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시인으로 살아가는 길
이 시대에 시인으로 살아가는 길
  • 이위발(시인,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 승인 2013.11.18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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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위발(시인ㆍ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뉴스를 보다가 눈을 감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습니다. 베스트셀러 시인이었던 그가 자신이 가르치던 여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해당 교육청이 학교법인에 파면조치를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시를 통해 독자와 삶의 깊이를 공유하는 이 시대의 시인들은 기본적인 덕목과 도덕적인 삶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 이 사회의 통념입니다. 시인들은 시인이라는 말 한마디에 위로를 삼고 시인으로서 일생을 영위해 갑니다. 시인으로 산다는 건 시인의 권리이자 당당함이지만 그 안엔 도덕적인 의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외롭지만 외롭지 않게 살아가려 애를 씁니다. 시가 있다는 존재만으로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시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뉴스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트위터에 올라 온 글들입니다. “시심을 더럽히는 시인이란 자들! 말장난으로 대중을 속여 시인이란 타이틀을 달고...인간의 명예를 더럽히고”있다. “진로문제로 고민하던 A양을 격려하기 위해 뽀뽀를 두세 차례 했다며, 성적인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는데, 격려를 왜 뽀뽀로 하니!” 란 댓글들이 쉴새없이 올라왔습니다.

시인이란 유일하게 사람인(人)자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소설가, 수필가, 작가 중에서 오직 인간이어야 하는 자가 시인입니다. 시대의 아픔을 시로서 이야기하고,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줄 아는 그런 눈을 가져야 하고, 사물의 존재를 들추어내는 재주가 있는 것도 시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어떤 타협에도 줏대와 진실성이 있어야 하며, 누군가의 눈치를 의식해서 글을 쓰지 말아야 하며, 전율로 통과되지 않는 시는 태워 버려야 하는 것이 시인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 저 자신도 시인으로서 정도(正道)를 걷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가기위해 시인이기를 위로하고 어루만지며 달랠 뿐입니다. 올해로 문단에 등단한 지 이십년이 되었습니다. 시인으로서 첫발을 내딛던 날이 떠오릅니다. 문단에 머리를 처음 올리던 날, 그날의 주인공이었던 제가 늦게 참석하는 바람에 꽃다발과 선물을 선배 시인으로부터 받았던 적이 기억납니다. 그날을 잊고 싶지만 저에겐 지워지지 않는 아픔의 추억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존경하던 대 선배인 김춘수, 김종길, 김남조 시인들 앞에서 문예지 주간인 스승으로부터 들었던 죽비 같은 말이 가슴에 아직도 남아 맴돌고 있습니다.

“시인은 절대로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하며, 글에 대한 책임을 질줄 알아야 하며, 시인이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이름을 먼저 앞세우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큰 업적은 남길 수는 있지만 정작 자신을 거짓으로 위장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그 능력으로 사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최고가 되기 위해 뛰는 사람은 뜨거운 열정은 있을 수 있지만, 가슴은 경직되기 쉽습니다. 상담자의 옷을 입으면 상대의 문제를 같이 나눌 수는 있지만, 상대를 살리고서 자신은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인생에서 성공하지 않아도, 실패를 해도, 상처를 받아도, 맑은 시를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옷을 입고 살 때에는 아픔을 학대해야 하지만, 시를 쓰는 순간은 아픔의 친구에게 귀한 언어의 옷을 지어줄 수도 있습니다.

고은 시인에게 시를 왜 쓰냐고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의 답도 시는 누구의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우애(友愛)를 삶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일반적 우정이 아닌, 하나의 사유 체계로 개념화한 의미로서 말입니다. 옛날에 문학은 교사 역할을 했지만 난 그저 누구의 친구, 진실과 비애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시인은 타인의 가슴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인이란 세 살 때부터 남을 위해서 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자(他者)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이렇듯 시인의 길은 타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시어로서 치유해주는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때론 친구가 되고, 누이가 되고, 형제가 되고, 부모가 되어 시어로서 사랑을 나누어 주는 언어전도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선 자신의 욕망부터 버려야 합니다.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 우(偶)를 범하는 시인이 이 시대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길 바랍니다. 누군가 “아이보다 훌륭한 시인은 없다고 했습니다.” 아이 같은 시선을 가진 시어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의 시인으로 살아가는 그 길을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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