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산 쌍필봉 너머 약산 문필봉 있었다
갈라산 쌍필봉 너머 약산 문필봉 있었다
  • 안상학 시인
  • 승인 2009.07.11 0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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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안상학 시인의 안동의 산 (3) - 약산(藥山)>

약산 진달래는 없고 붓 한 자루만

약산의 정상인 약산봉(582.5m. 안동시 임하면 오대리 산 51번지)은 안동의 문필봉으로 불려진다. 산꼭대기가 붓끝처럼 생겼다고 붙은 이름이다. 멀리서 봐도 주변의 산과는 달리 특이하게 보여 어느 정도 풍수에 익은 사람이면 한 눈에 문필봉을 알아볼 정도이다. 겨울이면 정상에 선 참나무가 붓끝처럼 가지런히 하늘로 향하고 있는 것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이 봉은 안동에서 반변천과 길안천 사이로 시선을 두면 비교적 눈에 잘 띈다. 바꾸어 이야기 하자면 이 봉우리가 안동을 굽어보는데 지장이 없다는 결론이다. 따라서 이렇듯 문필의 정기가 서린 산이 굽어보는 안동땅은 문사가 많이 난다고 볼 수 있다. 풍수에서는 이런 산이 있는 곳은 글을 쓰는 붓을 가지고 사는 운명을 지닌 사람이 많이 난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약산의 정기를 가장 잘 받는 위치에 있는 곳은 내앞마을 입향조인 청계공 김진 선생의 묘소이다. 임하호 만수선 위에 우뚝한 이 묘소는 약산봉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 위압적이지 않으면서도 눈길을 끊임없이 보내는 약산봉의 시선이 다정하기만 하다. 몇 해 전 풍수를 하는 봉산 이완규 선생을 따라가서 본 약산봉의 첫인상이다. 묘소와 안산의 상응은 자못 서기롭다. 이쯤 되면 내앞마을에 명현 거유가 많이 배출된 까닭의 얼마간은 문필봉의 정기와 무관하다 하기 어렵다.

약산은 임하면에 있다. 오대리의 진산(鎭山)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오대리의 뒷산이 되는 셈이다. 길안면과는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안동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길안으로 가다가 천지리 못미쳐 홍은사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과수원을 좌우로 둔 길을 지나면 길안천을 가로질러 강건너 오대마을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넌다. 다릿목에서 강 건너 산록을 바라보면 약산이 어깨를 벌리고 솟아있다. 다리 건너 마을길을 가로질러 골짜기로 들어가면 약산 등산로가 있는 홍은사를 만날 수 있다.

약산이 문필봉이라지만 오대리에서 바라보는 약산봉은 문필봉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연봉들이 그렇고 그렇게 이어져 내달리고 산마루가 밋밋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약산봉 홀로 붓끝처럼 보인다고 하기 어렵다. 안동대학 근처에서나 임동쪽에서 바라보는 약산봉의 붓끝형상은 앞의 낮은 산들이 몸체를 가리고 붓끝만 오롯이 보여주기 때문에 형상감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는 누구라도 약산봉이 문필형상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대에서 바라보는 약산봉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약산을 오르기는 처음이지만 약산 문필봉을 안지는 오래되었다. 임하, 임동에서 바라보는 약산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러나 수없이 길안을 오고가며 홍은산 뒷산을 보았지만 그것이 내가 아는 약산인지는 이번 산행에서 처음 알았을 정도이니 짐작이 갈 것이다. 오대 뒷산인 약산의 약산봉은 문필봉이 아니라고 하면 이곳 주민들은 불만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것을 어떡하랴.

