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배 오르던 임청각 앞 개목나루엔 무심한 물길만 흐르고
소금배 오르던 임청각 앞 개목나루엔 무심한 물길만 흐르고
  • 유경상(계간기록창고 발행인)
  • 승인 2023.01.2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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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옛 나루터엔 어김없이 웅장한 교량이 설치되었다

[기획연재] 사진으로 읽는 안동 근현대 風景 ③ - 나루터와 뱃길
(사진1) 우측에 탑동종택과 법흥사진칠층전탑이 보인다. 바로 아래 강가에 굵은 통나무가 쌓여 있고, 몇몇 일꾼들이 통나무를 강둑으로 옮기고 있는 장면이다. 상류 봉화지역에서 벌목된 금강송은 뗏목으로 묶여 하류로 실려 왔다. 개목나루가 있었던 곳으로 추청하고 있다. 중앙선 철로가 개설되기 이전의 옛사진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사진1) 우측에 탑동종택과 법흥사진칠층전탑이 보인다. 바로 아래 강가에 굵은 통나무가 쌓여 있고, 몇몇 일꾼들이 통나무를 강둑으로 옮기고 있는 장면이다. 상류 봉화지역에서 벌목된 금강송은 뗏목으로 묶여 하류로 실려 왔다. 개목나루가 있었던 곳으로 추청하고 있다. 중앙선 철로가 개설되기 이전의 옛사진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안동은 물의 고장이다. 강(江)과 천(川)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물에 의존하는 동시에 이용하며 살아왔다. 안동 도심은 두 갈래의 강물이 서로 만나 합수하는 형세를 앞에 두었다. 뭍사람들은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이 합쳐지고 있는 경기도 양평을 두물머리(兩水里)라고 불렀다. 두 물이 합해지기 때문에 ‘두물’이고 홍수 때 실려 온 모래사장이 두 줄기 강 방향으로 ‘머리’를 길게 뻗은 모양이다. 한자로는 양수두(兩水頭)라고 썼으나 일본식민지 시절부터 양수리로 불리게 된다.

안동 역시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수되는 아름다운 지형과 풍광을 자랑하고 있어 널리 알려진 양평의 두물머리와 겨룰 수 있는 아름다운 색채를 지닌다. 두 물줄기가 흘러 아름다운 곳 영가(永嘉)라고 이름을 지었고 영(永)은 이수(二水)를 뜻하고 있다. 이른 새벽에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낙동강에 다가가면 뽀얗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물안개를 감상할 수 있고 저녁에는 일몰의 장엄함을 맞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안동보조댐 아래 낙동강과 반변천을 따라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산책 장소로 자리를 잡았다. 강가는 아침과 저녁나절에 특유의 정취를 나눠주고 있는 인기 있는 장소로 변화되었다. 여러 종의 텃새와 철새들이 날아 들어와 서식하고 있는 수변 생태공간으로 변모했다.

또한 안동은 강 따라 여러 개의 나루가 있었던 고장이었다. 100여 년 이전으로 돌아가면 이곳은 어떤 풍경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까? 소위 옛길은 이 두 갈래 길로 이해할 수 있다. 근대교통으로 대표적인 신작로와 철길이 아예 없었던 시절에는 땅길(陸路)과 물길(水路)이 교류와 소통의 유일한 통로였다.

안동은 낙동강이 흘러가는 영남지역의 최상류에 위치해 있다 보니 물길을 거슬러 올라온 나룻배의 종착지로 명성이 높았다. 이를 내륙수운의 소강종점(遡江終點) 또는 가항종점(可航終點)이라고 말했다. 낙동강 하류에서 선박으로 올라갈 수 있는 한계지점이라는 의미이다.

강물은 평소에는 잔잔히 흐르는 고요한 흐름을 띤다. 그러나 강은 거칠고 예측이 쉽지 않은 무서운 기운을 품고 있다. 그래서 강을 끼고 사는 사람들은 늘 강을 다스리는 제도와 기술을 준비해야 했다. 다시말해 강은 제방(堤防)의 역사이다. 강 옆 고을과 마을은 강으로부터 생존의 안녕을 얻어 냈지만 동시에 수해를 늘 대비해야 했다. 물길을 다스리는 사업을 일컫는 치수(治水)는 농경으로 삶터를 일궈온 우리에게 중요한 필수과제였다. 현재 안동시가지를 에둘러 흐르고 있는 낙동강의 포항제(浦項堤), 반변천의 송제(松堤)는 오랜 세월 물길을 관리하기 위해 제방을 쌓고 증축해 온 시련극복의 흔적을 비석으로 대변하고 있다.

