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 궤적엔 두 지역이 모두 고향일 뿐'
예천에서 태어나 안동사람 된 신현수 전 안동의료원장
'그의 삶 궤적엔 두 지역이 모두 고향일 뿐'
예천에서 태어나 안동사람 된 신현수 전 안동의료원장
  • 최봉근/권달우
  • 승인 2016.06.02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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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청년기자연합 기획연재]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11)

예천에서 태어나 안동사람 된 신현수 전 안동의료원장

 역사라는 거대한 강물의 끄트머리에 서서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남긴 흔적들을 뒤지는 작업이란 만만치가 않다. 개항기에 이어 항일투쟁, 해방과 한국전쟁, 군부독재와 민주화운동, 지방자치시대의 순으로 이어지는 근현대 100년의 역사는 아찔한 무게감으로 우리를 눌렀다. 그것도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안동과 예천만의 이야기를 다뤄야 한다니. 한 편의 영화와 같이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근현대 통사에 대한 이해력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도서관 자료실에서 사건의 인과와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기란 애초부터 무리였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들 나름의 역사에 관한 정의가 있다고들 한다. 역사란 모든 사람의 의견을 모아놓은 그 수만큼 정의를 가진다. 그래서 우린 한 사람의 역사에 집중했다. 예천에서 태어났지만 안동에 둥지를 튼, 해방 전에 태어나 태동하던 근대의 격변기를 온몸으로 헤치며 살아온, 현재는 영향력 있는 지역 리더로 안동과 예천에서 모두 인정받는 인물. 바로 신현수 전 안동의료원장이다.

▲1930년대 예천 남산에서 바라 본 예천읍내 전경. 예천읍 전체를 끼고 도는 한천(漢川)이 남쪽으로 흐르고, 뒤로 보이는 흑응산(黑鷹山.217m) 아래에는 단층 가옥 수백 채가 빼곡히 들어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사진 아래에서 보면 예천교를 따라 읍내 한 가운데로 신작로가 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읍내로 들어서려면 예천교를 건너야 했다. 자갈로 쌓아 놓은 둑이(사진 위), 가지런히 정비가 된(사진 아래) 것으로 보아 사진 위가 30년대 초반, 사진 아래가 30년대 후반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예천읍내는 군청 등 관공서와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읍내를 감싸고 있는 한천과 흑응산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사진제공 예천군청>

  ■ '하늘아래 첫 동네' 용두동..어린 시절의 예천

안동과 예천의 근대사를 단순 몇 장의 글들로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현대에 와서는 그나마 좀 나아진 편이지만, 당시 만해도 소시민들의 삶과 관련된 기록과 통계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구닥다리 자료와 기록 따윈 아예 제쳐두고, 누군가의 증언에 입각한 시간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신현수 전 안동의료원장(이하 신 원장)은 예천출신이면서 인근 안동땅에서 뿌리를 내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현재는 인덕의료재단 복주요양병원(안동)과 경도요양병원(예천)의 대표원장 직을 맡고 있다.

신 원장은 1939년생이다. 항일투쟁기 막바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때였다. 그해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쓰촨성 치장으로 이전했다. 그는 경북 예천군 예천읍 노하동에서 태어났다. 4살 되던 해에 동네에 큰 불이 나 외가인 상리면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부르는 용두동으로 가족 모두가 옮겨와 살았다. 고개 하나를 넘으면 충북 단양 땅이었다. 당시 어린 아이의 눈에도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을 뒤로 한 채 어머니의 등에 업혀 골목을 다급히 빠져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1945년에는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됐다. 신 원장은 그 이듬해인 1946년에 소학교에 입학했다. 현재의 예천동부초등학교(1943년 개교)이다. 당시 상리면에서 소학교까지는 험한 산길로 5㎞ 거리. 자전거도 흔하지 않았던 때라 상학기(1학기)가 끝날 때까지 입학식을 포함해 단 3일만 학교에 나갔다. 당시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다.

"할아버지가 예천 호명에서 농사를 크게 지었는데, 지역에선 유지 소리를 들었어요. 아마 동네에선 가장 잘 살았을 겁니다. 돈이 좀 있다 보니, 당시 '신 버버리'(말더듬이)라 불리던 독립운동가에게 꽤 오랫동안 활동비를 지원했었던 걸로 기억해요. 1945년 해방이 됐을 때 상리면 온 동네 어른들이 길거리로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고 기뻐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어린 나이에 뭣도 모른 채 불려나와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수없이 외쳤어요."

