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어떻게 미래 준비하느냐 문제다”
“교양? 어떻게 미래 준비하느냐 문제다”
  • 대담:김희철,이임태/정리:이임태
  • 승인 2015.01.13 22: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유 후배들 미래지향적 유림활동 이어갔으면
[인터뷰-김원길(73)안동청년유도회 초대회장]

안동청년유도회에서 발간하는 소식지 [進德修業] 2014년 1월호에 게재된 인터뷰 '초대석' 내용을 글쓴이의 허락아래 다시한번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교양이란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느냐의 문제”
-청유 후배들 미래지향적 유림활동 이어갔으면

김원길(73) 안동청년유도회 초대회장을 만났다. 그는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넘치는 아이디어가 여전했고, 원로답게 사안마다 제시하는 방향이나 철학이 뚜렷했다. 유익한 대화였다. 대담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원문을 최대한 살려서 싣는다. (대담:김희철·이임태, 정리:이임태)

▲ 김원길 (안동청년유도회 초대회장, 지례창작예술촌 촌장)


-오랜만에 뵙는다. 건강은 좋은지, 근황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건강은 전반적으로 양호하다. 최근 좋은 일이 있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는데, 10여 년 전 우리집에 샌프란시스코 사람들 다녀간 적이 있다. 그날 공연도 음식도 호평을 받았는데 이 사람들이 화장실만은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들이 그걸 기억했다가 최근 ‘기브2아시아’라는 공익재단을 통해 화장실 고치라고 2만달러를 보내왔다.
그 전에 고택화장실 개보수 정부자금이 있어 받으려 했으나 자부담 20%(2천만 원 상당)가 벅차 망설이던 차였다. 이번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 지원금으로 자부담은 해결됐다. 종가가 옛날처럼 재물이 많지 않다. 임야와 같은 부동산만 좀 있는데 세금만 많이 내면서 사는 형편이다.”

-회장님은 본회 초대회장이기 전에 시인으로, 최근에도 시선집을 냈다.

“2년 전 고희기념 시선집을 냈다. 그때 집에서 연 출판축하연에 이참 한국관광공사사장 가족들도 오고 음악하는 사람들도 여럿 와서 재미있었다.
그 시선집에 있는 시들은 프랑스에서 번역 출판됐고 영어, 일어로도 번역이 됐다. 지난 6월 중국 상하이에서 ‘좋은아침’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김구정이라는 한국인을 만나 알고 지낸다. 좋은아침 잡지는 조선족과 동포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베이징판도 내고 광저우판도 내더라. 그 발행인 김구정씨에게 내 시집의 중국어 번역을 부탁했다. 그래서 한중대역시집이 탈고됐고 한국출판사냐 중국출판사냐를 저울질 중이다. 요즘은 누구라도 시집을 사서 읽지 않는다. 나는 우리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상대로 선물로 드리기도 하고 찾으면 판매도하다보니 잘 나가는 축이다. 벌써 4판을 찍었다.”

-개인적으로 ‘밸실할배 밥보자엔 밥풀도 많지’ 류의 시가 감동깊었다. 그 시대를 몸소 살아보지 못했지만, 가난과 인정의 아름다움 같은 게 마음에 와 닿았다. 이처럼 회장님 시는 두드러지게 토속적이면서 유가풍 이미지도 뚜렷하다. 이런 정서를 외국어로 번역하기엔 한계가 있지 않나?

“표현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시인의 입장에서는 번역자의 역량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데, 번역자가 시인의 마음이나 의도를 다 읽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의 경우 번역가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내 시를 번역가가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한쪽으로 밀어둔다든지 하면 몹시 서운할 때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희를 넘기셨다. 연로하신데 지금도 계속 시를 쓰는가?

