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마을 하나 품고 사는 山
아름다운 마을 하나 품고 사는 山
  • 안상학 시인
  • 승인 2009.06.27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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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시인의 다시읽는 안동의 산 (2) - 정산(井山)

아름다운 마을 하나 품고 사는 山

만주산악회는 말이 산악회지 진정한 산악회라고 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산악회는 그야말로 산과 악을 넘나드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 마련이다. 전문적인 지식과 장비와 풍부한 경험으로 단련된 단체가 대부분이다. 고작해야 안동의 민둥산을 찾아 헤매는 만주산악회는 이름만 거창하고 내용은 소박하기 짝이 없는 모임이다. 가벼운 옷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따라나서겠다는 회원이 부지기수니 가히 짐작할만하다.

만주산악회는 그래서 산악은 물론이고 그 흔한 등산이니 등반이니 하는 따위의 말 쓰기도 민망하다. 등산(登山)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산을 오른다는 뜻이다. 오르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뜻이라고 하면 너무 한정적일까. 그러나 왠지 이 말에는 그런 느낌이 든다. 등반(登攀)은 무엇일까. 말 그대로 무언가 잡고 오르지 않으면 오르기 어려운 산을 오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도 산악회라니 민망하고 민망하다. 침낭이나 자일은 고사하고 지팡이 하나 없는 산악회니 아니 그러고 어쩔까.

이 번 정산(표고 301m)행에 따라붙은 차영민(경덕중학교 교사)씨는 만주산악회의 산행은 아무래도 관산(觀山)이나 답산(踏山)에 가깝다는 지적을 했다. 적절하다. 풀꽃 하나에도 정신을 놓고, 나무 하나에도 별의 별 의미를 더하는 회원들의 ‘집요함’이라니. 어쩌다 전망 좋은 곳에 자리가 나면 아예 눌러 붙는다. 이러다 보니 한 시간이면 족히 오르내릴 산을 세 곱절이나 더 걸려서야 겨우 하산한다. 이쯤이면 그렇다고 아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마도 이번 정산행은 이런 점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라고 미리 말할 수 있다.

정산은 풍천면 가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안동 권씨와 순흥 안씨가 사이좋게 땅을 갈라서 사는 곳이다. 정산도 이 두 성씨가 나누어 가지고 있다. 이들 입향조는 공히 풍산 류씨 집안의 문객으로서 처가의 재산을 분재 받아서 터전을 이루어 살고 있다. 그때만 해도 딸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안동 권씨는 마을을 마주하고 보면 오른쪽에 터를 잡았고 순흥 안씨는 왼쪽이다. 정산은 이 두 성씨의 마을을 한껏 다정하게 안고 있다. 묘하게도 마을 가운데로 두 산줄기를 흘려 놓았다. 안동의 풍수 이완규는 이를 가리켜 정산이라는 큰 용이 두 마리 아기 용(嫩龍)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지극히 다정한 형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마을을 갈라놓은 형국이어서 두 성씨가 서로 다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금방 화해하는 싸움이어서 뒤끝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정산의 품안에서 오래도록 같이 사는 모양이다. 어린 용이 어미젖을 다투지만 그래도 서로 체온을 나누며 살아가지 않는가. 거기에 사람이 또한 깃들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 산을 8월의 5일과 12일 두 번에 걸쳐 올랐다.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오만 것 다 살피는 만주산악회 체질상 오후시간만으로는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의 산행 한 가지의 이야기를 푼다. 처음 간 날을 중심으로 두 번째 간 날의 이야기를 곁들인다.

8월 5일 참석한 회원은 서미숙, 차영민, 임종교, 임미경, 이향미, 노영옥과 글쓴이를 더하면 7명, 8월 12일에는 이완규, 이운규, 김만동, 조규복, 권대성, 류길하, 서동석, 정영준과 안동인터넷 김용군 부부 11명 이 참석했다.

정산 가는 길

풍천 가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국도를 따라 바로 가는 것이고, 하나는 솔밤다리에서 내려 우회도로를 따라 돌아가는 것이다. 가는 길부터 만주산악회 특유의 느린 걸음태를 내자면 당연히 돌아가는 길이다.