신 원장은 초등학교 1학년 구학기(2학기)때부턴 예천읍으로 다시 나와 학교를 다녔다. 각 학년마다 3~4개 반이 있었는데, 한 반에 70명 이상이 함께 수업을 듣기도 했다. 같은 반에 15살짜리 늦깎이 동기생도 있었다. 아버지는 읍내에서 벨벳(짧고 부드러운 솜털이 있는 고급원단)공장을 경영했다. 당시 예천 읍내에서 유일한 공업시설이었다. 당시만 해도 자동화된 방직기계가 없어 일일이 수작업으로 원단을 짜는 시절이었다. 공장직원 10여명이 주문 물량을 맞추기 위해 밤낮없이 일을 했다고 한다. 신 원장의 가족은 모두 6남매이다. 원래는 8남매였다. 5살 되던 해에 예천의 온 지역에 홍역이 돌았는데, 그때 두세 살 배기 여동생 둘을 동시에 잃었다. 당시에는 치료약도 없어서 홍역을 앓다가 죽은 아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1940년대 중반 예천에는 변변한 의료시설이 거의 없었다. 읍내에 겨우 일반의원 한 곳이 있었지만, 의과대학을 제대로 졸업한 전문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부족한 때였지만 예천사람들의 인심만큼은 후했다고 기억했다. 예천은 한자로 단술 예(醴), 샘 천(泉)자를 쓰는데, 물이 단술처럼 달고 맛이 좋다는 뜻이다. 예천의 '예(醴)'자는 닭 유(酉), 굽을 곡(曲), 콩 두(豆)가 합쳐진 한자다. 닭이 구부려 콩을 먹는 다는 뜻으로 평화와 풍요의 땅이었다. 읍내 노하리 예천읍사무소 앞에는 주천(酒泉)이라는 샘이 있었고, 수질 좋은 감천(甘泉)온천은 예나지금이나 예천의 자랑이었다.

▲1953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안동시가지 모습. 당시 전쟁으로 인해 안동 시내 중심가는 철저히 파괴됐고, 학교 시설도 대부분 부서지거나 불타버렸다. 한국전쟁 발발 후 우리 국군은 남하하는 북한군의 거센 공격을 피하기 위해 예천에서 함창으로 이동해 전투지경선을 재조정했다. 예천이 먼저 북한군에 점령당했고, 이어 며칠 뒤 안동도 함락됐다. 우리 국군은 안동교를 통해 낙동강-반변천-오십천 연변에 설정한 새 방어선으로 이동했다. 이후 북한군이 안동교를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하자 1950년 8월1일 오전 7시40분 무렵 안동교와 안동철교를 폭파했다. <사진제공 안동시청>