(사진2) 《허주부군산수유첩》은 낙동강과 반변천 일대 경승 12폭 선유도를 그린 작품집으로 제1도〈동호해람〉은 영남산과 임청각, 강가와 숲, 물길 위 나룻배를 묘사한 그림이다. (출처:문화재청)
(사진2) 《허주부군산수유첩》은 낙동강과 반변천 일대 경승 12폭 선유도를 그린 작품집으로 제1도〈동호해람〉은 영남산과 임청각, 강가와 숲, 물길 위 나룻배를 묘사한 그림이다. (출처:문화재청)

상류 물길 따라 금강송 뗏목이, 아래에선 소금과 어물이 올라왔다

강물 위에 배를 띄우는 통로 역할을 해 온 곳을 나리, 나루로 불렀다. 강이나 내에서 배가 건너가고 위와 아래로 오르내리려면 일정한 곳에 나루터가 있어야 한다. 안동시내로부터 아래쪽으로 거론되는 대표적인 나루는 아홉 개로 요약할 수 있다. 열거해 보면 ▲개목나루 ▲영호나루 ▲회곡나루 ▲마애나루 ▲아틈실나루 ▲병산나루 ▲하회나루 ▲광덕나루 ▲구담나루 등이다.

영가지(1608년)에서는 개목나루를 포항나루로 기록하고 있다. “안동부의 동쪽 영춘정 동쪽에 있으며 관선이 있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고 했다. 위치는 지금의 법흥 인도교 서쪽 끝단에서 임청각 앞 회화나무 언저리로 추정하고 있다. 겨울에 다리를 놓았다면 섶다리 수준의 동강교(영가지에서 부의 동쪽 5리로 서술)로 짐작할 수 있다.

사진 이전에 기록자료인〈사진2〉는 18세기 임청각 앞 풍경을 나타내는 유명한 그림으로 ‘동호해람(東湖解纜)’으로 전해진다.《허주부군산수유첩》은 낙동강과 반변천 일대 경승 12폭 선유도를 그린 작품집으로 제1도〈동호해람〉은 영남산과 임청각, 강가와 숲, 물길 위 나룻배를 묘사한 그림이다. 동호는 임청각 앞에 있는 강이고 해람은 출항한다는 뜻이다. 유람선이 출발하는 건 나루터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개목나루의 역할은 강을 건너가는 동서 육로 연결과 남쪽에서 올라오는 물길의 요충지였다. 낙동강 하류에서 소금과 어물을 실은 장삿배가 오르내렸고 또한 상류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온 뗏목이 닿은 곳이었다. 개목나루 뱃길은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분석한다. 지금의 운흥동에서 정상동으로 건너가 금소역과 이어지는 길, 법흥동에서 정상동으로 건너가 청송 청운역과 이어지는 길이다.

〈사진1〉은 임청각 좌측에 늘어선 집과 거리, 우측 노거수 뒤편에 있는 법흥동7층전탑과 탑동파종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앙선 철로가 건설되기 이전의 기록사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우측 강둑 위에서는 물길 따라 실어온 통나무를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개목나루 바로 위쪽에 굵은 통나무가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각자료이다. 봉화 일대에서 벌채된 금강소나무(금강송, 춘양목)를 뗏목으로 엮어 낙동강 하류로 운반했다는 사실이 사진으로 확인되는 장면이다.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전 물자이동이 낙동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낙동강 하류에서 안동으로 물길을 따라 올라온 대표적인 물품이 소금이다. 강물이 불어나는 여름철 중수기에 남해바다에서 생산된 소금과 어물이 낙동강을 거슬러 운반되어 개목나루에 내려놓고 나면 다시 쌀, 콩, 목재 등을 싣고 내려갔다. 법흥동 강가에는 장시(場市)가 섰을 것이고 주막과 여각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영호나루는 영호루 아래에 설치돼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에 따라 영호진, 영호루진, 영호도 등으로 불렸다. 영가지에 “영호나루는 부의 남쪽 영호루 아래에 있고 관선과 누선이 있다”고 전한다. 옛 영호루의 위치에는 현재 유허비(1992년)가 세워져 있다. 유허비는 중앙선 철교와 강변도로 교차 지점에서 강변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100여 미터 지점 우측 도로 옆 언덕에 세워져 있다. 유허비에서 전방 20미터 지점에 옛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영호루가 우뚝 세워져 있었다.