약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오대로 들어가는 길을 이번 행선지로 정하면서도 오대 뒷산이 약산인지는 몰랐다. 다 구경하고 돌아 나와서야 바보처럼 무릎을 쳤으니 그 동안 약산에 대한 선입견이 어떠했는지 나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약산 가는 길

9월 17일 일요일 아침 안동시청에 모여 약산으로 향했다. 이완규, 김호태, 권대성, 서미숙, 이은경, 노영옥 등이 참석했다. 사오마이 태풍이 지나간 쾌청한 날씨였다. 하지만 태풍의 꼬리바람이 남아서 풍경을 이리저리 흩뜨리고 있었다. 옥수수나 은사시나 바람에 쓸릴 때면 잎의 뒷면이 희다. 왜 대체로 잎들은 뒷모습이 흴까 하는 생각을 바람 불 때면 하게 된다. 이내 잊어버리지만 말이다. 대체로 아직 푸른 산과 들이다. 추석이 지났지만 아직은 가을이 먼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다.

35번 국도상에서 길안을 얼마 앞두고 직선도로가 있다. 그 가운데 정도의 도로변에는 커다란 자연석에 "藥山 弘恩寺"라는 표지석이 서있다. 약산은 그 화살표를 따라 왼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마치 과수원에 들어가는 길처럼 보이는 이 길은 오대리 마을로 이어진다.
다릿목에서 약산의 외형을 잠시 감상하는 것도 괜찮다. 길안천을 따라 이어지는 산은 살이 많고 우람하여 남성적인 느낌이 든다. 마치 가슴이 두터운 사내들이 어깨를 겯고 늘어선 듯하다고나 할까.

길안천을 건너 홍은사로 가는 다리는 태풍 사오마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폭우로 물이 불었는지 다리 위로 물이 넘은 흔적이 역력하다. 나무가지며 뿌리 째 뽑힌 풀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낮은 난간에 걸려 있다. 여름내 가뭄으로 바닥을 보이던 길안천은 모처럼 마른 목을 흠뻑 적시고 있다.

오대 마을을 지나 마을 뒷골로 난 길을 찾아들면 옆으로 과수원이 골짜기를 메우고 있다. 낙과가 더러 보이지만 매달린 사과가 먹음직하게 익어가고 있다. 일주문이 과수원 가운데로 난 길을 품안으로 들여 절까지 이어주고 있다. 언덕길을 넘어 돌아들면 홍은사가 채 새집의 흔적이 가시지 않은 채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가을꽃은 발길을 잡고

홍은사 주차장에 차대 대고 등산로로 접어든다. 불경스럽게도 우리는 절 마당으로 들어 합장도 하지 않은 채 곧장 산을 오른다. 축대 아래로는 골짜기 물이 흐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물봉숭아가 언뜻언뜻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다. 자동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 시각은 10시 45분. 바람은 남아 있지만 날은 맑다.

제대로 된 산길로 접어들기까지는 한참을 개울을 따라 난 길을 걸어야 한다. 말이 개울이지 불어난 물로 계곡이나 다름없다. 평소에는 똘물 정도인 이 길이 제법 폭포의 위용을 흉내내기도 한다. 어울리지 않게 키를 넘는 갈대도 서 있다.

앞머리는 벌써 만주산악회의 룰을 지키려는 것인지 꿈쩍도 않고 코를 쳐박고 사진을 찍고 있다. 진득찰, 구릿대, 쥐손이, 층층꽃, 짚신나물꽃, 고마리, 갈퀴덩굴, 여우오줌 등이 제각기 꽃을 피우고 있다. 씀바귀꽃은 쑥부쟁이와 같이 피어있다. 가을꽃들이다.

나는 왠지 가을꽃만 보면 가슴이 아릿하다. 향기도 향기려니와 색깔, 크기가 하나같이 소박하고 쓸쓸하고 가녀리다. 봄꽃의 설레임이나 화려함에 비해 얼마나 쓸쓸한 것이랴. 조금 있으면 구절초의 은은한 향기와 가을 들녘과는 달리 곱디고운 색깔이 빚어내는 풍경은 절정이리라. 게다가 감국의 향기가 더하면 춘정이 아니라 추정에 겨워 난 못하리. 어이쿠. 어쩌자고 이리도 헤매는가. 다음 달 국망봉을 오를 때 무얼 더 쓰려고 이러는 지.