“쓰지 않는다. 더 이상 써봐야 지금까지 쓴 시보다 더 잘 쓸 수 없는 데다, 무엇보다 내가 써야할 시는 이미 다 썼다고 본다. 시인이라고 하면 누에가 실을 뽑듯이 계속 시를 뽑아내는 줄 아는데 그렇지가 않다. 시라는 것은 계속 써봐야 자꾸 했던 말을 또 하는 것이라서 지루한 반복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시를 많이 쓰는 것은 안 써도 되는 걸 자꾸 쓰는 것과 같다. 작품 수가 적은 시인은 안 쓰면 안 되는 시를 쓰는 사람이고, 자꾸 뭔가를 많이 쓰는 시인들은 안 써도 되는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유명하다는 시인들도 작품수가 많아서 훌륭하다는 대접을 받는 게 아니다.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육사도 소월도 다 작품이 적다. 한편 한편이 주옥이 아니면 이 세상에 내놓을 이유가 없다. 내 작품이 140~150편 될 것 같다. 시선집도 99편으로 묶었다. 100편을 채우고 싶었지만 일부러 99편으로 마무리했다.”

-시를 쓰진 않지만 예술가로서, 또 유림으로서 활동이 왕성하다. 건강비결은 무엇인가?

“건강은 일단 술 담배를 적게 먹어야 한다.(웃음) 나는 건강을 좀 타고난 게 있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아주 야물다할까. 내가 42년생인데 8살 때 한국전쟁이 났다.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와 함께 서울서 안동까지 걸어서 피난을 내려왔다. 수영도 잘 하는데 꼭 헤엄실력보다는 잠수해서 3분을 버틸 수 있다. 3분이면 해녀 수준이다. 원래는 약골이었다. 키가 작고 마른버짐도 핀, 학교에서는 앞줄 3번이었다. 약골이다보니 어른께서 운동을 시켰다. 중학교때부터 태권도장, 기계체조선수로도 활동했다. 그런데 운동만하니 공부가 안되겠다고 판단해서 안동으로 전학을 해버렸다.”

-청유 선배들 말씀을 들어보면 수영과 함께 물고기 잡는 실력도 최고라고

“나야 뭐 지례 물가에 살았으니까. 당시 우리 동네에 전설적인 고기잡이 선수들이 있었다. 그들로부터 배운 것도 있고... 내가 물고기를 잘 잡긴 한다.(웃음)”

-화제를 청년유도회로 돌리자. 86년도에 회장님을 포함한 몇 분이 뜻을 모아 본회를 창립하셨는데

“그때 나하고 오석원 현 성균관대(당시 안동대) 교수, 이동수, 권오찬, 김시묘 등이 뜻을 모았고 87년도에 창립했다. 그 전에 나는 예총을 창립한 경험이 있었다. 서울 오가면서 조직갖추는 법 등을 배워가면서 사실상 내가 주도해 창립했다. 법인인 예총조직에 대해 꿰뚫고 있다보니 청년유도회 역시 준비위원회, 발기인대회에 이어 창립총회 등을 주도했다.
그때는 의무감과 자부심을 갖고 솔선수범하는 입장이었고 이제는 크게 주도적으로 나서고 싶지 않다. 물론 나는 시인이니까 예술 쪽엔 단연 나서고 싶지만, 유림 쪽에서는 크게 나서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냥 뒤에서 밀어주고 응원해주면서, 유가 자손의 자부심을 갖고 살면 된다. 욕심이 있다면 유림에서 만큼은 전국에서도 안동이 가장 앞서야한다는 것 정도다.”

