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땅 위에 제일 가는 산
하늘말라리, 산수국, 망초꽃 누리
하늘 아래 땅 위에 제일 가는 산
하늘말라리, 산수국, 망초꽃 누리
  • 안상학 시인
  • 승인 2009.06.23 17:4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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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안동의 산 (1) - '천지갑산'

대동여지도에 담긴 안동의 산

안동 땅은 물길로 나누면 대체로 삼등분 된다. 두 강이 흘러들어 하나가 되어 빠져나가는 형상이 안동을 삼등분하고 있는 것이다. 흘러드는 한 줄기는 태백에서 발원한 물줄기로써 봉화땅을 지나 청량산을 거쳐 예안, 월곡을 지나 안동으로 이르는 낙강을 말하고, 한 줄기는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영양, 청송, 임동, 임하를 거쳐 안동에 이르는 반변천을 말한다. 나머지 한 줄기는 앞의 두 줄기가 만나 다정하게 흘러가는 낙동강을 말한다.

필연적으로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 이 세 줄기 강을 안고 땅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 땅의 맥은 산줄기다. 안동으로 흘러드는 산줄기는 그래서 크게 세 줄기로 파악하면 어지간히 맞아든다. 대동여지도를 들여다보면 백두대간에서 한 줄기가 흘러들고, 나머지 두 줄기는 백두대간이 슬쩍 동해안을 따라 흘린 낙동정맥에서 뻗어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사는 안동의 산들은 백두산의 자식이다.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오면 안동은 대체로 문수산, 일월산, 보현산의 중시조를 만나게 된다. 이 가운데서 문수산만이 백두대간을 잇는 사손인 셈이고 태백산에서 한 쪽으로 흘린 낙동정맥에서 일월산과 보현산이 지손으로서 안동 동.남방에서 산을 낳고 낳은 것이다. 안동에서 볼 수 있는 산들은 대체로 이 세 산이 낳은 자식들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따지면 안동은 문수산 줄기에 등을 기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수산은 영주의 축서사를 안고 있는 산이다. 도산면에 이르러 강 건너 청량산 근처에서 예안으로 용두산, 유성산, 영지산을 낳고 녹전으로 달린다. 태자산을 지나 박달산에서 와룡면으로는 어름산, 와룡산을, 안동으로 저수산, 영남산을 낳았다. 다시 박달산에서 북후 서후 방면으로 달려 옥산사가 있는 조골산에서 갈라진다. 하나는 개목사가 있는 개목산, 남성산(천등산), 석문정사가 있는 건지산을 낳고, 또 하나는 보문산, 하가산(학가산)을 지나 한 갈래는 하회의 뒷산인 화산을 낳고 한 갈래는 풍천으로 내달려 노선산을 낳는다.

일월산은 낙동정맥의 백암산 못 미쳐서 서북으로 치달려 영양 땅을 관장하고 장갈령에 이르러 서북쪽으로는 청량산을 낳고 남서로 달려 임동으로는 자양산, 두음산, 고산, 아기산을 서쪽로는 임하 천전, 송천을 지나 용상동에 막내 황성산을 낳는다.

보현산은 포항과 청송과 영천과 의성을 나누는데 청송과 의성을 나누는 줄기가 안동으로 이른다. 보현산이 안동으로 내리 낳은 줄기는 모두 세 갈래다. 첫 번째 줄기는 청송 안덕을 지나 고운사가 있는 등운산을 낳고 북으로 더 달려 청송 파천으로는 천마산을 낳고, 길안으로 달려 천지갑산, 약산을 지나 임하면 대추월에서 반변천을 만나 목을 축인다. 그 다음 줄기는 황산에서 갈라져 청령산, 감곡산, 갈라산, 윤암산에 이르러 남후면 검암에서 숨을 고른다. 세 번째 줄기는 두 번째 줄기와 미천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달린다. 남각산을 지나 운방산에서 세 갈래로 흩어져 하나는 무릉으로, 또 하나는 단호리 상락대와 낙암정이 있는 원지산으로, 나머지 한 줄기는 하회를 감싸며 부용대에 와서 멎는다.