질퍽거리는 길을 오른다. 개울을 건너 산으로 오르기 전에 길섶에는 보리수가 있었다. 흔히 우리 안동지방에서는 보리둑이라고 불리는 나무다. 앵두보다 작고 붉은 바탕에 갈색 점이 박혀 있는 열매를 그득하게 달고 있다. 김호태, 권대성 회원이 가지를 잡아주거니 열매를 따거니 하며 나무를 못살게 군다. 덕분에 뒤에서 구경하던 나머지 회원들은 싸근한 보리둑을 맛볼 수 있었다. 위장병에 좋다는 민간요법 강의를 들어가면서.

보리둑을 먹으며 접어든 산길에서 오늘도 만주산악회는 길을 잃는다. 평소 산행에는 일가견을 자부하던 권대성이 성묘객이 만들어 놓은 길로 인도하고 말았다. 덕분에 풀을 내려 아늑한 묘소를 방문하고 말았다. 다행히 그 묘소는 등산로와 인접한 곳이라서 쉬 ‘원대복귀’할 수 있었지만 한동안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한갓진 곳의 이 묘지의 주인은 자칫 오인할 수 있는 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간혹 손님을 맞이한다. 훨씬 덜 쓸쓸하리라.

"어름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아니 웬 얼음이 벌써 얼었단 말인가. 우루루 달려간 곳에는 얼음이 아니라 으름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가시나무를 버팀목 삼아 덩굴을 뻗어 올린 꼭대기에 쌍으로 으름이 익어가고 있었다. 보리둑을 사냥하던 두 '꾼'들은 이번에도 합심하여 나무에 올라 으름을 땄다. 그냥 먹기보다는 술을 담아 먹으면 좋다는 강의에 따라 서미숙 회장은 가방에 챙기기 바빴다. 잘 담아 두었다가 한 잔 내겠다는 '공약'을 내비쳤다.

"이 게 이름이 뭐예요?"

꽃이란 꽃은 다 꺾어 든 이은경 회원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버릇을 내비치고 만다. 들꽃 연구가 권대성 회원은 설핏 돌아보며 피식 웃고 만다.

"강아지풀이시더."

묻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옆에 서서 결론을 궁금해하던 사람도 모두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강아지풀은 흔히 보는 것과는 너무 달랐다. 갈대 옆에서 자라 그런지 키가 멀쑥할 뿐만 아니라 꽃도 검붉은 기운에 몸집 좋은 송충이 같은 형상이었으니 그럴만하였다. 마치 수크령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키가 크고 세력이 좋았다.
일행이 처음 쉰 곳에는 지게자리 바위가 있었다. 지게바위는 짐을 지고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지게를 쉬 내리고 지기 쉽게 너른 바위턱을 말한다. 나무를 한 짐 진 나무꾼이 산을 내려와 한숨 돌릴만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금방이라도 구들장을 뜨뜻하게 달구어줄 것만 같은 나뭇짐을 바라보며 개울에 땀을 식히고 곰방대에 담배를 우겨 넣는 나무꾼의 모습을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남록을 타고 약산 오르는 길

계곡을 따라 난 길에서 벗어나 오른쪽 산등성이로 접어들었다. 제법 몸피가 좋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등산로에 두터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좋은 땅인지 나무들은 하나같이 곧게 자라고 있었다. 땀이 날만하면 식혀주는 태풍의 꼬리바람이 나무들도 오늘은 반가운 듯 머리를 빗고 있었다.