고려 말 공민왕이 피난을 왔을 때 남문 밖에 서 있는 영호루를 자주 찾았고 누각 밑 강물에서 뱃놀이를 즐겼다는 건 영호나루터에서 배를 탔다고 볼 수 있다. 아직까지 영호나루와 관련된 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나루터가 있던 자리는 근대시기 강폭 위 교량으로 설치되는 경향이 높았다. 지금의 안동인도교와 안동철교가 지나는 물위가 영호루 뱃길이었다.

영호나루의 역할은 남쪽 통로인 일직 운산참역으로 이어주고 다시 의성 철파역으로 가는 길이다. 동시에 하구에서 소금, 어물이 올라 왔는 만큼 개목나루와 함께 관선과 누선이 띄어져 있었다. 이 두 군데의 나루터는 안동읍치의 동쪽과 남쪽 역로를 연결하는 관문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역동적인 나루터의 풍경을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이러한 강나루터의 재현 풍속을 익히 보며 살았기 때문이다.

(사진3) 1957년 법흥교 아래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다. 나루터가 사라진 후 개목나루터(견항진)에는 법흥교(1956년)가, 영호나루터에는 안동교(1934년)와 안동낙동철교(1938년)가 세워졌다. 물길 시대가 끝나고 뭍길로 바뀌는 근대교통의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출처:조상국)
(사진3) 1957년 법흥교 아래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다. 나루터가 사라진 후 개목나루터(견항진)에는 법흥교(1956년)가, 영호나루터에는 안동교(1934년)와 안동낙동철교(1938년)가 세워졌다. 물길 시대가 끝나고 뭍길로 바뀌는 근대교통의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출처:조창희)

100년 전까지도 소금, 곡물 가득 실은 선박 안동까지 운행

그렇다면 19세기 말 즈음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지방 안동까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소금(鹽)의 유통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궁금하다. 익히 알듯이 소금은 인간생존에 꼭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이었다. 도로가 불편하고 불량했던 시기에 무게가 많이 나가는 소금은 선박으로 운송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소금을 생산하였던 염장은 바닷가 하구와 만을 중심으로 조성됐는데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하나는 곧바로 배를 띄워 내륙 깊숙이 들어 와 소금을 판매할 수 있다는 것도 포함된다.

하천은 유량의 변화에 따라 갈수기, 평수기, 중수기로 나누는데 주로 중수기에 소금배가 안동까지 올라왔다. 운반 시기는 봄과 가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봄은 갈수기에 해당하고 가을은 우기가 끝난 중수기와 평수기에 해당해 예천, 영천(영주), 신봉화(내성)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갈수기에는 소강종점이 상주 낙동진까지 제한되어 소금 유통이 축소되는 관계로 남한강 수운을 통해 소금이 들어왔다고 한다. 또한 겨울철에는 동해안 제염지에서 내륙으로의 유통이 활발했다.

이중환의《택리지》(1751년)에서는 낙동강에서의 가항수로(可航水路)와 가항종점을 상주 낙동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연구자 사이에는 이 기록은 문헌에 나타나는 것일 뿐이며 실제로는 상주 낙동진 이북 상류지역인 안동까지 작은 배들이 소강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경부선 철도 개통(1905년) 후 일본배가 왜관에서 안동까지 본격적으로 운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예안면 주진(주진)까지 소금배가 올라왔다는 주장과 일제시대 때 예안군 읍내면까지 30석을 실은 선박이 소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심지어 일제 조선총독부의〈조선하천조사서〉(1929년)에서는 중수기에 곡물 150석 이하를 실은 선박이 안동까지 소강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신문기록(조선일보,1925.7.24)에는 “일전에 호우로 인해 안동면 호암나루에서 상선 한척이 전복됐는데 경남 김해 윤학도의 배로 □ 300석과 안동포 70필을 싣고 내려가다가 물품 전부를 유실했다”고 보도했다. 기사 본문에서는 300석의 내용물을 구체적으로 게재하지 않았으나 쌀 등의 곡물로 추정할 수 있다. 상주 낙동진과 문경 영순의 달지에서부터 안동 구간까지 결빙기와 갈수기, 홍수기를 제외하고는 선박의 운행이 가능했다. 불과 100여 년 전에만 하더라도 안동방향으로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고 다시 물길을 따라 다양한 형태의 물품이 운반되었다는 걸 상기해 볼 때 엄청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진4) 안동 시내를 벗어나서 하류로 흐르는 낙동강은 곧 세 개의 나룻터인 회곡, 마애, 아틈실나루를 만난다. 우뚝 서서 이어지는 절벽과 아래에서 흐르는 강물은 천혜의 경관을 자랑한다. 단호 깊은 산에 소나무가 울창해 솔둥지 땔감을 가득 실은 나룻배가 마애나루터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이명석)
(사진4) 안동 시내를 벗어나서 하류로 흐르는 낙동강은 곧 세 개의 나룻터인 회곡, 마애, 아틈실나루를 만난다. 우뚝 서서 이어지는 절벽과 아래에서 흐르는 강물은 천혜의 경관을 자랑한다. 단호 깊은 산에 소나무가 울창해 솔둥지 땔감을 가득 실은 나룻배가 마애나루터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이명석)