-창립멤버로서 후배들이 꾸리고 있는 현재 청유를 어떻게 평가하나

“청년유도회는 현재 확실히 자리 잡고 제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격려해주고 싶다. 그런데 연세 높은 어른들이 좀 문제다.(웃음) 왜냐면 안동은 퇴계선생이 계시고 적통을 받은 유학의 고장이지만 사실 그 이후에 혁신유림운동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협동학교는 유학만 가지고 나라를 구할 수 없으니 신학문을 통해 나라를 구하자고 세워진 학교다.
그 협동학교의 설립자금이 무엇이었냐면 바로 호계서원 훼철된 재산으로 세웠다. 호계서원이 사라지고 그 재산으로 협동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호계서원의 일부 재산은 독립운동기념관 건립에도 쓰였다. 따라서 이제 호계서원은 한마디로 없어진 것이다. 이것은 흘러간 일이고, 한마디로 흘러간 물레방아다. 다시 부활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대원군이 어디 문화재 훼손범이 아니지 않은가. 이유가 있어서 서원들을 훼철한 것이고 당시 유림도 거기에 다 승복했다. 이제 호계서원은 없어졌다. 그리고 협동학교로, 독립운동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협동학교의 혁신유림 정신을 당시 가장 못 마땅해 한 세력들이 소위 보수꼴통들이다. 그래서 예천의 최모는 의병이라면서 협동학교 교감을 비롯해 세 명을 살해하는 등 그야말로 꼴통짓을 했다. 그래도 동산 류인식 선생 등은 굴복하지 않고 학교를 유지했고, 나중엔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혁신유림의 적통을 이어받고 그 정신을 배워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도리어 옛날로 돌아가려고 자꾸 서원을 세운다, 복원해야한다 운운하는 것은 번짓수가 한참 틀렸다. 재정도 없는데 왜 그래야 하나.”

-그렇다면 청유 창립목적도 보수유림보단 혁신유림의 정신을 잇고자함이었나?

“그렇다. 그 정신은 본회 취지문에 잘 나타난다. 그 취지문은 내가 작정하고 쓴 것인데 문덕 선생이 와서 보고 명문이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창립이후 퇴계, 학봉, 서애관련 사업을 다 제외한 채 주요 사업으로 현대사상강좌를 열었다.
퇴계, 학봉선생 사업은 하지말자. 이것은 안 해도 되는 사업이다라고 주장을 했었다. 왜냐하면 가만 둬도 각 문중에서 알아서 선양사업한다. 그렇다면 유도회는 뭘 하느냐, 정부인안동장씨 사업 등을 그때 꺼냈다. 또 미래학강의 등에 집중했다. 교양 또는 인문학이라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느냐의 문제이다. 근대사인물추모강연회도 퇴계라는 범주를 벗어난 좋은 사업이다.”


-근대사인물강연회가 다룬 인물 중에는 권오설 등 이데올로기 문제 등으로 저평가되거나, 아예 평가대상에서 제외됐던 분들이 많았다. 이분들에 대해 편견 없이 평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나 결단도 필요했을것 같다.

“그분들은 모두 정부조치에 의해 서훈을 받는 등 해금이 됐다. 물론 그 전에는 다루기가 부담스러웠던 측면이 있었다. 아무튼 안동 유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 강연회를 통해 많은 인물들이 역사 속에 등장하고 대중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그때 작은 시작으로 이제 정부인안동장씨가 전국적 지명도를 얻었다.

“문화적 안목이 있는 정치인이 시장이 되고 군수가 돼야한다. 모 시장 때 내가 두 가지를 챙겨라. 한옥(고택)을 챙기고 정부인안동장씨를 챙겨라 했더니 거들떠보지도 않더라. 지금 어떤가. 두 개 다 안동의 핵심 문화콘텐츠로 자리잡고 있지 않나”