안동시청을 출발하여 대구통로의 안동대교 입구에서 우회전하여 안동농고 앞으로 난 우회도로를 타고 올랐다. 호암 고갯길에서 학가산과 봉정사를 안고 있는 천등산을 만난다. 멀리서 봐도 언제나 정겨운 산이다. 학과 봉을 닮은 산이라서 그런지 날아갈 듯하다.

호암다리에서 내려 좌회전하여 강변길을 달린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강변의 공기가 상큼하다. 막곡, 계평, 회곡, 수동을 거치는 이 길에는 정자가 많다. 막곡을 지나 청성산 자락에는 송암 권호문 선생의 강호문학의 산실인 연어헌과 학봉 김성일 선생의 석문정사가 있다. 회곡 마을에서 건너다보면 건지산 아래 깎아지른 듯한 절벽위에 낙암 배환 선생의 낙암정이 얹혀있다. 강을 따라 절벽이 솟은 곳은 상락군 김방경 장군이 소요한 상락대가 절경이다.

강을 끼고 달리는 이 길은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레미콘 공장이 들어서서 대형차량의 교통량이 많아지면서 위험하지만 길의 운치는 여전하다.

“달밤에 드라이브 코스로 그저 그만이지. 한 구비 돌면 달 뜨고 한 구비 돌면 달 지고 하루 저녁에도 골백번은 달이 떴다지지”

차영민 씨가 이 길의 정취를 한 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 때면 달이 산에 가렸다 나타나곤 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한 말이다. 그러잖아도 초행길의 정취에 자지러지던 동승한 처녀회원은 이 말에 아예 까무러치면서 애인을 구해 같이 오겠다고 벼른다.

우회도로를 빠져나가면 바로 가는 길과 다시 만난다. 그곳에는 체화정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비록 물이 맑지 않지만 운치 있는 연못에 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배롱나무 붉은 꽃이 자지러지게 피어있다. 그 처녀는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자지러진다. 비는 오락가락하고 여기서도 한동안은 서성거렸다. 만주산악회는 산행만 느린 것이 아니고 가는 길도 한이 없다. 참새와 방앗간이다.

뫼‘山’자 뚜렷한 정산

가일마을은 풍산읍에서 하회로 빠지면서 소산을 지나 중리 못미처 있다. 풍서초등학교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버짐나무가 우람하다. 초등학교 운동장에나 어울림직한 외래종 나무가 오래된 마을의 얼굴마담으로 나서는 게 그리 신통하지는 않다. 안동의 풍수 이완규의 지적에 공감이 간다.

이 마을길로 접어들어 못둑까지 난 오르막길을 접어들면 왼쪽으로는 커다란 연못이 나온다. 엄청난 몸피를 자랑하는 회나무가 연못가에 그늘을 만들고 있다. 동네 정자나무다. 학자수라고도 하는 이 나무는 가일의 역사를 넌지시 건네준다.

정자나무를 지나 갈림길에 서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정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산은 뫼‘山’자를 닮았다. 누가 이 글자를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정산을 보고 그린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다. 완벽하다.

마을입구에서 산을 오르기는 오른쪽 산자락으로 깃들이는 것이 좋다. 마을길 오른쪽으로 좌청룡이 내려와 있다. 마을 안길로 들어가면서 수곡종택과 남천고택을 지나 단군골로 들어가는 길로 가면 쉽다. 달군골의 골짜기 끝에는 마을의 동제를 지내던 당집이 있다.

남천고택의 옆 텃밭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권오설(1897~1930. 號 莫難) 선생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다. 이 집은 한국전쟁 무렵에 불에 타서 없어지고는 집터도 남천고택의 담 안으로 편입되어버렸다. 그곳은 고추밭으로 바뀌어버렸다. 사상가이자 이론가이며 실천적 삶을 살았던 막난 선생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그는 1926년 6월 10일 순종황제 인산일(因山日)을 맞이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다. 결국 고문후유증으로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서른 네 해의 짧은 삶, 한 시대의 꿈을 펼치기도 전에 꺾인 한 혁명가의 자취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무덤은 가일 입구 주유소 뒤의 골짜기에 있는 공동묘지에 있다.

달군골로 접어들어 오르다가 민가가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밭둑길이 있다. 그곳으로 타고 올라가면 묏등을 따라 오르는 길이 보인다. 수수밭이며 기장, 깨, 고추밭이 더러는 옥수수를 두르고 있다. 그쯤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발 아래다. 산은 집들을 발치에 다닥다닥 따개비처럼 붙이고 있다. 듬성듬성 고택은 또 산처럼 들어서서 작은 집들을 거느리고 있다.

