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물줄기 흘러감이여, 아름다운 곳 영가'이리라 (二水中流地, 風流是永嘉)
'두 물줄기 흘러감이여, 아름다운 곳 영가'이리라 (二水中流地, 風流是永嘉)
  •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22.10.2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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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산 서악사에서 법룡사와 영호루를 바라보다

[기획연재] 사진으로 읽는 안동 근현대 風景 ① - 1910년대 안동읍 앞 법룡사, 영호루 전경

안동에서 머물고 있는 세월이 40년이다. 십여 년 전 어느 날 부터 목전(目前)에서 펼쳐지고 있는 지역사회를 더 가깝게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내가 딛고 선 땅과 이어지는 도로, 나즈막한 건물에 깃들어 있는 식당과 사무실, 걸으며 때때로 둘러보는 산과 강을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순 없을까. 이를 지역속으로(Local in)라고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지역과 주민 속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방법으로 착안해 낸 것이 주민들이 생산했던 근대기록물 수집과 아카이브 활동이다. 근대시기 기록물을 수집대상은 거시적이며 추상적이었다. 더 미시적이며, 구체적인 걸 생각하다가 ‘옛 사진’이라는 명징한 대상에 눈길이 갔다.

옛 사진이라는 용어는 자기 모순적 용어이다. 사진은 근대과학의 산물인데 옛날이라니. 채 100년 전 부터이니 그냥 오래된 흑백사진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주민들로부터 옛 사진을 수집하다 보면 선대의 인물을 둘러싼 스토리를 듣게 된다. 하지만 대개 어렴풋한 구전에 불과할 뿐이다. 그 다음엔 사진 속 배경에 눈길이 간다. 산과 강, 거리와 건물, 간판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이곳은 어디일까, 어느 시절인가, 어떤 행사인가 알고 싶지만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승용차로 하루를 돌아도 다 다니지 못할 만큼 안동시 면적은 매우 넓은 편이다. 언젠가부터 식자층에선 안동을 서울의 2.5배라고 비유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이든 근대시기이든 특정 행정지역 도시에는 도심(都心)이라는 중심부가 있게 마련이고 이곳에는 일종의 중추적인 핵심시설이 밀집하게 된다. 시내, 읍내라고 부르는 그 도심에는 다양한 형태의 핵심시설과 건축이 들어섰고 넓은 읍면지역까지 연결하고 포괄해내는 핵심적 기능을 감당했다. 그러나 향토사나 지역연구사에서 안동의 도시 공간 변천에 대한 연구나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에 사진과 여러 기록을 참고삼아 근대안동의 풍경을 약간의 주관적 상상력을 보태며 써 본다.

태화봉에서 바라본 안동읍내와 법룡사

1910년까지 안동 원도심에는 ‘안동읍성’이 있었다. 1380년 고려 우왕 6년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처음 축조되었다고 한다. 읍성은 돌로 쌓은 석성으로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었다. 읍성 내 공간에는 관아와 객사가 있는 공공공간, 태사묘․관왕묘․사직단 등의 제사공간, 향교 등 교육공간, 제남루․능초루․망호루․사창남지 등의 의식공간, 그리고 주거공간으로 구성돼 있었다.

안동읍성이 있었으니 안동의 원도심은 매우 ‘큰 고을’ 이었을 게다. 그런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가 매우 어렵다. 허나 공간에는 유산이 남게 되고 시간에는 기억이 스며드는 법이다. 옛 사진 속에 담긴 안동지역 풍광과 풍경을 슬쩍 지나치며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1900년 초기 시대정신은 우리에게 자주적인 독립국가의 길을 요구해 왔다. 우리백성의 단합된 힘과 지혜를 기반삼아 순조롭게 근대 시민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결과 나라는 망국으로 치달았다. 나라를 빼앗겨 망해버린 방방곡곡 고을들은 침탈과 해체의 기로에 섰다. 혹자는 이를 근대화로 미화하며 주장하고 있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수백 년 간 튼튼하게 우뚝 서 있던 수많은 건축유산들이 망가지고 파괴되었다. 1910년 한일병탄을 성공시킨 일본제국주의는 그해부터 전국의 큰 고을 중심부에서 수백 년 간 유지해오던 ‘읍성’을 강제로 철거시킨다.(읍성철거령)

이 시기 전후의 안동 도심 풍경을 넓게 조망해주는 사진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안동’을 검색하면 빛바랜 흑백사진 수십 장(가로16.4cm/세로11.9cm)이 화면에 뜬다. 그 중 ▲태화봉(서악사)에서 바라본 법룡사와 읍내(1914년) ▲태화봉(서악사)에서 바라본 영호루와 낙동강(1917년)이 대표적으로 다가온다.

