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쟁의 고장 연변에서 따뜻한 동포애를 느끼다’
‘항일투쟁의 고장 연변에서 따뜻한 동포애를 느끼다’
  • 김경숙
  • 승인 2012.09.2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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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안동문인협회회원·시인-제2회 중국 연변 이육사 문학제를 다녀와서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끝임 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梅花)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 (曠野) / 이육사 -

▲수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대성중학교' 앞에서

연변에서 열리는 이육사 문학제를 위하여 3박4일(2012년 9월 10일~9월13일)일정으로 조영일이육사문학관장을 비롯해 육사선생의 따님 이옥비여사님과 문인, 사진작가, 기자들이 안동을 출발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가는 길이라 그런지 설렌다거나 궁금하다거나 그런 부분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태풍으로 일기가 고르지 않아 연변의 날씨가 어떨지 생각만 가득했다. 인천공항에서 연길 공항까지 두 시간, 한국과의 시차가 한 시간 늦다는 것 외에는 연변의 시내풍경은 높은 가을 하늘과 중국의 소수 민족 정책으로 인해 친근한 한글 간판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장거리여행에 잠을 설친 일행 17명은 잠시 숨을 돌리고 연변과학기술대학교로 이동하여 문예작품공모전 시상식과 시낭송을 겸한 학술발표대회에 참석하여 학생들을 격려했다.

한족과 조선족이 어울어져 사는 인구 60만정도 되는 도시 연변엔 국가에서 운영하는 연변대학교, 고려대학교, 그리고 연변과학기술대학교가 있는데 중국에 있는 삼성이나 현대에 100% 취업하는 학교는 연변과학기술대학교란 이야기를 현지에서 주민들로부터 들었다.

학생 수는 1800명 정도이고 그 중 한국에서 온 학생이 100여명 있다고 한다. 연변과학기술대학교는 조선족 공동묘지에 세운 학교였다. 학교 내에 있는 교회도 원래는 화장장이었는데 그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고 했다.

저녁에는 연길작가협회가 주관하는 환영만찬에 초대를 받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감격스러워 했고 어디에 살건, 국적이 어느 나라에 있든, 지금처럼 민족과 조상을 기린다면 우리 민족은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다.

백일장에 입상한 학생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그들은 깍듯이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고 한국에 꼭 한번 가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신 김진호 교장선생님께서는 자신의 명함을 건네시며 안동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내가 부자는 아니지만 숙식은 제공 해 주마” 라는 약속을 하셨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연변의 벼룩시장.

이틑날 연변의 벼룩시장을 찾았다. 벼룩시장은 새벽4시부터 오전 8시까지 장이 서는데 사진작가를 앞세우고 길을 나섰다. 뉴스를 통한 중국인들의 장기적출 등 등 소문이 있는 만큼 두려움도 있었다. 강변에는 중국무술로 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삼삼오오 오가는 행인들이 많아지나 했더니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큰 장이 보였다. 먹거리는 물론이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나열되어있었고 서로 흥정하는 모습들이 사람 사는 곳이었다.

귀에 익은 음악이 들려 돌아보니 신유의 ‘시계바늘’이 흐르고 있었고, 강병두사진작가는 오래된 카메라를 구입하고 유길상기자와 나는 좌판에 팔고 있는 헌 책을 몇 권 샀다. 환영만찬에 함께한 안병렬 교수님이 쓰신 책이라 더 반가웠다. 국립 안동대학교 국학부교수, 인문대학장으로 재직 중 1999년 2월 뜻한 바 있어 중국 연변으로와 과학기술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계시다는 안병렬 교수, 일흔이 넘으신 연세에도 깨끗한 용모와 말씀은 저절로 숙연해지는 인품의 어르신이셨다. 그날 밤, 피곤하지만 잠을 쫓으며 읽어 내려갔다. “무식하므로 자긍심이 없고 자긍심이 없으므로 비굴해지고 비굴해지니 추해졌다”고 ....세종대왕을 모르는 우리 동포들, 비록 우리말을 쓰고 우리글을 안다고 한들 거기 혼이 빠진다면 그 말과 글이 무슨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인지를 열변하고 있었다.

항일 투쟁의 기지이며 오늘날에는 독립투사와 유민들의 애환이 역사 속에 배어 있는 유서 깊은 고장 연변에서 안교수는 중국 조선족 청년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주고 있었다.

현재도 미래도 아름다운 꿈을 갖고 부지런히 실현하는 꿈나무들을 양성하는 “안교수 같은 분은 나라를 위해 사시는 분이시다” 라고 말하고 싶다.

▲백두산 천지 물의 유일한 출구인 웅장한 장백폭포.

백두산을 향해 계속 산으로 산으로만 높게 달렸고 우리 일행은 ‘선구자’를 부르며 일송정과 해란강을 기억했다. 쭉쭉 뻗은 낙엽송, 미끈한 자작나무, 옆으로 한 눈 팔지 않고 위로만 치닫는 그 기개가 군자 같고 그 무리들은 우리를 친구해 주었다. 길가 휴게소에서 장뇌삼 구경도 하고 옥수수도 사먹었다. 중국의 공용화장실은 참 불편했지만 생리적인 현상은 해결을 해야 하니까 참아야만 했고, “흰 머리 산”이란 신령스런 이름을 가진, 백두산 정상에 내가 서 있었다. 해발 2000미터가 훨씬 넘는 이 높은 산 위에 못이 있고, 그러므로 하늘 못, 천지라 부른다. 맑은 날씨에 깨끗한 천지를 확인했다. 웅장한 장백폭포!!

▲백두산 천지-작년에 이어 올해도 보는 행운을 잡았다.

백두산 천지 물의 유일한 출구로서 1,257미터의 긴 여행을 거쳐 여기와 떨어지는 것이라 했다. 맑은 물이 세상으로 떨어지기 위해 그렇게 긴 수련을 쌓는 것을, 오늘 세상에는 날뛰는 무리들이 너무 많아 세상을 흐리게만 하는데 여기 와서 겸허히 이 수련의 긴 과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윤동주 시인의 생가에서 일행들이 함께 기념촬영.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윤동주(尹東柱)-

▲윤동주 시인이 공부한 옛 대성중학교 교실.

용정중학교를 방문하고 윤동주의 고향 용정, 생가 정면4칸 기와집의 본채와 그 옆의 곶간채 옆에서 우리는 스물아홉에 죽은 젊은 시인을 이야기 했다.

굽이굽이 두만강을 따라 버스는 달리고 길가의 수양버들은 우리의 70년대를 연상케 했고 우리는 뗏목을 타고 두만강을 오르내렸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강물이 흐렸다. 우리의 마음도 함께 흐렸다. 짧은 일정을 마무리하고 안동으로 돌아 왔을 땐 같은 민족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지 못하고 가지 못하는 아린 가슴이 따라왔다.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철교.

그리고 자비를 들여 이번 행사에 동행한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와 조영일 이육사문학관장님과 이옥비여사님의 문학관에 대한 열정과 그 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두 번째 이육사 문학제 행사에 동참하면서 행정기관에서의 많은 관심과 지원도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육사의 민족정신과, 시인의 의식세계를 알리는 이육사 문학관이 활동할 수 있도록 첫 단추를 꿰어준 안동 간고등어 회사에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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