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발해 지키지 못한 회한이 가슴을 쳤다-2
고구려와 발해 지키지 못한 회한이 가슴을 쳤다-2
  • 김길홍(전 국회의원)
  • 승인 2012.08.3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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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홍 전 국회의원 특별기고> 만주벌판에서 독립위해 풍찬노숙하던 선열을 기릴 때

▲ 대한민국 헌정회 일행이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중국이 조작하는 동북공정, 남북이 통일번영으로 대응해야

다음 일정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멋대로 왜곡하는 중국의 현장을 확인하는 아주 유쾌하지 못한 코스였다. 그곳도 중국과 북한이 폭 10여 미터의 시냇물이 경계를 이루는 국경지대였다. 중국이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이라고 우기고 있는 호산장성(虎山長城)의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이곳을 국립공원과 같은 관광단지로 조성하기 위해 토목, 건축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북한과 맞닿은 산꼭대기에서 평지에 이르기까지 만리장성과 같은 구도와 모습의 성곽이 이미 축조를 끝낸 상태였다. 성곽 끝에는 기와집 모양의 커다란 망루까지 지어놓았다. 우리의 조상들이 발해와 고구려를 세워 그 옛날 만주의 동북 3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차지하고 지배했던 엄연한 우리 땅이었지만 이곳의 역사를 조작하여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라고 우겨대는 중국의 주장에 어이가 없었다. 일행 모두는 이곳 호산장성과 북한 사이 폭 10 여 미터의 냇물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이곳을 둘러보고 울분을 금치 못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반을 중국에 넘겨주고 또한 만주의 동북 3성을 우리 땅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김일성, 김정일 등 북한 당국의 민족 자존심을 포기한 처사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솟을 뿐이다. 이곳 옛 성터는 중국의 사학자도 고구려성이라고 밝힌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을 자기네 속국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패권주의의 현장이자 증거였다. 강도 산도 들도 물도 나무도 사람도 모두 우리네 것과 똑 같은데도 우리의 옛 강토 고구려와 발해의 땅을 지키지 못한 회한이 가슴을 쳤다.

중국의 문호 린위탕(林語堂)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키워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문자, 만리장성, 체면(面子)가 그것이다. 1716년 완간된 강희자전(康熙字典)에 수록된 한자는 47,035자였다. 중국에서 세 가지 불가능한 것 가운데 하나가 문자를 다 알 수 없다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국토는 한반도의 44배, 동서 길이 5,200km 남북 길이 5,500km, 14개국과 접한 국경은 2,280km이다. 중국은 중화(中華)를 근본으로 삼고 四戎(사융)(東夷, 西戎, 南蠻, 北狄)을 거느린 대국사상을 고수해 온 나라다. 만리장성은 북쪽 오랑캐(北狄)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했다. 청․일 전쟁 이후 세계경영의 주도권을 서양에 빼앗겼던 중국은 20세기 후반 경쟁적 기술개발과 빠른 경제성장으로 미국과 함께 이른바 세계 2강의 지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중국은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와 문명을 그들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동북공정은 이 가운데 하나이다. 변방의 국가들이 뭐라고 하건 말건 그들은 중화의 방식대로 역사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남북한이 통일국가를 이루고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면 그들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동북공정을 밀어붙일 수 있었을 것인가. 북한은 지금이라고 통일의 길목으로 나서야 한다.

호산장성에서 다음 행선지인 심양으로 출발했다. 동북 3성 여행코스는 보통 하루 4〜5시간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데 일행의 대부분이 나이가 많은 분들이라 지루하고 힘들었다. 오후 늦게 심양에 도착해 보니 교통체증이 심하고 도심은 무질서하며 혼란스러웠다. 몇 번 방문해 봤지만 중국은 국토의 규모와 인구및 생산성 등 외형상으로는 경제대국이 틀림없으나 질서와 생활 등 의식 수준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직은 선진국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렉싱턴 호텔에서 이틀째 밤을 보내고 28일 아침 마지막 코스인 하얼빈으로 가기 위해 특급열차에 올랐다. 심양역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머리에 짐을 이고 어깨에 보따리를 진 수많은 인파가 떼를 지어 무질서하게 몰려들었다. 마치 1950년대 우리들이 피난 가는 열차에 밀치고 헤치며 오르는 광경을 연상하게 했다. 새 역사를 신축, 수리중이어서 1킬로 정도 걸어 새마을호와 비슷한 수준의 기차를 탔다. 여행시간은 4시간 반 정도, 달리는 열차 양쪽 차창 밖으로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광활한 만주벌판의 옥수수 밭이 눈에 들어왔다. 만주 벌판의 푸른 옥수수 밭을 보며 비를 기다리는 한국의 농민들을 생각했다. 그 옛날 광복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선조들이 이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하는 간난의 세월을 견디며 조국의 독립과 애국애족의 열정을 불태우던 고통과 각고의 설움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기차는 지루하게 달렸으나 중국 사정에 밝은 홍희표 의원이 동북 3성의 역사를 설명해 준데다 장영철,김정부의원의 익살과 젊은 축에 드는 곽성문, 박상희 의원 등의 잔심부름과 재미있는 얘기는 그만큼 지루함을 덜게 했다.