■ 아버지와 함께 한 피난생활, 전쟁 때 청도까지 피난

신 원장이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에 한국전쟁(1950.6.25)이 터졌다. 전쟁이 발발했지만 사람들은 이전처럼 38선의 충돌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원주·단양·풍기·영주 등 북쪽에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남하하자, 북부지역 사람들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피난을 준비했다. 안동의 경우 이미 7월 초부터 피난민들이 안동역을 통해 대구·부산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당시 안동역은 장비 및 보급 수송으로 업무가 10배 이상 늘어나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북한군 제12사단·제8사단의 남진은 계속됐다. 제1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예천에 주둔 중인 제18연대를 차출해 안동 동측 방어에 전용하려 했다. 이에 군단 직할 수색대를 예천방면으로 투입해 제18연대의 철수를 엄호하게 하는 한편, 안동방어를 위해 풍산 부근에 배치된 수도사단 제1연대를 안동 외곽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북한군 제8사단 제83연대는 예천을 먼저 탈취하고, 안동 풍산에 이르러 국군 제8사단 제21연대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국군 제1·2군단에게 8월1일까지 낙동강을 건너 남쪽에 교두보를 만들라고 명했다. 이어 7월29일 반격 준비를 위한 마지막 보루가 될 낙동강-반변천-오십천 연변의 새 방어선으로 철수하라고도 했다. 제8사단 제10연대·21연대는 안동교를 건넌 후 안동읍 북쪽 산에서 북한군이 도착해 기관총으로 안동교을 공격하자, 우리 국군은 교량을 폭파할 수밖에 없었다. 예천에 이어 안동이 점령당하면서 낙동강전선에서의 공방전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피난길에 나선 신 원장 가족은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예천과 의성의 접경지역인 다인면(의성)인근에 도착했을 때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두 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낙동강을 건널 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예천 집으로 돌려보내고, 아버지와 신 원장만 강변에 남아 수일 동안 배를 기다렸다. 그러다 우연히 지나가는 나룻배를 얻어 타고서야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당시 만해도 의성과 예천을 오가는 사람들은 나룻배를 이용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신 원장은 몇날며칠을 걸어 청도까지 내려갔다. 밤이 되면 큰 나무 아래에서 피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잠을 잤다. 총소리가 울려 퍼지면 혼비백산해 산으로 들로 뿔뿔이 흩어지곤 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국군에게 갑작스레 차출되면서, 신 원장은 혼자가 됐다. 아버지는 다시 올 때까지 무조건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 신 원장은 그동안 인근 과수원에서 사과를 싼 가격에 사서, 피난민들에게 팔아 겨우 허기를 면하기도 했다. 그러다 며칠 만에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는데 결국 피난을 포기하고 청도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그런 생활이 3개월 째 이어지던 어느 날, 유엔군이 인천으로 상륙작전을 펼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제 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예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그야말로 시체들이 즐비했다. 격전지를 지날 때, 소총을 든 채 그대로 엎어져 죽은 국군의 시체가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고 했다.

고향 집에 도착하니 좋아했던 소학교 여선생님이 인민재판을 받는다는 소식도 들렸다. 여선생님은 당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앳된 10대 소녀였다. 예천이 북한군에 점령당하면서 국민보도연맹 등에선 가입 실적이 저조하자 좌파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도 많이 가입시켰다. 단순가담자이거나 보도연맹이 어떠한 단체인지도 모르고 주변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 가입한 사람도 많았다. 운이 좋게도 여선생님은 풀려나게 됐지만,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원은 인민군에 동조·협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즉결 처형됐다고 한다. 그 숫자는 20~30만에 이르는 걸로 추산된다.

▲1972년 당시 안동신시장 전경. 사진 아래로 보이는 비포장 길은 성소병원에서 목성교 사거리로 이어진다. 사진 왼쪽으로 남문교회가 보이고, 우측 끝 흰색 건물이 대안극장이다. <사진제공 안동시청>

  ■ 60년대 폭설이 맺어준 안동과의 첫 인연, 걸어서 예천까지

1960년대 후반 신 원장이 대구 계성고등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 대구~예천 간 시외버스는 안동을 거쳐 갔다. 당시 안동시외버스터미널은 중소기업은행 안동지점 자리에 있었는데, 1969년에 운흥동으로 이전한 뒤 2008년에 지금의 송하동 지역으로 자리를 다시 옮겼다. 영업용 자동차가 안동에 들어온 것은 1926년경으로 당시 대구~안동 간을 2대의 자동차로 왕복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그 후 1930년대 들어선 안동~대구, 안동~예천, 안동~예안, 안동~내성 등 총노선 9개가 생겼다. 1일 운행횟수는 안동~대구가 하루 5회 왕복, 안동~예천이 하루 3회 왕복, 안동~의성이 1회 왕복 등이 전부였다. 1960년대 들어선 1930년대와 비교해 자동차가 100배(1228대)증가했고, 화물차도 10여배(158대)이상 늘었다. 수적인 증가뿐만 아니라 승합차·찝차·택시 등 다양한 종류의 자동차가 도입됐다.