생각보다 길이 좋았다. 마을 사람들도 모르게 길은 참하게 나 있었다. 대체로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한 바퀴 도는 길을 물었을 때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잡풀이 우거져서 찾기가 어려울 거라는 둥 짐작으로만 도리질이었다. 그만큼 생활이 산하고는 멀어졌다는 증거다. 나무를 땔감으로 쓰던 때에는 바늘이 빠져도 찾을 수 있는 민둥산이었다. 연탄과 보일러로 교체하면서 점점 산하고는 멀어진 것이다. 산나물도 마찬가지로 밭에서 나는 채소만으로도 식생활이 해결되므로 찾지 않는다. 산나물은 어느새 가난한 시절을 들출 때면 등장하는 상징으로 남아버렸다. 물론 송구를 벗기려고도 않는다. 사람의 자취가 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산은 스스로 제 모습을 찾았다.

사실 우리도 처음 산을 대하면서 저 산에 길이 있을까 의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랬지만 등산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묘가 많아서 성묘객이 찾을 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산에 길이 등성이를 따라 참하게 나있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산나물과 약초를 캐다 파는 사람들이 아직도 산을 찾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동물들이 알게 모르게 길을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루며 토끼, 멧돼지 등이 저희들끼리 길을 만들며 살고 있다는 증거다. 반가운 일이다.

풀꽃들의 이름을 안다는 것

산등성이는 넓고 팡팡하다. 맨 아래에는 아름드리 참나무가 숲을 이루고 그 위로는 소나무가 해를 가릴 정도로 우거져 있다. 갖가지 들꽃이 그 발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 기는땅빈대, 담배풀, 노루발톱, 중대가리, 쇠무릎, 마타리, 무릇, 잔대, 도라지 등이 꽃을 피우거니 지우거니 하며 살고 있다. 두 번째 산행에서 들꽃을 연구하는 권대성 회원의 자세한 설명으로 알게 된 꽃들의 이름만도 여럿이다.

산에는 참으로 많은 풀꽃이며 나무들이 살고 있다. 산행에서 이들을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이름을 모르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하고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 답답함과 비교할 수 있을까. 대중가요 중에서는 -이름 모를 소녀-가 있다. 누구인지 어디 사는지 이름은 무언지 한 번 놓치고 나면 다시 찾기 어렵다. 어느 시인은 어느 시에서 ‘이름 모를 꽃들’이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알면서도 모른 척 이렇게 쓰면 더 시 같다는 착각의 결과다. 아니면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시에 대한 태만의 결과다. 정확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자든 후자든 문제가 있다. 정산행은 풀꽃연구가와 동행함으로써 이런 답답한 구석을 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꽃의 이름을 알고 보면 새롭게 다가온다. 이름도 그냥 생긴 게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쇠무릎은 마디마디가 소의 무릎과 흡사하고 기는땅빈대는 줄기가 뿌리를 떠나서는 땅을 기는데 잎이 흡사 빈대처럼 생겼다. 담배풀은 꽃을 단 줄기를 꺾어 물면 그대로 곰방대가 되었다. 재미있다. 모르고 보면 그저 답답하기만 하던 것이 이름 하나 알았을 뿐인데 새롭고도 정겹게 다가왔다.

당집과 돌무더기와 돌탑

좌청룡을 타고 오르면서 첫 고개를 넘으면 왼쪽으로 늙은 소나무가 몇 그루 자리 잡고 있다. 자세히 보면 그 사이로 자그마한 집이 보인다. 낡고 오래된 당집이다.

가일마을 사람들이 정월 대보름이면 풍농과 안녕을 기원하며 동제를 올리던 공간이다. 그런데 이 당집은 여느 당집과는 구조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남향으로 말굽 자석 형태로 돌담을 쌓아 올리고 굽은 부분에 지붕만 덩그렇게 기와로 올려놓았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집안의 공간은 돌담을 가로질러 둘로 나누어 놓았다. 신을 두 자리 모신다는 증거다. 여기에 마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집어넣자면 이렇다.