산등성에는 묵은 묘가 3기 있었다. 흥해 배씨(興海 裵氏)의 묘로써 오래된 듯하다. 비문도 닳아서 식별이 어려웠고 문인석은 아예 뽑힌 채 나뒹굴고 있었다. 맨 위의 묘 상석에는 <折衝將軍行龍 衛副護軍>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묘에는 소나무가 제법 자라서 묵은 지 꽤 되는 듯하였다.

이 묘소에서 약산봉까지는 800m다. 산의 남쪽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남록은 밝고 싱그럽다. 폭풍우가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지만 땅은 벌써 정상적인 모습을 회복하고 있었다. 낙엽도 겉 부분은 벌써 보송보송 말라가고 있었다. 돌아보면 역광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숲 밖의 세상은 참으로 싱그럽다.

등산로에서 비교적 여럿이 앉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티타임을 가졌다. 처음 산행에 참석한 이은경 회원이 마련한 커피와 손수 만든 빵을 내놓는다. 무언가 잔뜩 든 가방을 힘겹게 들고 온 것은 <풀밭 위의 식사>를 위하여 준비된 것이었다. 커피에는 특별히 소녀적 감수성을 발휘하여 쑥부쟁이 꽃잎을 띄워 공급하였다. 한참을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짐을 추스렸다. 깔았던 모포를 군대식 모포털기 시범을 보인 이완규 회원은 해병대 출신답다. 이은경 회원은 처음 참석한 산행이어선지 힘겨운 모양이다. 커피와 빵을 먹어치워 줄어든 가방을 둘러매고도 여전히 힘겨운 듯 한 마디 한다.

"짐도 줄었지만 힘도 줄어서 무겁기는 매한가지네요, 뭘!"

산등성이는 가파르다. 공공근로 사업으로 만든 계단이 그런 대로 다리 품을 줄여 준다. 떡갈나무나 참나무를 베어 만든 계단이다. 조금 더 오르면 경사면을 가로질러 가는 길에는 금속으로 된 말뚝에 동아줄을 이어 만든 난간이 이어져 있다. 편리하게 설치해 놓은 듯하지만 그렇게 험한 길이 아닌 곳인데도 설치를 해 놓은 듯한 인상 또한 지울 수가 없었다.

난간이 끝나면서 다시 산등성이로 접어든다. 안내 표지판이 서있다. '약산봉 360m'를 내 걸고 정상을 친절하게 가리키고 있다. 표지판 또 한곳을 가리키고 있다. '도연폭포 600m'. 도연폭포라니. 아니 아직도 도연폭포가 있다는 말인가. 임하댐 수몰로 사라진 이 곳을 표지판은 당당하게 안내하고 있다. 안동에서 물속으로 사라진 수많은 명소 중에서도 유난히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인 도연폭포를 안내하고 있는 표지판을 만나게 되다니. 마치 나는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갈 수만 있다면 가보고 싶은 도연폭포를 이렇게나마 만나는 것이 신선하기까지 하다.

정상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곳에서 우리는 서글픈 현장을 목격한다. 느릅나무 군락이 사그리 베어져 있다. 껍질을 홀랑 벗겨 간 것이다. 위장병에 좋다느니, 암에 좋다느니 하면서 느릅나무는 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간혹 말라죽은 나무의 뿌리 근처에서 어린 느릅나무가 자라고 있다. 머지 않아 이 나무들도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면 또 어느 얌체 약재상들에게 박피 고문을 당할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목이 뎅겅 잘리고 껍질이 벗겨진 채 말라갈 지 모를 일이다. 여기서 우문현답을 나눈다.

"느릅나무도 꽃이 필까."
"세상에 꽃 없는 풀이 어디 있고, 또 꽃 없는 나무인들 어디 있을까"

정상 아래에는 표지판이 또 하나 있다. '내려가는 길'이라고 안내판의 뾰족한 부분을 아랠 향하고 있다.