"60년대 만해도 대구에서 안동, 예천까지 아스팔트 길 하나 없었어요. 대구에서 안동을 가려면 비포장도로를 3~4시간 달려야 겨우 도착했을 정도였죠. 비가 오는 날에는 차바퀴가 물웅덩이에 곧잘 빠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승객들이 모두 내려 차를 뒤에서 밀어야 했습니다. 한번은 안동에 폭설이 내려서 버스가 예천까지 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어요. 안동에 연고도 없는데다, 그땐 돈도 없을 때라서 친구 하나랑 눈 속을 밤새도록 걸어야 했지요. 그때는 길도 구불구불한 흙길이었습니다. 예천 집에 도착할 때는 벌써 날이 밝아오더라고요. 그 일이 안동과의 첫 인연인 셈이지요. 참 아련한 추억입니다"

▲1970년대 안동의료원(당시 도립안동병원) 수술실. 당시 수술실을 비롯해 모든 병실에 냉·난방 시설이 없어 여름에는 선풍기를, 겨울에는 연탄난로를 피웠다. 의료보험 도입 이전이라 예천 등 경북북부지역의 많은 환자들이 안동의료원에서 치료를 받았다.<사진제공 안동의료원>

 ■ 안동의료원과의 기막힌 두 번째 인연

신 원장은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 의술을 배웠다. 1950년대 후반 전국에서 의과대는 서울에 5곳, 광주와 대구에 각 1곳씩 총 7곳뿐이었다. 대구·경북에선 경북대학교가 유일했다. 의과대 4학년 당시 실습기간 동안 각 과를 두루 거치면서 자신의 적성을 알아낼 수 있었다. 수술실에서 메스 하나로 환자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외과의사가 되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1964년 대학 졸업 후 군의관으로 복무했고, 1967년에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안동과의 두 번째 인연은 1972년부터 시작됐다. 미국으로 가기 위해 현지 병원 2곳에 시험을 쳐 모두 합격통지서를 받아 놓은 상황이었다. 떠나기 전 잠깐 내려와 있었던 곳이 도립안동병원(현재 안동의료원)이었다. 6개월 뒤에 떠날 요량으로 대사관에서 인터뷰도 하고, 미국행 비행기 표까지 끊어 놓았다.

당시 안동의료원은 중환자실 포함 28개 병실을 갖추고 있었다. 그때는 경상북도가 아닌 국가에서 운영하던 시절이었다. 제대로 된 난방시설이 없어 겨울이 되면 병실마다 연탄난로를 피웠다. 수술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의료수준은 더욱 열악했다. 내과 전문의가 한 명 있었지만, 비교적 치료가 간단한 환자도 그저 대구의 큰 병원으로 보내기 일쑤였다. 그래서 신 원장은 당장 응급실 실장 직을 얻어 내원하는 모든 환자의 수술을 도맡았다. 그러다 수술 잘 한다는 입소문이 퍼졌고, 영주·예천·청송 등 경북북부 전역에서 환자가 몰리기 시작했다. 파리만 날리던 병원에 생기가 돌았다. 입원실에 침대를 하나씩 더 놔서 병상을 최대한으로 늘였고, 환자가 몰릴 때면 수술환자의 입원일을 일주일에서 1~2일로 줄여 수술 직후 곧바로 퇴원시켰을 정도였다.

당시 도립안동의료원은 가난하지만 수술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대부분 약값만 받고, 수술은 무료로 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런 이유에선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특히 많이 왔다. 그러다 미국 출국기한이 다가왔다. 내가 떠나면 이 지역 환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6개월간의 짧은 인연은 묘한 의무감으로 다가왔다. 미국행 결심을 자연스레 포기하게 됐다. 한 외과의사의 꿈은 깨졌을지 몰라도, 그 이후부턴 낙동강 다리를 건너 급하게 달리던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그 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안동도립병원 외과과장으로 막 일하게 된 첫해 5월이었어요. 젊은 부부가 18개월 된 어린 아이를 안고 진료실로 들어왔는데, 아이의 엉덩이 부분에 제 아이 머리 크기만 한 기형종이 달려있어 깜짝 놀랐죠. 그때가 1972년이니까, 의료보험이 시행되기 전이라 수술비가 엄청나게 비쌀 때였습니다. 도저히 대구나 서울 큰 병원으로 가보란 말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수술을 결정했습니다. 당시 도립병원 수준으로는 아이를 엎드려 마취할 수 있는 장비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아이에게 위스키를 먹이기로 했습니다. 아이에게 약간의 술을 마시게 하면 마취를 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이었어요. 물론 위험하기도 하고, 의료인으로서 양심의 가책도 느꼈지만, 형편이 어려운 젊은 부부를 위해선 그 방법이 유일했어요. 다행히 아이가 술에서 깨어날 무렵 수술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벌써 45년이나 지난 일이네요"

 