천혜의 자연경관인 회곡, 마애나루 건너 절벽엔 영웅담 전설이 가득

영호나루터 앞을 유유히 흐른 낙동강은 지금의 안동생명과학고 앞을 지나며 북쪽 송현동 방향으로 물길을 틀어 앙실마을로 나아간다. 남쪽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물길이 두 번이나 위아래로 휘감기고 있기 때문에 마치 바다가 육지 쪽으로 들어와 있는 만(灣)과 곶(串)의 지형을 만들어낸다. 이때 북쪽에서 송야천이 합류해 흐르다가 다시 미천을 품으면 비로소 모래톱을 넉넉하게 쌓아 내는 강물을 이루게 된다. 푸른 빛깔 강물 너머엔 들녘이 펼쳐지고, 산이 있는 곳으로는 옥동, 수하동, 막곡리, 계평리, 검안리 마을과 공장지대가 조성돼 있다. 남북으로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물길 위에 높은 풍산대교가 들어섰다. 강물 양편으로 단호리와 회곡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단호리 쪽엔 낙암절벽과 상락대가 있고 강 건너 회곡리에 나루가 있었다. 회곡나루는 남후면 단호리와 풍산읍 회곡리를 연결하던 나루터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주로 풍산장을 보러가던 물길이었다. 이 나루는 구담과 마애를 지나 올라오는 소금배의 중간 정박처의 역할도 감당했다.

지금은 회곡막걸리로 유명해진 동네이지만 예전엔 강을 사이에 두고 암벽과 모래사장으로 절경을 이루었던 곳이다. 낙암절벽 위에 세워진 낙암정은 강 풍경과 조화를 빚어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낙암정은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낙암(洛巖) 배환이 문종(1451년)때 세운 정자이다.

낙암정에서 전망대를 지나 서편으로 조금 내려가면 상락대이다. 고려 말 걸출한 장군이자 재상이었던 충렬공 김방경은 회곡마을에서 성장했다. 회곡에서 나룻배를 타고 단호로 건너가 무예를 연마했던 유허지로 알려져 있다. 절벽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앞에 둔 회곡마을은 선(先) 안동김씨 800년 세거지이다. 지금은 절벽 아래 낙동강생태학습관이 조성돼 있어 옛 물길의 역사를 머금고 있을 뿐이다.

비껴나간 얘기지만 회곡마을 출신 김방경에 대해선 재조명의 필요성을 느낀다. 생애 전체의 가치가 매몰되어 있는 역사적 인물의 위대한 모습이 종종 외국의 문호에 의해 빛을 발하는 경우가 있다. 일본 국민작가 이노우에 야스시가 1963년에 쓴 풍도(風濤)에서 김방경 장군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원나라의 지배 간섭기 당시 몽골제국은 속국 고려를 압박해 1, 2차례나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부대를 조직해 파병했다. 소설내용은 대부분 고려에 관한 것인데 당시 몽골제국인 원나라는 고려의 모든 재정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국운이 기울어진 외세의 압제 속에서도 고려백성과 왕실을 보존하려고 고뇌했던 한 거인의 궤적을 더듬을 수 있는 글이다.