“산신령 내외를 모시기 위해 방을 둘로 만들었다카데요. 근데 동제 안 지낸 지는 한 30년 되지 아메. 새마을 운동 때 내가 마지막 제관으로 동제 지내고는 사무 안 지냈잖니껴. 저 우에 동수나무 아래 돌 봤니껴. 그 돌게도 지냈지요. 당집에서 지내고 내려와서 돌게도 지내고 했는데 그 돌도 원래 마을 안에 있었는데 새마을 운동 때 길 닦는다고 저기 갔다 놨지요. 그게 그 돌기시더.”

택호를 ‘풍산어른’으로 쓰는 권태현(가일리. 63)씨의 이야기를 미루어 짐작하면 동제는 미신타파 운동 때 자취를 감춘 것 같다. 최근 동제를 다시 지내자는 움직임이 있는데 여의치 않다고 설명했다.

당집을 지나면 가파른 오르막이다. 산길의 왼쪽으로는 됫박 만한 돌들이 엄청난 무더기를 이루고 있다. 무슨 산성을 쌓아도 족히 될 양이었다. 가파른 길이 끝나는 지점은 산등성이에서 돌출된 곳으로써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곳이 있다. 그곳에도 돌들이 흩어져 있다. 동행한 고분 전공의 조규복 씨는 산성의 망루가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조금만 오르면 뫼 산 자의 오른쪽 획의 봉우리다. 제법 너른 터로 되어 있다. 집이 있었던 흔적이 엿보이는 곳이다. 옥정봉 정상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다. 길목에 돌무더기가 또 있다. 그런데 이 곳에는 돌을 쌓아 탑을 여럿 만들어 놓았다. 마니산에는 발끝도 못 따라가지만 그런 대로 운치가 있었다. 누군가 쌓지 않고는 못 배긴 모양이다. 더러 한가한 산꾼이 이곳을 찾는 흔적으로 보인다.

군데군데 도라지꽃이 특유의 청람빛으로 피어 있었다. 사람 수만큼(하산하여 식당에서 맛있게 먹었다) 몇 뿌리를 캤다. 도라지는 하필이면 길옆에 자라 게으른 산꾼에게 걸린 것이다. 어떤 꽃 예찬론자는 한사코 말린다. 나는 도라지가 도저히 먹거리로 보여 캐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양심에 기댄 것은 사람 수만큼만 캤다는 점이다. 이 정도는 산신령님도 귀엽게 봐주지 않을까.

옥정봉에서 우물찾기

정산(井山)은 영가지에도 나온다. 우물 정자가 있다는 것은 어디에 샘이 있다는 증거다. 실제로 정산에는 물맛이 좋은 샘이 있다. 마을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뫼 산 자의 오른쪽 골짜기에 있다고 한다. 옥정은 한 때 이 마을 학교의 급수를 도맡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등성이 산길에서 한참을 내려가면서 기웃거렸지만 우물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물기가 스며나고 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수풀이 우거져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찾기 어려운 터였다. 쉽게 포기하고 말았다.

정상인 옥정봉은 언제 올랐는지 모르게 다다랐다. 그다지 힘 든 길은 아니었다. 봉 9.5부 정도에 너럭바위가 있었다. 그곳에서 한참을 앉아 마을 구경을 했다. 안동에서 가장 너른 풍산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 하회의 뒷산인 화산이 봉긋봉긋 솟았다. 꽃봉오리를 닮아서 화산이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맞다. 산은 마치 거대한 연꽃을 보는 듯 정상부가 너르게 봉긋봉긋 꽃잎 끝처럼 피어있다.

멀리 동으로부터 낙동강이 풍산평야를 향해 밀려와서 돌연 남으로 방향을 틀고 병산 앞으로 사라지고 그 뒤로 아틈실 앞의 미루나무 숲이 마을을 가리고 섰다. 건지산과 병산, 하회마을의 앞산인 남산, 마늘봉, 원지산이 마치 하회를 중심으로 풍산을 감싸고 있는 듯 다정하게 두르고 있다.