이렇듯 안동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다정하게 감싸안은 품안에 안겨 있다. 문수산과 일월산, 보현산의 정기가 오롯이 안동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찾아갈 안동의 산은 다 이 산들이 자식인 셈이다. 그다지 높지도 않아서 다정한 친구 같지만 또 그다지 낮지도 않아서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그런 산들이다. 너무 욕심내지 않고, 또 너무 알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처음 만난 사람의 첫인상을 남에게 편하게 이야기하는 기분으로 이 글은 이어질 것이다. 그 처음이 보현산의 자식인 천지갑산(天地甲山)이다.

개살구가 익어 가는 송제마을

안동문화지킴이 안에는 가끔 안동의 산을 찾는 이들이 있다. 갈라산, 왕모산 등 이미 몇차례 산행을 했다. 그때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 만주(滿洲)산악회 결성안이다. 안동의 산을 찾는 작은 산악회를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만주에 의미를 붙이기를 *천천히 거북이 걸음으로 산행을 하는 만주(慢走) *시간이 아무리 걸리고 힘들더라도 끝까지 완주하는 만주(晩走) *산행을 마치면 술에 푹 젖는 만주(滿酒) *통일이 되면 백두대간을 걸어서 만주까지 가는 만주(滿洲) 등등이다. 여기에 동의하는 몇몇이서 만주산악회 창립 기념 산행을 천지갑산으로 잡은 것이다. 미적미적 미루어온 산악회의 결성에 불을 당긴 것은 안동문화지킴이의 회지인 -사람과 문화-에 안동의 산을 연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산악회를 문화지킴이 내에서 하나의 분파주의로 몰던 ‘곱지 않은’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첫 산행은 지난 7월 9일에 있었다. 미리 산악회에 가입할 뜻이 있는 사람은 오전 9시까지 안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만나자는 홍보를 했다. 하지만 이 날 나온 사람은 서미숙, 정영준, 노영옥이 전부였다. 꼭 참석하리라던 몇몇은 전일 무리한 일정관리- 대체로 술-로 인해 ‘꿈동산’ 에 올라가고 ‘골수 산악인’들만 참석한 꼴이었다.

안동초등학교에서 출발하여 천지갑산 아래에 있는 송사동(松仕洞) 버스종점에 도착하는데 약 35분 정도 걸렸다. 승용차의 바로미터기에 찍힌 거리는 30km다. 천지갑산 아래에는 강릉과 부산을 잇는 35번 국도를 가운데 두고 송제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쾌청한 날씨지만 여름 텃세가 심했다. 몸을 짜는 듯한 습도와 살을 찌르는 듯한 바늘 햇살이 예사가 아니었다. 오직 시원한 것은 마을의 동남방을 가로막고 있는 천지갑산의 푸른 위용뿐이었다. 종점 가게 그늘에 들어 빙과를 먹으며 주인과 수작을 나누었다. 아무래도 마을과 산에 대해서 미리 정탐하려면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 적격이다 싶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곳 주인은 명가이드 급 수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마을은 원래 저기 말발굽께에 있었는데 현재 이곳으로 옮긴 지는 150년쯤 되고, 조부 되는 안동김씨 ‘중’자 ‘진’자 어른하고 “안동권씨” ‘석’자 ‘진’자 어른이 이 마을에 터를 잡았잖니껴. 원래 마을 이름은 발굽 ‘제’를 써서 송제(松蹄)였는데 이곳으로 옮겨 제방 ‘제’를 써서 송제(松堤)로 불렀니더. 그때만 해도 이 마을은 금소, 안기와 청송을 잇는 역촌이었지요. 천지갑산이라카믄 하늘과 땅 사이에 제일 좋은 산이라는 뜻이지요.”

천지갑산이 있는 송사동은 말달리던 시절에는 역촌이었다. 안동의 안기역에 딸린 역으로써 금소역과 청송의 문점역, 화목역을 잇던 곳이다. 그 당시에는 마을 이름도 발굽 제(蹄)자를 썼지만 역촌이 사라지고 제방 제(堤)자를 붙여 부른다.