약산봉에서 세상 구경 어려운 이유

약산봉은 실망스럽게도 주변 풍광을 구경하기에는 너무도 악조건이었다. 봉수대가 있던 곳에는 나무는 없고 우북하니 잡풀만 자라 무슨 무덤같이 자리 잡고 있다. 한 30평정도 공터가 있고 주변은 빙 둘러가며 자작나무와 참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 나무보다 키가 크면 모를까 여기서 밖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풍수를 연구하는 이완규 회원은 더없이 아쉬운 모양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이 회원은 포기한 듯 사진기를 거두고 만다. 더러 빠끔히 내다보이는 곳에서 낯익은 지형지물을 발견하고 약산의 위치를 가늠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정상에서 2시 방향에는 용계다리가 반나마 내려다 보인다. 도연폭포가 멀지 않다는 게 증명이 된다. 11시 방향으로는 멀리 수곡교와 중평신단지가 언뜻언뜻 보인다. 임하호의 물살이 눈부시다. 이 정도가 전부다. 흔히 산정에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을 법 한데 약산은 그런 행복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약산봉에는 흔히 문화재를 찾아가면 볼 수 있는 안내판이 서 있다. 여기에 따르면 약산의 지명유래에 얽힌 이야기가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다. "천지개벽시에 온 세상이 물바다로 변했으나 한약 1첩 묶은 면적만큼 남아 있었다"고 약산이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이런 유의 전설은 다른 마을에서도 회자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일직면 평팔에 가면 검무산이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의 지명유래에 대해서 '옛날 비가 억수로 왔는 적이 있는데 인근의 마을과 산이 다 잠겨버렸지만 이 산만큼은 거미 한 마리 앉을 만한 자리가 남아 있어서 거무산'이라고 부른다는 거였다. 거미 한 마리와 약 한 첩의 차이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같은 거였다. 대체로 이런 산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높은 봉에 이름 붙이는 것이다. 약산은 이 근처 사람들에게는 가장 높은 봉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사람에게 소중한 약과 관련된 의미를 부여하며 영산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둥글게 만든 "숲 속의 방"에서 둥글게 보이는 하늘을 이고 약산봉 표지석 옆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는다. 시간은 오후 1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출발하고 근 3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정도 산을 오르는 데만 3시간 정도 소요하는 만주산악회의 '악명'은 이날도 유감없이 발휘된 셈이다. 이미 점심으로 준비한 김밥은 슬슬 맛을 달리하고 있을 정도였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내내 둥근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은 세차게 불었다. 그때마다 둥근 벽처럼 둘러서 있는 나무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는 '저 나무들이 없으면 사방을 조망하기 좋을 텐데'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왜 하필이면 이 산은 나무들이 둘러서 있을까. 나는 이런 자문자답을 하면서 그 아쉬움의 근원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첫째, 약산은 나무가 자랄 수 없는 돌밭이나 바위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망대가 형성될 수 있는 자연스런 조건을 갖출 수가 없다. 둘째, 약산은 문필봉이라는 점이다. 붓의 형상을 한 약산은 필연적으로 붓털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나무다. 그런 나무를 베어내고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면 문필은 털 없는 붓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붓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문필봉의 정기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결국 약산봉의 폐쇄성은 자연적인 조건과 인간의 산에 대한 인식이 빚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아쉬움은 충분히 위로를 받은 셈이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하산해서 만난 산방한담

2시에 하산 길에 올랐다. 홍은사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면 우백호를 타고 내려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성미 급한 산벚나무가 단풍 드는 데도 예외 아니다. 다른 나무들은 멀쩡한데 벌써 누런 물을 뒤집어쓰고 있다. 꽃도 급하게 피어선 급하게 지우는데 단풍도 마찬가지다. 섣불리 들었다 때 이른 낙엽을 지우리라.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다 보니 벌써 앞머리는 보이지 않는다. 화살나무와 노간주나무도 가끔 풍경에 변화를 주고 있었다. 길섶에는 박하와 며느리밥풀꽃이 자라고 있다. 권대성 회원은 들꽃의 대가답게 한 마디 한다.