-고택관련해서는 회장님이 고택문화보존회를 창립하는 등 관심이 지대했고 주도해왔다. 지금은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 및 정책이 만족할만한가?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다. 나는 수몰민이다. 생존을 위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몰 당시 마을에 한옥집은 10채가 넘는데 관리하려면 한자리에 옮겨야했다. 대충 옮겨놓고 나와서 대학교수 등 직장생활을 할까, 내가 나와버리면 이 집들이 제대로 지켜질까 등 고민이 있었다.
충주호 건설 당시 청풍김씨 이주촌에 가보니 빈집뿐이었다. 태화동으로 집단 이주한 광산김씨 외내 쪽도 마찬가지였다. 활용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했다. 그런데 예술촌 및 고택숙박체험업을 하자니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술장사를 하려는 것이냐”는 핀잔이 가까이에서부터 들려오기 일쑤였다. 그럴수록 고민이었다.
농토도 다 수몰돼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직장생활을 하려니 출퇴근이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 미국에 예술촌 형태의 마을들이 여러 곳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관련인물로부터 자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지례예술촌’이라는 상호로, 업종은 서비스업, 업태는 기타예술문화사업으로 2000년에 사업자를 낼 수 있었다. 국내에선 독보적으로 한 것이다. 그 전 1986년 내가 쓴 논문인데, 자화자찬 같지만 참고문헌 하나 없이 직접 쓴 게 있다. “수몰문화재 그 활용을 통한 생산적 보존방안”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예술촌을 하려는 목적을 분명히 밝힌바 있다.
모든 고택들이 예술촌을 할 수 없으니 다른 집은 형편에 따라 전통생활체험장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논문을 통해 제안했었다. 논문은 안동문화연구 창간호에 실렸는데 독자가 적다보니 시장 군수도 그 논문을 못보고 제대로 읽히지 못했다.
당시 경북도에 가서는 권영동씨와 함께 기안도 했다. 종가에서 민박, 숙박업을 한다하면 당장 집안에서 난리가 날 판이었다. 제사를 모셔야할 종부가 술장사나 하고 손님 이불이나 펴준다고들 할 거 아닌가.
그러니 숙박이란 말은 쓰지 말고 선조들이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잠자리에서 잤고, 어떻게 생활했는지 소위 ‘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전통문화체험장으로 고택을 활용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탈춤축제 초창기 내가 축제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에는 도지사 등이 동참한 자리에서 이창동 문화부장관과 만난 적이 있다. 그 때 이장관에게 임기 중 두 가지 할 일을 제시했는데 그 중 하나가 고택을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 이후 이 장관의 지원을 받아 고택문화보존회를 창립할 수 있었다.”

-지례예술촌 아이디어를 정부가 벤치마킹한 측면도 있다.

“맞다. 특히 이어령씨가 초대 문화부장관 때 내가 지례예술촌을 예술창작마을로 지정만 해달라는 계획서를 넣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어령씨가 좀 삿된 생각으로 내 아이디어를 가로챘던 것 같다. 어느날 보니까 지례예술촌만 배제한 채 낙안읍성 등 전국 관광지 6곳에 예술촌을 선정해서 발표해버리더라. 그런데 시끌벅적한 관광지에 창작을 위한 예술촌이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이 장관이 당시 사심이 좀 들어간 정책을 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고택활용의 요체는 아무래도 숙박체험이었다. 앞으로는 단순 숙박을 넘어서는 상품이 돼야하지 않겠는가?

“지역 국회의원이 ‘한 스테이’라는 걸 들고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내가 오래 전부터 했던 것이다. 관광공사에서도 ‘한옥스테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데 ‘옥’자 하나 빼서 ‘한스테이’라니. 뭐가 되겠는가. 벌써 이름에서부터 겹치고 혼선만 일어나는 그런 일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또 하나 ‘지트코리아’를 한다는 것이었는데, 지트란 사전적 의미로 짐승의 둥지, 잠자는 집을 뜻하는 것으로 프랑스의 도시사람이 농촌체험을 하고 묵어가는 ‘지트프랑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왔던 모양이다. 2차대전 이후 파괴된 프랑스의 도시인들이 지친 심신을 치유했던 것이 지트프랑스였다. 그러나 이것을 고택에서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프랑스 현지 그곳은 농가이고, 우리의 고택은 사적지이다. 농가에선 해도되지만 우리나라 농가는 그런걸 할만한 여유가 없다. 경북 북부는 더욱이 빈농이다.
그래서 고택을 가지고 지트코리아를 한다는데 말이 안된다. 지트라는 어원이 이미 짐승의 둥지다. 유럽의 명사 예를 들어 넬슨, 파스칼, 비스마르크 등 위인들의 집을 지트에 넣었던가. 당연히 우리도 퇴계, 율곡선생의 집을 지트코리아로 활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택은 더욱 품격을 높여줘야 한다. 왜 내가 가진 보배를 남이 가진 돌보다 못한 취급을 하려는가. 내가 예술촌을 하는 이유가 뭐겠나. 돈 벌고자 했다면 고택을 시내로 옮겨 불고기집을 했겠지 왜 예술촌을 하겠는가, 이것은 품격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고택활용의 미래적 방안이 무엇인가?