옥정봉에서 가일 마을은 바로 발밑이다. 지붕과 마당이 환하게 내려다보인다. 올망졸망하니 크고 작은 집들도 그게 그거처럼 여겨진다. 마을로 내려간 두 줄기의 산이 아기용처럼 보인다. 정산은 다정하게도 그들을 서로 다툰들 내 품의 새끼라는 듯 말이 없다. 정산에서 바라보는 가일 마을은 언제나 정산의 품속에서 아웅하거니 다웅하거니 다정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정상 아래 바위마루에서 우리는 한참을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쏘였다. 신선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살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땀을 식힌 후 그곳을 떠났다.

하산길에서 만난 것들

정상에서 가는 길로 조금 내려가면 산 뒤쪽을 향하고 있는 너럭바위가 있다. 그곳에 앉으면 갈전의 뒷산인 검무산(劍舞山. 331m)이 보인다. 산의 이름이 위압적이듯 실제 산의 기운도 억세고 기운차다. 풍천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주변에서 단연 우뚝하다. 암산이어서인지 산빛이 검푸르고 기세가 날래고 억세다. 더구나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나니 우리가 보는 쪽은 그림자가 져서 더욱 그러하다. 멀리는 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닫는 모습이 장관이다. 이 낮은 산에 올라 감상하기에는 이 모든 것이 너무 복에 겹다.

부근에는 긴산꼬리풀꽃이 군락을 이루고 피어있었다. 연보라빛 꽃이 소담스럽다. 더러 패랭이꽃과 도라지꽃이 이웃처럼 자리잡고 있다. 서미숙 회장은 여기서 도라지꽃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었다. 성은 ‘도’씨요 이름은 ‘라지’라는 처녀의 사랑이야기가 끝내 미완으로 남은 자리에 핀 꽃을 ‘도라지’라고 지었다는 이야기. 꽃이 청람빛인 것은 도라지라는 아가씨가 도련님을 기다리며 절집에서 승복을 하도 빨아서 그렇다는 서글픈 이야기가 서려서 그렇다나.

산을 내려가는 길에는 누군가 흰수염풀(사초)을 마치 아이 머리를 땋듯 땋아 놓았다. 풀이 아직 채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누군가 금방 땋아 놓은 듯했다. 이 한적한 산길에도 사람이 지나갔다는 이야기다. 누구 말처럼 아이를 잃어버린 광녀가 못내 아이가 그리워 이렇게 풀을 아이 머리처럼 땋아놓은 것은 아닌지. 순간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우리도 그곳에서 흰수염풀을 뿌리 뽑지 않고 그대로 땋아보았다. 그 느낌은 산의 머리를 땋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 땋아서 댕기를 묶었다. 거기에 도라지꽃을 꽂으니 훌륭한 댕기머리가 되었다.

산을 거의 내려가니 마을 가깝고 접근성이 좋은 곳에 무덤이 보였다. 수곡처사묘소(樹谷處士墓所)였다. 오래된 비석이 빼곡하니 한자를 달고 있었다. 주변에는 개망초꽃, 으아리, 무릇이 한창이었다.

완만한 길을 돌아돌아 마을의 뒤란까지 다다라서 처음 만난 집은 동곡재사(東谷齋舍)였다. 배롱나무가 뒤란을 지키며 붉은 꽃을 마음껏 피우고 있었다. 담장 곁에는 대숲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재사는 돌보지 않아서 퇴락했다. 자연은 스스로 제 모습으로 늙어가지만 인간이 창조한 것은 돌보지 않으면 금방 낡고 병든다. 마당에는 잡풀이 우거져 금방이라도 무언가 튀어나올 것처럼 귀신스럽기 짝이 없다. 그곳을 지나서 마을을 가로질러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한 시간이면 다 돌아볼 산을 세 시간이 훨씬 넘어서야 출발한 지점에 다다랐다. 동수나무 곁에는 그 옛날 동제를 지내던 돌이 땅에 박혀 있었다. 큰돌은 어머니가 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이고, 뒤에 숨은 작은 돌은 남근석이었다.

노루가 고개를 넘을 때면 꼭 뒤돌아본다고 했던가. 산을 내려온 우리는 정자나무 그늘에 들어 지나온 정산을 둘러보고 있었다.

안상학 시인은 1962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7년 11월의 신천'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생각]. 평전 [권종대-통일걷이를 꿈꾼 농투성이]가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처장을 거쳐 현재 (재단법인)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위 글은 2003년 전후 안동문화지킴이가 발간한 '사람과문화'에 연재했던 글을 작가의 허락으로 다시 연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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