▲1914년 태화봉 서악사에서 바라본 법룡사와 읍내. 영남산 아래 읍내를 더 가깝게 편집했다. 우뚝한 영남산과 그 아래 열두 골을 포함한 안동읍내와 서쪽 방향에 홀로 서 있는 법룡사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법룡사 주위 사방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국립중앙박물관

위 사진은 태화봉 서악사에서 바라본 법룡사와 읍내 장면이다. 1914년 어느 일본인이 들고 온 사진기에 촬영된 안동의 근대풍경 중 하나이다. 희미하나마 상상의 그림을 그려내며 작은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이 사진들은 1914년부터 일제가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추진한 한국문화재 조사 결과물이다. 우리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기록한 것이 일제의 강점 이후부터다. 이런 조사와 기록을 통해 식민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는 건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 고장의 사라진 공간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유일무이의 소중한 정보로 남아 있기 때문에 역설적이기도 하다. 이 기록사진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 유리원판 사진으로 남아 있고 인터넷을 통해 열람 복사할 수 있다.

서악사에서 안동읍내를 향해 촬영한 이 사진 속 들판 한가운데 홀로 우뚝 서 있는 사찰이 법룡사이다. 안동읍내에서 바라봤을 때 법룡사는 서쪽 들판 뱡향에 위치해 있다. 영가지(永嘉誌)에는 “민간에서 ‘큰 절(大寺)’이라 하는데 건물은 크고 위엄 있는 2층이고, 불상은 큰 청동 불상 1구, 흙 불상 3구, 작은 청동 불상 8구가 있다”라고 기록했다. 사진 속 법룡사(法龍寺)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고 이후 어색하게 복원되었을 뿐이다.

유리원판엔 ‘대정3년 3월17일’(1914년)로 메모했다. 우측엔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고 좌측 저 멀리 영남산 아래 안동부 고을이 보인다. 영남산 아래 열두 골에는 총총하게 민가가 형성돼 있었을 것이고, 안동읍성이 철거된 지 4년가량 지났으니 신작로가 막 닦여지고 있을 시기로 보인다. 법룡사 앞에는 큰 들판이 조성돼 있다.

이 기록사진에서 기억해야 할 키워드는 ‘영남산’과 ‘안동읍성’, ‘서악사’와 ‘법룡사’, 그리고 ‘넓은 들판’이다. 안동읍성과 낙동강 사이에 펼쳐지는 넓은 들판에 눈길이 머문다. 이 들판은 지금의 태화동, 당북동, 운흥동을 모두 포함한 지대이다.

큰 들판이다 보니 문전옥답(門前沃畓)으로 표현해도 무방할 것 같다. 안동읍성의 남문과 서문 밖의 넓은 옥답은 요즘 말로 일종의 로컬푸드를 공급하는 농산물생산기지로 해석할 수 있다. 소달구지가 지나갈 정도의 작은 들길과 들길 위에는 서성거리고 있거나 일하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태화봉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영호루

▲1917년 태화봉에서 바라본 읍내와 낙동강. 우측 아래는 서악사이다. 좌측에는 안동읍내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반변천이 낙동강으로 합수하며 큰 물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1917년 태화봉에서 바라본 읍내와 들판, 낙동강 장면이다. 좌측 낙동강과 우측 반변천의 두 물줄기가 모여들어 합수되고 있는 모습이 크고 웅장하다. 두 강물의 합수에 대한 형승(形勝)은 안동의 옛 지명 중 하나인 ‘영가’(永嘉)의 원천으로 볼 수 있다.

1602년 영가지(永嘉誌)를 편찬하기 시작할 때 안동의 백과사전 격인 지방지(地方誌) 이름을 무엇으로 정할까 고심하였다. 안동의 지세(地勢)에 맞춰 지지(地誌)를 명칭하게 된다.

“영자(永字)는 이수(二水)를 말하는 것인데, 부(府)의 포항(浦項, 게목)과 와부(瓦釜)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에 영가라고 한 것 일세” “그렇구먼, 옛적에도 이 같은 말이 있으니, 선시(選詩)에 이르기를, 두 물줄기 흘러감이여, 아름다운 곳 영가이리라(二水中流地, 風流是永嘉)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이름 해야겠네”

위 표현에서 부(府)는 안동부를 말하는 것이고 포항(浦項)은 현재 안동댐이 위치한 법흥교 아래 개목나루가 있었던 낙강이다. 와부(瓦釜)는 반변천의 옛 이름으로 와부탄으로 불렀다.

▲1914년 서악사에서 바라본 영호루. 영남지방 3대 누각의 하나인 영호루는 안동읍성 남문에서 5리에 우뚝 서 있다. 부근에 안동고을의 남쪽 관문으로 영호나루(暎湖津)가 있었다. 육로는 일직면 운삼역참으로 이어주는 나루이며 물길로는 낙동강 하구로 이어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서악사에서 바라본 영호루 광경이다. 낙동강 물길 바로 앞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는 그 자체로 스스로를 빛내고 있다. 고려와 조선의 명유들이 영호루에 올라서서 유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읊었던 시구(詩句)가 들리는 듯하다.

포은 정몽주가 일본을 다녀오며 안동 영호루를 방문했을 때, 동남쪽으로 여러 고을을 다녀봤지만 영가의 경치가 제일 아름답고 고을의 산천 형세가 가장 좋은 곳에 있다고 칭송했다.