고려 말 30여 년에 걸친 대몽항쟁 전후에 발생한 삼별초의 활동을 긍정적으로만 교육받고 자란 세대에게 김방경은 조금 낯설게 다가온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하수인이자 사병으로 전락한 성격이 짙었다. 1970년대 군사 독재정권이 어용학자들을 앞세워 국난극복의 사례로 치켜세운 역사조작의 한 사례로 보는 시각이 있다. 난세에 힘겨운 선택을 하며 충정의 길로 나아갔던 김방경은 반역 혐의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안동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진5) 지금은 볼 수 없는 강변마을 마애리의 나루터 풍경. 나룻배와 마을주민들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소나무 숲이 있는 공원 너머에 옛 나루터가 있는 곳이다.  이 사진은 2022년 옛사진공모전에서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출처:이명석)
(사진5) 지금은 볼 수 없는 강변마을 마애리의 나루터 풍경. 나룻배와 마을주민들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소나무 숲이 있는 공원 너머에 옛 나루터가 있는 곳이다. 이 사진은 2022년 옛사진공모전에서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출처:이명석)

사라진 옛 나루터엔 어김없이 웅장한 교량이 설치되었다

풍산평야 지대를 배후로 자리 잡은 마애나루와 아틈실나루는 주요한 소통 물길이었다. 마애마을 앞 강변에 소나무 숲이 있는 공원에 옛날 마애나루터가 있었다. 이어 마애리에서 강을 따라 내려가면 마애절벽이 끝나는 곳이 아틈실나루이다. 남후 하아리에서 마애로 넘어가면 십리 정도에 풍산장터가 있었다. 아틈실나루엔 소금배가 쉴 때 주막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하고 있다. 지금은 마애 방향으로 단호교가 있고 하아리 쪽엔 풍남교 다리가 설치돼 있다는 것이 흥미로울 뿐이다.

나루터가 있는 풍경을 담은 옛 사진은 좀처럼 발견하기가 어렵다. 다행스럽게도 올해 옛사진 공모전에서 마애리와 망천절벽 쪽 풍경을 담은 다수의 사진이 발굴되었다. 마애리가 고향인 이명석씨가 1960년경 마애나루터 모습을 담은 기록사진인데 당시의 여러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마애마을 뒤편에는 높은 산이 없어 강 건너 산에서 솔가지를 베어 나룻배로 이송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다.

(사진6) 하회나루는 광덕리로 가거나 옥연정사로 건너가서 옥연나루로 불리었다. 하회마을과 함께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다. 부용대 아래에서 나룻배를 탄 남자들이 관광유람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하회마을보존회)
(사진6) 하회나루는 광덕리로 가거나 옥연정사로 건너가서 옥연나루로 불리었다. 하회마을과 함께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다. 부용대 아래에서 나룻배를 탄 남자들이 관광유람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하회마을보존회)

풍산평야를 지나 내려오는 풍산천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면 다시 물길은 병산리 쪽으로 흐르는데 강폭이 좁아진다. 아틈실나루는 강폭이 넓지만 병산마을 물길은 협소해 겨울에 섶다리를 만들었다. 병산서원 아래쪽에 나루터가 조성돼 있었다. 풍천면 임금리 주민들이 풍산장날과 안동으로 나들이를 갈 때 건너던 나루터이다. 병산리는 뒤편에 화산이 앞에는 강 절벽이 마주보고 있는 지형이다. 병산서원 만대루가 절벽과 그 아래 강물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셈이다.

지금은 병산에서 하회까지 물길 옆 산허리를 끼고 4km 유교문화길이라는 산책로가 다듬어져 있다. 하회나루터는 하회마을 부용대 아래 만송정 솔숲이 나오고 모래사장이 끝나는 물가에 있었다. 이곳은 광덕리로 내려가거나 혹은 옥연정사로 바로 건너가는 나루터여서 옥연나루터로 불렀다.

하회마을 아래 광덕나루와 구담나루는 안동시내에 있었던 개목나루와 영호나루에 버금가는 중요한 물길이었다. 광덕리와 도양리를 잇는 광덕나루는 의성군 신평과 풍천 일대의 풍부한 곡창지대와 관련이 있다. 그러다보니 조선시대 곡물을 저장하던 광덕창이 있었다고 한다. 창고는 나라의 경제적 기반을 받쳐주고 유지하는 조세를 받아 보관하는 곳이다. 옛날에는 세금을 대부분 곡물로 거두었으니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배가 하류로 운행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바로 앞 풍산평야에서 거둬들인 풍산창이 있는데도 광덕창을 둔 건 광덕나루와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다. 지금은 광덕교가 놓여 옛 나루터의 흔적은 묻혔고 기억은 희미할 뿐이다.