점심나절 러시아 냄새가 물씬 풍기는 흑룡강변에 위치한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곳은 1800년대부터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역사가 오래된 도시여서 그런지 도시의 배치와 질서는 단둥이나 심양에 비해 비교적 짜임새가 돋보였다. 우리는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사 플랫폼에서 한국침탈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역사적인 현장에 섰다.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세계만방에 알린 감격의 격살현장은 플랫폼 바닥에 조그맣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곳이 우리 땅이었으면 벌써 성역화 되었을 역사, 그 곳을 무심한 타국의 승객들만 떼 지어 오가고 있어 안타까웠다.

이회영 선생의 일대기가 기록된 벽 사진.

개인적으론 조상의 독립 얼 서린 땅 100년 만에 찾아 감회

늦은 점심을 먹고 하얼빈 시내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우리 동포들이 성금을 모아 7층 규모의 건물을 매입한 조선민족예술관 2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안 의사의 일대기를 사진과 기록으로 잘 정리한 전시물을 관람하면서 이국땅에서 후손들에게 민족혼을 되살려서 조국을 기억하게 하는 우리 동포들의 조국애를 읽는 것 같아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얼빈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는 12만 명 정도라고 한다. 독립투사 1세대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시신을 이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화장하여 송화강에 뿌려 그 재가 흑룡강과 러시아를 거쳐 동해로 흘러 조국에 다다르기를 원했다고 한다. 꿈에도 잊지 못하는 조국을 향한 독립투사들의 애국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기념관 별실에서 현지 동포들이 제작한 이토 사살 장면, 체포 순간, 조사 장면, 유필묵, 교수형 직전 모습 등을 담은 안 의사의 일대기 동영상을 관람했다. 이어 안 의사 동상 앞에서 일행은 엄숙하게 묵념을 올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상식 단장은 기념관에 성금을 전달하고 방명록에 “안중근 의사 만세!”라고 서명했다.
하얼빈 안 의사 기념관 방문을 끝으로 헌정회 역사탐방의 공식 일정을 무사히 마친 일행은 공항을 떠나 29일 오후 6시 인천공항으로 모두 건강하게 귀국했다.

어떤 여행이든 일정, 동반자, 잠자리, 식사 등이 잘 맞아야 오래 기억에 남는다. 대체로 연로한 분들이 많이 참여해 장시간 승차, 도보 관람 코스, 현지식 식사 등에 불편함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했었지만 사고나 해프닝 없이 시간도 잘 지키시고 협조해 주셔서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현지의 시내관광 코스는 간혹 생략하기도 했지만 안 의사 유적지 탐방과 북․중 국경지대 시찰, 중국의 역사왜곡 현장 답사 등은 예정대로 완전히 소화했다. 나라에 헌신 봉사한 원로 정치인답게 우리들은 호국보훈의 애국심과 민족자존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고구려, 발해가 다스렸던 동북 3성의 옛 우리 국토를 새롭게 되돌아보는 헌정회 역사탐방의 원래 목적에 충실했다고 자부한다.

▲ 신의주와 단둥을 이어주던 지금은 끊어진 철교.

역사탐방을 기록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이번 여행은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1910년부터 1914년 사이 나의 조부(金秉大)께서는 고향인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 마을(의성김씨 집성촌)의 집안 어른이신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 선생과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내신 안동 탑골의 석주 이상룡 선생 등과 함께 식솔들을 거느리고 안동을 떠나 만주로 함께 망명하셨던 만주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분들이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만리타국인 길림성 통화현과 유하현에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각고의 세월을 보내셨던 이역 땅을 100년만에 찾아 봤다. 당시는 삭풍이 몰아쳤던 허허벌판이었을 황량한 만주 땅, 그곳을 선열들께서 돌아가신 후 뒤늦게 찾아보았으니 조상에 대한 그리움과 감회가 어찌 남다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기행은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조상의 발자취를 뒤늦게나마 찾아 보았으니 그리움과 감회가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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