천지갑산이라는 산이름이 생겨나기는 그리 오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자료를 들춰봐도 그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길안의 산들은 대체로 600m를 오르내리는 산인데 비해 천지갑산은 452m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약산 552.8m, 연점산 870m, 금학산 577m, 토일산 649m, 화금산 625.7m 등등의 산에 비하면 평균치에도 못 미친다. 그럼에도 이곳 사람들이 이 산을 가장 으뜸으로 꼽는 것은 산세가 수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타 산들은 변화가 없는 밋밋한 산세를 지니고 있는 데 반해 이 산은 수려한 길안천을 끼고 단애와 기암 산록을 지니고 있다. 이곳에 등산로를 처음 낸 것은 90년대 초 김희동 안동군수 재임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타의 산들을 제치고 천지갑산에 등산로를 낸 것으로도 이곳의 생김생김의 수려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버스가 회차하는 주차장 주변에는 호두나무와 살구나무 등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개살구나무에는 노란 개살구가 한창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흔들거니 비닐을 받쳐들거니 흩어진 것을 줍거니 하며 개살구를 거두고 있었다. 함께 간 서미숙, 노영옥은 비닐을 벗어난 개살구를 주워 담았다.
“개살구는 잘 익어야 그저 그런 맛이 나지 보기는 저래도 별 맛이 없니더.”

종점 가게 주인장의 말이다. 개살구를 먹는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소리다. 무식(無食)의 소치다.

차양 아래에서 주인과 수작을 하며 주워들은 풍월을 앞세워 일어섰다. 날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마을 길을 벗어나 강가로 돌아나가는 길목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짙은 그늘을 만든 쉼터가 있었다. 정자나무, 들마루 대신 시멘트로 마감을 한 휴식공간에는 마을 노인들이 눕거니 앉거니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제법 넓은 것이 한 스무 명은 족히 누워 쉴 수 있음직하다. 잠시 그늘에 들어 몇 마디 건넸다.

“산에 무신 전설이 있나. 모르긴 해도 저 산이 아마 노인네가 강에 낚시를 하고 있지 아메. 저기 천지갑산이 노인이고, 저리 뻗어내려 저 고기모테로 가는 게 낚싯대고 그 끝이 바늘인데, 과거 옥씨들이 저기 무덤을 써서 아랫대가 잘 됐는데, 고마 바늘 위에 묘를 써서 상석을 하이 망해뿌랬다네.”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묘의 주인인 옥 모씨의 후손이 이른바 명당발복으로 덕을 좀 본 모양이었다. 살만해지자 조상 묘에 치장한답시고 한 것이 오히려 화를 부른 모양이었다.

“가새거랑을 건너 저기 저리로 올라가믄 두 갈래 길에서 오른쪽으로 죽 올라가믄 저기 꼭대기에 묘가 있는데 거기서 왼쪽으로 내려오면 저기 탑이 있는데서 저리로해서 내려 오믄 한 두어시간 걸릴 게지 아마. 근데 묘가 있으만 바로 왼쪽길로 가야지 올라가믄 길 잃기 수으니 조심하소. 거서 길 잃으만 돌아오기 어렵을끼라.”

일곱 봉우리와 한 기의 탑

산의 초입은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영천으로 물을 보내는 도수로를 만든답시고 천지갑산 아랫도리를 사정없이 뚫고 있었다. 거기서 나온 돌가루가 날아서 옆에 있는 과수원의 사과나무들이 모조리 죽어버렸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또 지하수가 고갈되어 식수난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씁쓸한 기분으로 그곳을 지나 굴의 위로 올라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조금 오르자니 아니나 다를까 길이 두 갈래다. 노인의 말을 좇아서 오른쪽 길을 잡아 올랐다.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져서 등산로는 그늘이 짙었다. 가끔 해가 빤한 곳에는 나리꽃이 피어 있었다. 드물게 보는 하늘말라리가 앙증맞게 꽃송이를 달았다. 멀쑥하니 키가 큰 허리께에는 둥근 원판형 잎을 둘렀다. 발레리나의 강둥한 치맛자락 같았다. 그 위로 미끈한 목을 뽑아 꽃을 달고 아래 잎과는 다른 날랜 잎을 걸치고 있었다.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허물을 덜 벗은 바위며 암석이 있는 곳에는 동아줄을 설치해 놓았다. 등산로는 대체로 나무 그늘이 깔려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밖은 찌는 듯한데 참을 만큼의 땀이 등줄기에 붙을 뿐이었다.