“요즘 외국인 관광객들 특히 중국 관광객들이 유교문화권으로 관광을 오면 잘 곳이 없다. 농암종택이든 치암고택이든 숙박할 수 있는 고택들이 있지만 객실이 크게 부족하다. 이런 유명 고택 옆에 한옥호텔을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아방궁같이 화려할 필요없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 내 경우도 현재 버스 한 대 정도 손님밖에 못 받는다. 두 대 오면 돌려보내야한다. 고택은 대부분 부지가 넓다. 주변환경과 기존 고택에 어울리게 한옥호텔을 지어 숙소를 늘리고 식당도 있으면 좋겠다. 이런 일이 성사된다면 고택활용의 새 전기가 열릴 것이고, 안동관광도 획기적으로 좋아질 것이다.
물론 고택이 사적지인 경우가 많고 문화재도 많기에 각종 허가 등 행정절차의 난관도 많을 것이다. 정부도 용도변경이 힘드니까 규제 없는 곳을 개발하고 만다. 문화재가 없는 북촌을 개발하고 전주한옥마을 등을 개발한다. 거긴 문화재가 아니다. 영주 선비촌도 마찬가지다. 안동문화관광단지 안에 지은 한옥호텔도 마찬가지다. 규제가 없으니 고민없이 그냥 막 지은 것이다. 이것은 가짜 한옥이다. 이런 곳에 외국인 관광객 수천명이 한꺼번에 다녀간다. 그들은 가짜 한옥을 보고 가짜 한옥에서 자고 간 것이다. 속은 것이다.
제대로 된 한옥은 옛날 것이 있어야 한다. 사당, 우물 등의 풍경과 살고 있는 주인의 생활상이 담겨야하는 것이다. 수백년 전 우리나라의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 가짜 한옥에서는 볼 수 없다.”

-호계서원 복원 관련 국학진흥원 부지, 안동댐 박물관 부근 부지 등을 두고 논란을 겪었다.

“서원은 제사와 강학이 목적이고 이를 위한 공간이다. 그러나 제사와 강학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서원은 도산서원이 유일하다. 대다수 서원이 제사는 되는데 강학이 안 된다. 한옥인 서원건물은 좁아서 현대적 강학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도산서원은 선비문화수련원을 별도로 지어 강학을 열고 있다. 호계서원을 복원한다면 수련원을 또 지어야한다. 돈이 생기지는 않고 들어가기만 한다. 앞으로 저런 거 자꾸 지어놓고 감당은 누가 하느냐. 우리나라에 이런 경우가 수두룩하다. 짓기만 지어놓고 그 이후가 지속가능하지가 않다.
임란기념관 문제도 마찬가지다. 전승기념관도 아니고 뭘 그리 자랑스러운 전쟁이라고 기념관을 짓는지 모르겠다. 임란기념관은 명칭 자체도 잘못됐다. 특히 정 지어야한다면 하나만 짓지 왜 두 개를 따로 지으려는지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
유교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어느 조사를 보니 안동은 1천500명이 유교인구라는데 그 중 700명이 여성이다. 남편 따라 유교인이 된 것이다. 이를 빼면 안동의 유교인구는 800명에 불과하다. 마구잡이로 짓고 복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유림활동을 하는 이들도 유권자다. 유림의 정치참여를 어떻게 보는지, 또 바른 방향성이 있다면 제시해달라.