안동읍성에서 영호루로 가는 길이 좌측으로 보이고 있다. 안기천이 낙동강 방향으로 흐르다가 영호루 근처에 이르니 그곳에 작은 다리가 놓여 있다. 아마 다리 아래로는 천리천 물길까지 합쳐졌을 수도 있다.

안동읍성과 드넓은 들녘, 낙동강에 우뚝 세워진 영호루는 영남의 3대 누각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이 장면을 거듭 바라보고 있으면 눈앞에 펼쳐진 들판과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낙동강물을 능히 홀로 감당하며 그 기운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영호루의 저력을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모든 강토를 빼앗긴 채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의 질곡에 빠져 있지만 영호루 만은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걸 알고 강물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다. 영호루는 지난 1천여 년 동안 큰 물난리로 다섯 번이나 유실되었고 이 과정에서 복원과 중수를 거듭했다. 1917년 사진에 찍힌 영호루는 1796년에 안동부사 이집두에 의해 복원되고 1820년 안동부사 김학순이 누대를 중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1934년 7월23일 갑술수해로 완전히 유실된다. 갑술년 홍수 이전에 발행된 우편엽서 속 영호루의 모습은 널리 알려져 있다.

▲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기 이전 법룡사 ⓒ문화모임안동
▲ 갑술년 대홍수(1934.7.23) 이전에 발행된 우편엽서 속 영호루 ⓒ서이환
▲ 갑술년 대홍수(1934.7.23) 이전에 발행된 우편엽서 속 영호루 ⓒ서이환

서악사~법룡사~낙동강~영호루를 둥근 원형으로 연결해 내는 110여 년 전 옛 사진 몇 장을 보며 우리는 안동의 원도심이었던 안동읍성(읍내)의 지리와 형세를 대강으로나마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영남산 아래 안동읍성을 받쳐주고 있는 들판과 그 너머의 영호루에서는 어떤 행사가 있었을까?

기우일기(祈雨日記)는 1892년(고종29년) 6월 당시 안동대호부사를 역임하고 있던 동농 김가진이 안동지방에 가뭄이 극심해지자 아홉 번 기우제를 지낸 풍경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6월17일부터 무려 20여 일간 사직단, 관왕묘, 학가산, 선농단, 선어연, 영남산, 갈라산, 조골산, 태백산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기우제를 지내기 직전인 5월13일에 많은 선비들을 영호루에 불러 모아 놓고 한바탕 풍루를 즐기게 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윤6월6일 태백산에서 정성을 다해 기우제를 끝내니 비가 흡족하게 내렸고 관민이 즐거워하자 부사는 노고를 치하하는 연회를 영호루에서 베풀게 한다. 날이 저물어 갈 때 영호루 인근 강 모래밭에 몰려든 어린이와 노인들, 누각에 둘러앉은 사람에게 참외 하나를 나누어 주게 한다. 농부들에겐 술 2통씩 나누어주자 부로(府老)들이 사또 앞에 나와 절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난후 부사는 “비가 충분히 온 뒤라서 낙동강 푸른 물 위에는 갈매기가 떼지어 날고 넓은 들판에는 새싹들이 쑥쑥 돋아났다. 모두들 만약 하루가 더 지나도록 비가 오질 않았다면 농작물이 이같이 소성(蘇成)하였겠는가 하면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 1917년 서악사에서 바라본 안동 ⓒ국립중앙박물관
▲ 1917년 서악사에서 바라본 안동 ⓒ국립중앙박물관

서악사를 품고 있는 태화봉 높은 지대에서 법룡사와 영호루 방향으로 찍은 1914년과 1917년의 옛 사진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엿보고 상상해낼까. 1919년 삼일만세운동이 발생하고 일제가 식민정책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이어가는 1920년대가 시작될 즈음에 오늘의 안동원도심 즉 근대 시가지의 기본 틀이 형성되었다는 게 기존의 시각이다.

1914년에 비해 1917년의 사진을 보면 들판의 경지정리와 구획이 확연하게 달라지고 있다. 안동구도심으로 들어가는 길의 모습 또한 1914년에 비교해 보면 더 넓어지고 있다.

최근 상주읍성 4대문과 읍성 내 주요건물 사진엽서가 일본에서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상주읍성 내에 존재했던 태평루, 상산관, 진남루, 남문, 작청, 청유당 등 주요 건물들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910년대의 안동읍성과 관련된 사진자료 또한 존재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시사하는 점이 크고 노력하면 찾게 될 것이다.

안동향토지(1983년)의 저자 송지향은 “안동이 경주에 버금가는 고적도시가 될 수 있었다”며, “신식 도시화 과정이 아무리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주인된 이들이 웬만큼이라도 옛 자취의 소중함을 인식했더라면 그 숱한 유적 가운데 어느 한 퀴퉁이 만이라도 보존할 수 있지 않았을까....” 대도호부의 성중(城中)이었던 오늘의 안동시내에는 당시 유적이란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한탄했다.

[위 기사는 계간 기록창고(2022년 여름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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