천지갑산 등산로는 모두 일곱 개의 봉우리로 넘어가고 있음을 안내판에서 읽을 수 있었다. 제 1봉에 올라 한숨을 돌렸다. 제법 부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이 아래로 보이고 집들은 지붕이 더 넓어 보인다.

2봉을 지나 마촘한 자리를 골라 쉬었다. 만주산악회의 4대 원칙에 걸맞게도 느릿느릿 걸어서 쉴만한 곳은 다 쉴 작정인 모양이었다. 느긋하니 음료수와 캔 맥주로 목을 축였다. 술을 사자고 우긴 서미숙씨는 갈증에는 맥주가 최고라고 한사코 말린 우리에게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편 역성을 들었다.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했다. 회장은 당연히 만주(滿酒)의 원칙을 오버한 서씨로 정했다. 총무는 노씨, 사진부장 정씨, 오락부장에 글쓴이로 확정했다. 회비를 1만원씩 걷고 산중총회는 끝났다.

느긋하니 산을 오르면서 봉마다 서서 산천경개를 감상했다. 3봉에서 내려다본 마을과 강과 건너 산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저 그만이었다. 대사리 토일마을을 돌아서 고기터로 돌아오는 물줄기가 만든 태극은 하회 못지 않은 풍경이었다. 노인이 낚시를 드리운 고기터로 이르는 낚싯대의 형상은 생각 밖으로 힘있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큰 고기의 입질로 찌가 솟는 형상이라고나 할까.

4봉에 이르니 정자나무에서 만난 노인의 말처럼 무덤이 있었다. 그곳에서 슬쩍 내려가는 길이 보였다. 산행할 때면 앞장서기를 좋아하는 정영준은 그 길을 외면하고 자꾸만 다른 길을 고집했다. 청량산에서도 한 번 길을 잃어 낭패를 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미심쩍었지만 하릴없이 따랐다. 아무래도 산행경험이 많은 그에게 초심자에 가까운 나로서는 마냥 우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또 오르자니 누군가 나무로 바리게이트를 설치해 놓았다. 더 오르지 말라는 이야기다. 더 높은 봉이 보이건만 그곳에서 선회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바리게이트를 슬쩍 비켜 난 길을 걸어 내려갔다. 심상치 않았지만 정 가이드는 보무도 당당하다.

조금 내려가자니 묘가 한 기 있었다. 묘에는 고사리가 많았다. 다 커서 먹을 수는 없지만 머리가 잘린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누군가 새순을 딴 모양이었다. 군데군데에는 달맞이꽃이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부장은 촬영에 여념이 없다.

길은 골짜기로 이어져 있었다. 심상찮았다. 갈수록 길은 사람의 흔적이 엷어지더니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다래 넝쿨이며 생강나무, 떡갈나무, 물푸레나무 등이 원시림처럼 엉겨 있었다. 그제서야 길을 잘못 든 것을 깨달은 정영준은 책임을 통감한 듯 이리저리 길을 찾았다. 왼쪽 산등성이를 목적지로 해서 방향을 잡아 올라갔다. 쌓인 낙엽에 발이 빠지고 가파른 곳에서는 미끄러지며 겨우 올랐다.

산등성이에는 하산길이 있었다. 5봉은 어디 가고 6봉이 코앞이었다. 길을 잃고 헤맨 것이 분명하였다. 누구든지 이 글을 보는 분은 혹 천지갑산을 가더라도 무조건 묘가 보이면 좌회전 신호를 반드시 받을 것을 주문하고 싶다. 직진은 필연코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는 코스라는 것을 명심해 주길 바란다.

