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만에 주역 해득해낸 우탁'
'한달만에 주역 해득해낸 우탁'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1.14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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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우탁과 역동서원>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 6]

우탁과 역동서원

생애와 사상

우탁(1261~1342) 선생은 단양인이다. 자는 탁부 또는 천장이다. 호는 백운당 혹은 역동선생으로 불려졌다. 회헌 안향의 문인이다. 17세인 1278년(충렬 4)에 향공진사가 되었으며, 이어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그 후, 1290년(충렬 16) 병과에 급제하여 영해사록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감찰규정, 진현관직제학을 역임했다.

대략의 연보인데 사실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탁 선생하면 금방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가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숭상받고 있다는 것과 국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같은 것이다. 특히 그가 이학의 조종으로 추앙받게 된 계기는 주역으로부터 유래되는데 전하는 설에 의하면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주역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때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선생이 한 달여 동안 연구하여 해득해 사람들이 그를 역동선생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반증은 우탁 또한 공자처럼 유학자로서 주역에 현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주의 의리학에도 정연하여 정심한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 그는 통달한 학문적 바탕을 가지고 천도와 인륜을 밝히고 사회적 폐풍을 개혁하려고 했을 것이다. 때문에 후학들의 경우 간혹 선생처럼 고려의 유학자를 대하면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곤혹스러움일 수밖에 없다.

알다시피 고려는 정치이념과 생활일반의 정체성이 이원구도로 되어 있었다. 아직 유교에서 철학으로 파생되어 나온 주자학이 일반화되지는 않았지만 관념과 현실의 상반된 상태는 백성을 유교적 정신에 입각하여 교화하여할 입장에 서 있었던 유학자에게는 상당한 정신적 괴리감일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러한 문제는 외래 종교인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토속신앙과 결합되는 과정에서 미신을 수용하는 결과를 낳았던 점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고려조 유생들에게 불교적 문제점에 대한 자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성리학을 중국으로부터 가져왔던 안향이나 성리학적 기반을 정착하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우탁에게 공통적인 화두였다. 때문에 안향이나 우탁 모두 문헌적 기록에 미신을 타파했거나 해야겠다는 의지를 담은 전설이나 시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우탁설화(禹卓說話)에 관해서는 고려사 열전에 기록이 보인다. 우탁이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부임하였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이 팔령신(八鈴神)을 섬기는 것을 보고 방울을 부수어서 바다에 빠뜨렸다. 팔령신 중에서 일곱을 없애자 나머지 하나가 살려달라고 빌어서 남겨두었는데 그 신이 지금 당고개 서낭이라고 한다. 여기서 보여지듯 우탁은 이미 신의 반열이거나 신마저 없애 버릴 수 있는 신묘한 인물로 묘사된다. 유교적 관점에서 미신을 타파한 것이 백성들이 보기에 두려움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비춰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주역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때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한 달여 동안 연구하여 해득하였고 역동선생은 정주의 의리학을 정연하여 통달한 학문적 바탕을 가지고 천도와 인륜을 밝히고 사회적 폐풍을 개혁하고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안동 예안 기산리로 낙향해 학문에 매진했다.

다음으로 살펴볼 부분은 우탁의 문학사적 위치나 의의인데 아래 3편의 한시는 모두 도학적 이념과 자연합일이라는 노장풍의 시들이다. 우탁이 훗날 퇴계를 위시한 사림들에 의해 깊이 받아들여지고 추앙받게 된 계기는 아마 그의 도학적 기풍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이룩하기 보단 물러나 지키고자 했던 조선조 선비들의 의식세계와 우탁의 은둔적 기질은 본질적으로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원류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 문학사에 농암 이현보가 이룩한 의의나 퇴계 이황의 도학적 기풍의 시들 또한 역동의 유풍을 전해 받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아래의 시는 우탁이 의정부 사인벼슬을 버리고 사인암에 머물며 주위 풍광을 노래한 시다.