(사진7) 1974년 즈음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 '한강(漢江)'의 촬영이 진행된 안동시 풍천면 도양리의 나룻터 전경이다. 영화 개봉이 1974년이니 이전에 찍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 제공자(김종흥)는 도양리 나루터라고 말했다. 광덕교는 광덕리와 도양리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어느 쪽 나루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루터 촬영장에 구경꾼이 많이 앉아 있다. (출처:김종흥)
(사진7) 1974년 즈음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 '한강(漢江)'의 촬영이 진행된 안동시 풍천면 도양리의 나룻터 전경이다. 영화 개봉이 1974년이니 이전에 찍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 제공자(김주호)는 도양리 나루터라고 말했다. 광덕교는 광덕리와 도양리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어느 쪽 나루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루터 촬영장에 구경꾼이 많이 앉아 있다. (출처:김주호)

 

(사진8) 구담교가 설치되기 전 구담나루는 오일장이 있는 날이면 사방 30리에서 장꾼들이 몰려들었다. 1977년 풍천면 구담나루터의 모습이다. (출처:사진으로 보는 20세기 안동의 모습, 이찬규)
(사진8) 구담교가 설치되기 전 구담나루는 오일장이 있는 날이면 사방 30리에서 장꾼들이 몰려들었다. 1977년 풍천면 구담나루터의 모습이다. (출처:사진으로 보는 20세기 안동의 모습, 이찬규)

낙동강이 흘러 안동 끝자락에 있는 구담(九潭)은 마을의 뿌리가 깊은 만큼 뱃길이 유명한 곳이다.《영남읍지》〈용궁현읍지〉도로 편에서 “동으로 오십 리에 안동과의 경계에 구담진이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오래된 뱃길이 있다. 의성 신평과 안동 풍천쪽에서 풍산이나 예천, 안동으로 가기위해 이용했던 나루이다. 예천 지보에서 육로를 따라 구담을 거쳐야 안동으로 갈 수 있어 육로와 수로가 교차하는 곳이었다. 소금과 어물을 실은 배가 당연히 거치는 과정에서 장사꾼이 득실거렸다. 구담의 장시(場市)는 나루터가 있었던 장터마 또는 아릇섬으로 불리던 곳에서 열렸다. 안동과 의성, 예천의 행정구역이 서로 맞물린 경계지점이며 폭이 넓은 강을 건너거나 올라왔던 오일장으로 번성했다. 사방 30리에서 몰려든 장꾼과 장사꾼이 뒤섞여 온갖 난전이 펼쳐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구전이 아직까지도 나돈다.

강물 따라 오고갔던 물길 기억은 생활문화의 주요한 뿌리

안동지역은 예로부터 낙동강과 반변천이라는 하천이 합수되는 지점이었다. 양 물길 상류에 폭우가 쏟아지면 홍수로 인해 하천의 범람이 잦았고 피해규모가 매우 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75년부터 안동에 관한 홍수 언급이 다섯 차례 언급된다. 영호나루터 강둑에 우뚝 섰던 영호루가 다섯 차례나 유실되는 아픔을 겪는다. 안동부를 둘러싼 낙동강 본류의 포항제와 반변천의 송제도 1605년 홍수로 제방이 유실되어 대규모 복구사업이 이뤄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낙동강이 태극처럼 감아 도는 하회마을이 형성 이래 홍수가 아예 없었다는 것은 풍수가들이 지어낸 스토리일 뿐이다. 1605년 대홍수로 송림 안에 있는 정자 만송정이 표실되었고 옥연정 마당까지 물이 들어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934년 홍수 때는 출입도로가 유실되었고 1980년에 하회제방이 인공으로 조성되었다.

강을 따라 만들어진 안동 고을과 마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논과 밭을 본격적으로 개간하고 천방 시설을 통한 관개를 활발하게 조성해 왔다. 15~16세기에는 천방(川防), 방천(防川), 보(洑)가 조성되었고 나루터를 이용하는 물길이 더 활발해졌다. 이곳에는 정자가 세워져 강의 구조와 경관은 바뀌게 된다.

이때부터 강과 천에서는 일반 백성까지 노닐 수 있는 휴식처가 되었다. 물길 위를 오고간 나룻배는 생활의 필수물품을 실어 날라주었다. 천렵이 유행했고 어량과 어전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생선과 소금은 어업과 제염 즉 어염의 이익으로 나아갔고 이 모든 궤적에는 강물 따라 오고갔던 나루터와 물길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위 기사는 기록창고(2022.겨울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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