"손톱에 물들이기는 봉숭아 못지 않지. 옛날 여인들은 봉숭아 대신 며느리밥풀꽃을 많이 썼데이. 근데 여인들의 슬픈 전설이 깃들여 있는 것을 알았으면 그리 했을까 몰라."

그럴듯한 말이었다. 주걱에 묻은 밥풀을 뜯어먹다 들키어 시어머니에게 매맞아 죽은 며느리의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들여 있는 꽃이라면 말이다.

산중턱을 지나 내려왔을까. 등을 타고 묘들이 줄줄이 쓰여져 있었다. 묵묘도 있었지만 아주 잘 풀을 내린 묘역이 있다. 비록 상석과 비석은 없었지만 솔숲에 둘러싸인 묘지에는 잔디가 잘 자라고 있다. 그곳에서 먼저 도착한 앞머리가 쉬고 있다.

앉은자리에는 여러 가지 벌레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자벌레가 인상적이다. 작은 나뭇가지 같은 데 이 놈은 기어가는 모습이 흡사 자치기를 하는 아이가 자를 재듯 한 자 한 자 재면서 간다. 권대성 회원의 설명이다. 들꽃뿐만 아니라 벌레에도 조예를 보여 탄성을 자아낸다. 여기서 많은 이야기꽃이 피었다.

"묘 주변에는 꽃나무를 심지 마라. 아랫대가 바람난다. (서미숙)"
"산돼지도 도토리가 많이 열린 해에만 새끼를 낳는다.(권대성)"

이 이야기들이 화두가 되어 참 많은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많은 이야기를 여기에 일일이 옮기기는 어렵다. 지면도 지면이지만 연소자 관람불가 이야기로 판정되기 때문이다.

묘역을 지나서 산을 내려가는 길에는 산을 오르면서 보았던 꽃들을 역순으로 만난다. 약산에는 중턱 아래부터 꽃들이 많다. 구릿대, 쥐손이, 층층꽃, 갈튀덩굴, 쑥부쟁이 등 다시 만나도 반갑다.

산을 다 내려간 지점에 잘 단장된 묘지가 있다. 그 앞에는 오동나무가 한 그루 있다. 성묘를 하면서 베어낸 건지 허리가 잘려 있었다. 그러나 곁가지가 멀쑥하게 자라 너른 잎을 너울거리고 있다. 묘지 앞에 오동나무라.

"묘 앞에 꽃나무를 심으면 아랫대가 바람 난다 했나. 오동꽃이 요란하니 이 집 아랫대는 어찌 됐을꼬. 그래서 벤 건가?"

갈대숲을 지나 홍은사 앞에 이르니 4시가 다 되었다. 깊은 산 속이라 해가 일찍 내리는 듯 산 아래는 벌써 그림자가 짙게 지고 있다. 코스모스(살사리꽃)가 무리 지어 핀 경내의 공터에서 스님이 잡초를 뽑고 있었다.

"차 한 잔 하고 가시죠"

홍은사 개오스님의 청이었다. 우리 일행은 하산의 피로감을 요사체에서 스님이 손수 달여 준 녹차와 말차를 마시며 풀었다.

돌아나오는 길에 개오스님이 일러준 대로 길안면 소재지 입구의 신호등 옆 늪에서 부래옥잠을 찾아갔다. 저녁 어스름에 푸른 잉크색 꽃이 가득 피어있는 꽃은 아쉽게도 물옥잠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안동 살면서 물옥잠 서식지가 있는 것을 모르고 산 무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안상학 시인은 1962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7년 11월의 신천'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생각]. 평전 [권종대-통일걷이를 꿈꾼 농투성이]가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처장을 거쳐 현재 (재단법인)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위 글은 2003년 전후 안동문화지킴이가 발간한 '사람과문화'에 연재했던 글을 작가의 허락으로 다시 연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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