6봉은 네다섯 명 앉아 쉬기 마촘한 바위를 깔았다. 마을이 환히 내려다보이고 길안천의 흐름이 안동으로 안동으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동서로 트여서 바람이 시원하여 하산 길에 잠시 휴식하는 공간으로는 그저 그만이었다. 게다가 한동안 길을 잃고 헤맨 탓인지 긴장감이 풀리면서 맞이한 평안함까지 거들어서 6봉을 코스의 압권으로 꼽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

7봉을 지나 가파른 길을 내려와 숲을 벗어나자 평지가 나타났다. 풀밭이었다. 왼쪽으로 커다란 바위 위에 탑이 앉아 있었다. 대사동 모전석탑이다. 무너진 흔적을 다시 쌓아올려 본래의 모습은 깨어졌지만 그런 대로 탑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절의 이름도 알길 없는 폐사지를 홀로 지키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대사리에서 오르면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 물잔을 엎어놓은 듯한 천지갑산에서 보기 드물게 평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개망초가 절터를 뒤덮고 있다.

대사리모전석탑은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신라시대의 탑 양식으로 보아 한 천년은 족히 이곳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등성이가 내려오다 파치 절개지처럼 생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해석하자면 마치 허결처를 메우는 비보처럼 빈 공간을 가득 채우는 위용을 지녔다. 이 곳은 어느 세월에는 풍경소리와 목탁소리로 가득했을 것이다. 지금은 여름날 매미소리와 간간이 부는 바람에 서걱이는 떡갈나무 잎 치는 소리만 정적을 깨울 뿐이다. 아무튼 이 탑은 천지갑산 산행에서 거의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인간의 숨결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자칫 밋밋한 산으로 보일 수 있는 등산로의 악센트가 되고 있다.

산수국, 망초꽃 흐드러진 벼릿길

탑을 받치고 있는 바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마지막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가파른 길에는 으레 하얀 동아줄이 있다. 물가가 가까워서인지 습하다. 내리막길이 끝나면서 벼릿길이 이어진다. 이름하여 고방벼릿길이다. 아득한 절벽이 천지갑산을 받치며 치솟아 있고 겨우 사람 하나 지날 수 있는 바윗길이 이어진다. 오른쪽으로는 길안천이 한가롭게 내닫는다. 듬성듬성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바위며 돌조차 아름답다. 간간이 견지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제법 꺾지를 많이 꿴 꿰미를 차고 있다.

약 500m 정도 벼릿길이 이어진다. 보기 드문 하얀 망초꽃이 동행한 여인의 마음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꽃을 꺾어 수첩 갈피에 끼워 넣는다. 물망초도 아닌데 가곡 「물망초」를 흥얼거린다. 흰색과 연보라색으로 군데군데 핀 산수국은 망초에 마음의 갈피를 잃은 여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숲으로 뒤덮인 등산로와 천길 벼랑이 만든 그늘을 따라 산행을 마치고 빠져 나오니 여전히 햇살이 따갑다. 보통 두세 시간이면 완주하는 코스를 산악회 수칙을 준수하며 느림보 거북이 걸음으로 완주하니 네 시간은 족히 걸렸다. 게다가 산을 잃고 헤맸으니 시간으로 따지면 어지간한 산을 탄 셈이다.

마을 어귀에서 사진부장이 천지갑산을 촬영하고 있었다. 멀찌감치 서서 나도 함께 천연 렌즈로 산을 담는다. 그렇다. 천지갑산은 별 부담이 없는 산이지만 재미있는 구석이 많았다.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고 마는 허방도 지녔지만, 꽃과 나무와 아담한 일곱 봉우리와 한 개의 탑, 그리고 긴 벼릿길은 짧은 산행을 풍성하게만 여기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왜 ‘천지갑산’이라고 부른지 다 돌아보고서야 알게 된 셈이다.

안상학 시인은 1962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7년 11월의 신천'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생각]. 평전 [권종대-통일걷이를 꿈꾼 농투성이]가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처장을 거쳐 현재 (재단법인)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위 글은 2003년 전후 안동문화지킴이가 발간한 '사람과문화'에 연재했던 글을 작가의 허락으로 다시 연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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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후면 2014-10-23 09:51:53
개목산(천등산의 옛이름은 개목산, 개월산, 대망산) 옆에 길게 서쪽으로 펼쳐진 상산(쌍봉)이 남성산 아닌가요? 아니면 천등산과 상산 전체를 이르는 말이던가? 궁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