절 장군님으로 동민이었으며 동대 동문회장도역임하셨고 저도 동문이기도하고 김의재으원님은 서울시 선배요상사였습니다 마포구청국장시절 동장으로 근무한인영있는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