단풍잎에 서리 내려 땅에 붉게 덜어지고/석담 위에 바람 부니 푸른 하늘 흔들리네/숲 사이 외로운 마을 멀리 보일락말락 하는데/구름 밖에 산봉우리만 연이어 들승날승하네.

그리고 사인암(舍人岩)에는 주역 28괘인 택풍대과(澤風大過)을 인용하여 선생의 당시 심경의 소회를 친필로 남겨놓았다. 여기서 대과(大過)란 즉, 음식을 과식한 것, 욕심이 과중한 것, 상하를 연결하는 중간에 장애물이 지나치게 강하여 의사소통이 안 되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중정을 닦아 덕을 베풀라는 말이다.

卓爾弗群(탁이불군): 탁아 너는 간사한 부류가 아니다.
確乎不拔(확호불발):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확고할 것이며
獨立不懼(독립불구): 홀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遯世无悶(돈세무민): 은둔함에도 번민함이 없을 것이다.

이 시조는 오늘날 전해져 내려오는 고시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늙음에 대한 한탄이 서려 있어 백발가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불더니 간 데 없다.
적은 듯 빌어다가 머리위에 불리고저
귀 밑의 해 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선비로서의 기개뿐만 아니라 유신, 관리로서의 면모도 전해져 온다. 충선왕 즉위 원년(1308년)에 우탁은 감찰규정으로 있었다. 왕이 부왕(충열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가까이 지내자 선생은 흰옷에 거적과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가 목숨을 걸고 인륜과 도덕을 간언했다.

 

 

이 일이 있고난 뒤 충선왕이 부끄러움을 느껴 다시는 선왕의 후궁과 통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로 벼슬을 사퇴하고 복주의 예안현(안동시 와룡면 선양동, 안동댐 건설로 수몰)으로 퇴거하였다. 그 뒤 충숙왕이 역동의 충의를 높이 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만년에 잠깐 성균관좨주직을 맡아 후진을 가르쳤다. 1342년(충혜왕 3)에 생을 마쳤다. 시호는 문희공이다.

역동서원 유래

현재 안동시 송천동 안동대학교 구내에 있는 역동서원은 안동 지방에서 가장 먼저 창건되었다. 지방 유림들이 우탁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선조3년(1570)에 서원에 위패를 모셨다. 이후, 숙종10년(1684)에 사액서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고종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피하지 못해 훼철되었다가 현 위치에 복원(1969년)되었다.

역동이라는 서원의 명칭은 우탁이 주역을 해득하여 강학한 것을 기념하여 퇴계가 붙인 이름이다. 원래 이 서원은 낙동강 상류인 <오다머>에서 창건되었으나 1868년에 훼철되었고, 지방 유림의 발기(1966년)로 현 위치에 복원(1969년)되었다. 서원의 옛터인 지삼의는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되었으며, 그 옛날 존 현양사의 전당이 창건되었던 역동 그 자리에 이건된 유허비는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허비란 어떤 분의 그곳에 살았던 옛 터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것인데 허(墟)는 터 허자이다. 경내의 건물로서 묘우인 상현사에는 고려성균관좨주단야우선생이라 쓰인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여기서 제주(祭酒)를 좨주로 읽은 것은 벼슬이름이기 때문이다.

묘우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 집이며, 지붕은 와가로써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묘우 앞에는 신문이 설치되어 있고 묘우 내부에는 마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제사, 교의, 향상이 놓여있다. 서원의 강당으로 쓰이는 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동서 양쪽에는 1칸의 협실을 내고 중앙 3칸은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 역동서원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전사청은 제수를 장만하여 보관하는 곳으로 1칸 건물이며, 주소는 서원을 수호하는 고지기가 거처하는 곳이다. 동,서재는 원생들이 기숙하면서 강학하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의 형태 는 맞배지붕이다. 동재는 사물재, 서재는 삼성재로 명명하고 있다. 선생은 이외에도 단암서원(단양), 단산서원(영해),구계서원(안동)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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