“유교는 정치를 떠나면 안 된다. 원래 유교가 정치를 하게 돼있다. 그러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했지 않나. 수신이 안 된 사람이 자리만 좋아하고 또 차지한 그 자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드는 문제는 용납해선 안된다. 유림단체 수장이라는 성균관장이 구속돼서 저 지경이고 지금의 관장 역시 시원찮아 보인다. 엉망이다.
혁신유림도 정치였다. 나라 찾는 것도 정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지방선거하는데 나선다든지 하는 참으로 보기 싫고 잘못된 일이다. 유림이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 정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벼슬안하면서 정치하는 사람도 많다. 조언을 하는 것도 정치고, 말없이 본때를 보이는 것도 정치고. 유림의 말과 행동은 강직함보다도 조화로우면 좋겠다. 조화로운 비판과 대안제시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면 더할 나위 없다. 그게 아니라 그저 영달을 위해 정치판에 기웃거리는 태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 조화로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안동 유림들이 잊고 사는 게 한 가지 있다. 퇴계는 왜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했나. 왜 벼슬그만두고 학교를 설립해 학생을 가르쳤나. 조선시대 선비들은 소과를 통과해 자신의 학식만 증명한 뒤 대과를 그만둔 경우가 많았다. 대과를 하면 공무원이 되어서 임지로 가야하고 거기서 뭔가를 해야한다. 그런데 그게 싫은 거다. 안동 선비 중에는 생원이 많았다. 생원만 하고 더 안한거지. 그들은 화를 피하고 살았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기반으로 안빈낙도하고 조용하게 시골서 살면서 중국 도연명을 롤모델로 삼았다.
그런데 요즘은 도연명 본을 안 본다. 얼마나 많은 안동 선조들이 도연명을 본받았는데 왜 요즘은 본받으려하지 않는가.
안동과 도연명을 뗄 수 없는 관계다. 안동이야말로 도연명으로 꽉 차 있는 고장이다. 무릉이라는 지명, 여강서원, 호계서원, 귀래정, 도산서원과 도연폭포의 도자도 모두 도연명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 도연명의 삶이 바로 조화를 이룬 삶이다. 어딘가에 치우치지 않았다. 아주 궁벽한 곳에 산 것도 아니고 차마가 다니는 마을 안에 살았다.

-청년유도회원들은 젊다보니 아직은 사색이 부족한 경우도 많다.

“동연회(안동학자모임)가 청해서 이런 내용을 전한 적 있다. 안동은 도연명을 잊고 살고 있다. 어째서 못난 공민왕을 기리는 사당도 있으면서, 공민왕은 나라 잘지키지 못해서 피난 왔다간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나중엔 실정을 해서 형편없는 임금이었다.
공민왕 피난왔다 간 걸 가지고 뮤지컬 왕의나라니 놋다리밟기니 야단스럽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머물다간 것은 고작 50분이다. 서악사 관왕묘도 있다. 관왕묘는 임란 때 이여송의 지원군 잘 싸우라고 우리 돈 들여서 관운장 묘를 지은 사례다. 그걸 아직도 안동시에서 돈 줘가면서 지키고 있다. 그런데 도연명은 아무런 대접도 못받고 있다.
주자는 그런대로 대접받는다. 국학진흥원가면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퇴계선생은 학문은 주자지만 생활은 도연명이었다. 그런데 그 도연명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렸다.
청유가 새롭게 도연명을 조명하고 강연 등을 통해 그 조화로움을 본받기를 바란다. 바쁘고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들, 특히 젊은 청유회원들이 삶이 힘겨울 때는 도연명을 떠올리기 바란다. 한결 위안이 될 것이다.

-인상적인 말씀이다. 여담으로 요즘 일상에서 가장 낙이 뭔가

“도연명 얘기를 했지만 요즘은 조용하게 사는 것이 낙이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계실 때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른이 늘 병환을 앓으셨으니 긴장하고 수발하지 않을 수 없었지. 지금 집사람과 둘만 사니까 조용하게 사색하고 글쓰기가 그만이다. 예전엔 엽서에 답장한번 하기 힘들 정도로 바빴는데 지금은 편지에 답장을 다 할 정도로 여유가 있다. 그렇게 조용하게 사는 것이다. 찌릿찌릿하고 자극적인 것을 자꾸 찾으면 안 된다.(웃음)

-긴 시간 동안 격의 없이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린다.

“나도 고맙다. 마지막으로 진덕수업은 앞으로 독자수를 늘리는데 힘써 달라. 아무리 좋은 글을 싣더라도 읽어줄 이가 없으면 헛일 아닌가. 많은 독자가 읽고 공유할 수 있도록 편집진이 노력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