▲안동의료원은 1912년 자혜의원(사진 위)으로 첫 창설한 이래 1925년 경상북도안동병원으로 개칭했고, 1983년 경상북도가 전액 출자해 지방공사 경상북도 안동의료원(사진 아래)으로 개원했다. 현재는 200병상 규모로, 170여명의 임직원이 근무하는 도립 공공의료기관이다. <사진제공 안동의료원>

 ■ 20년간 안동의료원 이끌며 안동·경북북부지역 의료수준 높여

현재 안동에는 안동의료원을 포함해 3개의 종합병원이 있다. 하지만 70년대 후반까지 만해도 안동의료원과 성소병원 밖에 없었다. 성소병원도 그때는 대구 동산병원에서 실습생들이 파견을 나오던 시절이었다. 1981년 6월에야 증축 후 종합병원 인가를 받았다. 안동병원은 1982년 5월 용상동에 134병상 12개 진료과를 갖춘 종합병원으로 개설인가를 받았다.

안동의료원은 그 이듬해인 1983년 7월 지방공사 경상북도 안동의료원(50병상)으로 개원, 1986년에 80병상으로 개축 준공했고, 1994년 8월 별관을 증축해 120병상을 확보했다. 당시 안동군보건소는 1960년에 설치돼 운영되고 있었는데, 지역 의료분야에선 큰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1991년 보건지소 공무원 양성화를 거쳐, 1992년에는 공중보건의사의 전문화를 통해 지역사회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1955년 당시 100병상 이상의 종합병원은 전국에서 42곳에 불과했고, 30병상 이상 병원도 90곳 밖에 없었다. 1912년 안동자혜의원(안동의료원의 전신)이 창설한 이후 경북북부지역의 환자들은 거의 이곳을 이용했다. 50~60년대 당시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예천에서는 대구로 가거나, 거의 인근 안동에서 진료를 받았다.

▲1975년 신현수외과의원 개원 당시 사진. 신 원장은 3년간 몸담았던 도립안동병원을 사직하고, 안동 태사묘 맞은편 건물에 외과전문의원을 개원했다. 당시 안동에선 성소병원 외과를 제외하고 외과전문의로는 처음이다. 그때는 야간 통금이 실시되고 있었던 때지만 병원 입구에 응급 비상벨을 설치해 두어 응급환자는 누구든지 병원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신 원장은 세명 중 가운데.

신 원장은 1975년 4월에 3년간 몸담았던 안동의료원을 사직한 후 안동에 개인외과의원을 차렸고, 17년간 진료를 봤다. 1992년에는 경상북도안동의료원장 직을 맡아 20년간 안동의료원을 이끌었다. 그는 안동의료원의 경영개선, 인적쇄신, 직원복지 향상, 환자유치, 장례식장 운영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그는 부임 2년만인 1994년 안동의료원을 공공의료기관 평가에서 전국 34개 중 4위로 도약시켰다. 1990년 중반을 넘어서는 병원 경영이 흑자로 돌아섰고, 전국 의료원 중 항상 상위권 경영 성적을 기록했다.

안동의료원의 성장은 안동을 비롯해 예천·의성·영주·봉화·영양·청송 등 경북북부지역 전체의 의료수준을 몇 단계나 끌어올리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는 의료원장 직에서 물러나 안동과 예천의 요양병원장을 맡아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한 명의 외과의사가 걸어온 삶의 궤적 속에 녹아 있는 예천과 안동의 근현대사. 우리는 참 많은 일을 겪었고, 변화했다. 그렇게 울고 웃으며 질곡의 세월을 함께 버텼다. 신 원장 외에도 수많은 예천인들이 안동에 터를 잡고 살았고, 또 살아가고 있다. 그 반면 안동에서 태어나 예천에 사는 이들도 참 많다. 그에게 "원장님은 예천사람입니까, 안동사람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예천과 안동 모두 내 고향"이라 답했다. 경북도청이 예천·안동으로 온 마당에, 예천인·안동인을 따지며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했다.

신 원장은 "예천과 안동은 문화나 정서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라며 "언젠가 통합하게 될 예천·안동이 앞으로 어떻게 상생하며 미래를 준비해야 할지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제언했다.

 

[안동청년기자연합·안동아카이브연구회 공동 기획연재]

최봉근 영남신문 기자·권달우 안동인터넷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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